(33) 떠나고 사라져가는 것에 대하여 / 서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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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작성일 2018-12-12 11:35 조회 8,981 댓글 0본문
<수필산책 33 >
떠나고 사라져가는 것에 대하여
서미숙 / 수필가, 시인 (한국문협 인니지부 회장)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적도의 햇살은 내 책상 한가운데까지 깊숙이 들어와 아침인사를 한다.
창밖을 통해 한눈에 들어오는 자카르타 시내전경을 바라본다. 언제나 회색빛으로 내 눈에 들어오던 자카르타의 전경이 오늘은 어쩐지 경쾌한 풍경으로 촉촉한 향기마저 내뿜고 있다. 활짝 창문을 여니 항상 느끼던 텁텁한 바람대신 시원한 바람이 들어와 거실안의 공기를 휘저어 놓는다. 한 장밖에 남지 않은 달력이 펄럭인다. 바람에 휘날리던 달력은 기회는 이때다 싶어 시위하듯 춤을 추고 있다. 벽속에 고요히 기대어 있던 12월의 달력이 나도 곧 떠날 거라고 작별 인사를 준비하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만 같다.12월의 앞에서 귀를 기울이며 사각사각 시간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는다. 흐르는 세월을 헤아릴 여유도 없이 바쁘게 한해를 보내다 보니 어느새 2018년도 서서히 떠날 채비를 서두르고 있을 줄이야 미처 깨닫지 못했다.
무의식중에 자꾸 펄럭이는 달력에 눈이 가면서 그 숫자들은 내 컴퓨터의 자판처럼 반짝인다. 분주하게 보낸 지난날들이 그 시간들이 모두 그렇게 떠날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나보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지인들이 보내온 아름다운 가을 영상을 보고 감탄에 젖어 있었는데 노랗고 붉게 온 대지를 물들이던 단풍의 향연도 어느새 겨울을 재촉하는 빗속으로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모두가 그렇게 찰나의 순간처럼 흔적만을 남긴 채 떠나버리고 대지는 또 다시 새로운 계절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세계가 온난성 기후로 변하고 있는 요즘은 우리나라의 봄과 가을도 더욱 짧아진 느낌이다. 한국을 떠나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그리움의 계절인 봄과 가을도 그렇게 찰나의 순간이 되어버렸다. 이곳 자카르타의 계절도 마찬가지다.
열대성 더위에 적도의 나무들이 축 늘어져 있는가 싶더니 바로 우기로 접어들고 시도 때도 없이 폭우가 쏟아진다. 거기에 수식어처럼 이어지는 자카르타의 교통체증은 스트레스를 더욱 심화시킨다. 우리의 삶이 늘 떠나보내고 새롭게 변화하는 현실의 연속이지만 이곳 자카르타의 풍경만큼은 크게 변하지 않고 있음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이러니할 뿐이다. 자카르타에서만 이십여 년을 살아오면서 한 가지 특징을 꼽으라면 계절의 단순함이다. 우기와 건기의 연속이니 말이다.
한국에 오랫동안 다녀와도 언제나 변함없이 나를 맞이하는 후덥지근한 열대성 더위가 이제는 따뜻함과 푸근함으로 다가온다. 비로소 집에 돌아왔다는 안도감과 동시에 평온함에 젖어들기까지 한다. 이 얼마나 다행인가. 적도의 계절에 20여년 가까이 익숙해지다보니 이제는 이곳이 고향 같고 고국이 타향처럼 느껴진다. 익숙함의 비애라고 해야할까?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에 비하여 단지 건기와 우기로 나뉘는 이곳 인도네시아 계절은 떠나고 맞이해야 하는 이별의 의식은 거치지 않아도 되겠지만 감각이 무디어지고 감성도 메말라가는 듯 한 아쉬움도 남는다.
똑딱똑딱,! 시계의 움직임이 눈에 들어온다. 순간 숨을 죽이며 시간이 소멸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본다. 모든 움직임에서 정지해 보니 십이월의 시간 앞에 있는 내가 비로소 보인다. 어김없이 피고 지는 자연의 순리 앞에서 또 정확하게 오차 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이렇게 저렇게 많은 것을 깨우쳐주는 한 시절이 또 저물고 있다. 세상에 변하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산천에 흐르는 물도 쉼 없이 물결을 만들며 강으로 바다로 흘러간다. 한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도 편리함과 가벼움만 쫓아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래서 어쩌면 더 소중한 것을 잃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때로는 타인에게 마음을 열 수 있는 여유로움을 잃어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우리 모두에게 더 높은 꿈을 향해 치달으며 새로운 시작을 잉태하고 있는 십이월에는 떠나고 사라져 가는 것, 그리고 다가오는 것이 서로 마주하고 있음이 보인다. 과거와 미래라는 두 개의 다른 시간이 지각 변동을 일으키며 몸을 꿈틀거리고 있다. 사라져 가면서 한없이 다가오는 것처럼 보이다가 한없이 사라져가는 시간의 에너지, 어쩌면 시간은 역사와 인생을 그렇게 이어왔는지 모른다. 어느 누구에게는 무한한 기쁨이 되기도 하고 또 어느 누구에게는 한없이 슬픔이 되었던 그 시간들이 이제는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다.
“모두가 그 또한 지나가리라’는 평범한 진리만을 남겨 놓은 채 2018년은 서서히 떠나고 있다.
지나온 시간을 돌이켜보며 우리는 아쉬움과 회한, 반성과 후회 그리고 다가올 새해에 대한 기대와 희망, 그런 감정에 동요되는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십이월의 앞에서니 시간도 나이를 먹는 것 같다. 분주한 바람이 지나가지만 끔쩍도 없이 묵묵함으로 버텨내고 있다. 어쩌면 애초에 시작도 끝도 없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방식도 존재감도 모두 사람이 만들어 놓은 방식인지도 모른다. 시간은 무형, 무색, 무미, 무취, 무한한 무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우주의 만물인 인간과 함께 생성과 소멸을 거듭할 뿐이다. 그렇지만 인간은 시간의 질서를 만들어놓고 시간을 관리한다. 그러면서 늘 시간에 쫓기며 사는 우리는 오히려 시간에게 관리를 당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십이월은 시간과 나, 나와 시간의 관계 앞에서 침묵하며 정리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은 달이다. 떠나고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하여 깊게 생각해 보는 이 시간, 문득 언젠가 감명 깊게 읽었던 책, 프랑수아를로르의<쿠뻬씨의 행복여행>의 글귀가 생각난다. 떠나고 사라져가는 12월의 길목에서 조용한 떨림으로 행복의 메시지가 되어주는 것만 같다.
“춤추어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그렇다. 살아 있다는 것에 고마워하자, 그리고 감격하자, 그래서 또 다시 만나게 되는 새해에는 가슴 뜨겁게 희망을 설계하고 멋지게 살아내는 자신을 만나보자.
굿바이! 2018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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