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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아름다운 그 소리 / 김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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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작성일 2019-07-11 14:18 조회 7,70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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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산책 62 >
 
아름다운 그 소리
 
김재구 / 한국문협 인니지부 사무국장
 
 
 
인생살이가 다 그런 것 같다. 늘 힘든 일만 있는 것도 아니고 늘 기쁜 일만 있지도 않다는 생각이다.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수레 바퀴처럼 기쁜 일과 나쁜 일이 번갈아 가며 나타나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싶다. 아무리 삶이 힘들고 어려운 때에도 웃을 일이 항상 있기에 사람들이 그래도 인생을 버티고 살아 가는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내가 유년의 삶을 살던 1970년대 왕십리의 삶이 그랬다.
 
사실 70년대 가난은 쓰나미처럼 한반도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산동네 어디에도 자라는 아카시아 나무처럼 가난은 아주 흔한 일상이었다. 왕십리에서의 삶은 어쩌면 부모님들에게는 서글픈 가난의 기억들로 생각만 해도 몸서리 처지지 않을까 싶다. 그때를 어떻게 사람들이 이겨 냈는지 상상이 가질 않는다. 특히 겨울이 오면 싫다 좋다 라는 개념이 아니었다. 산동네 사람들에게 겨울이 오는 것은 다소 무섭고 공포에 가까운 기분을 가져다 주었다. 동네가 산에 있다 보니 연탄 나르는 일이 무척 큰 일이었지만, 그렇게 힘이 들어도 연탄이나 살 돈이 있으면 그나마 나은 것이었다. 그 돈도 부족하여 우리 집 방바닥 윗목은 항상 냉장고였다. 걸레도 얼고 방안에서도 말할 때 마다 식구들의 입김을 보아야 했다. 그러니 그 추위에 요즘같은 세탁기도 없이 빨간 고무장갑 하나 끼시고 빨래를 빨아야 했던 어머니는 얼마나 고생을 하셨을까 죄송할 따름이다. 빨래 줄 위에 마른 동태처럼 얼어버린 빨래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산동네에는 가끔 상수도 관이 얼어붙어서 물도 나오지 않을 때가 많았다. 날씨는 추운데 빨래는커녕 밥 지을 물도 없어서 발만 동동 구르던 어머니들의 모습이 지금도 내 눈에 선하다. 그럴 때면 동네 사람들은돈을 합쳐서 상수도 관을 녹일 수 있는 사람을 동네 차원에서 부르기도 하였다. 두터운 구리 선을 수도꼭지에 묶고 전기 발전기를 한참이나 돌리면 수도꼭지에서 연기도 나고 마침내 물이 터져 나올 때면 동네 아이들도 함께 기쁨의 함성을 지르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수돗물이 나오면 그나마 다행이다. 간혹 가다 상수도 관이 얼어서 동파가 되기라도 하면 그것은 큰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경우 어머니들은 길게는 한 달여 기간 동안 엄동설한에 물난리를 겪어야 했다. 동네에 눈이라도 많이 내리면 비탈지고 계단이 많은 온 산동네가 연탄재의 천국이 된다. 연탄재라도 빨리 깨부수어서 가루를 깔지 않으면 빙판 길이 되어 버려 더 큰 고난을 초래하였다. 아침 저녁 아버님들 누님들의 출퇴근이 고역이 되기 때문이다. 넘어져 다치는 사람도 있고 연탄재 위로 넘어져 옷을 버려 갈아 입으러 집으로 다시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다고 산동네 겨우살이가 아이들에게 늘 고역이지는 않았다. 밤에는 메밀묵이나 찹쌀떡 한 개나 한 조각 얻어먹던 재미도 있고. 어머니 일 갔다 오시면서 사다 주셨던 군고구마 맛도 기가 막혔다. 눈이라도 내리면 온 동네가 거의 아이들 축제의 도가니가 되어 버린다. 눈사람 만드는 재미는 기본이고 산동네에도 더 가난한 사람들은 더 높은 곳에 무허가 판잣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 윗동네 아이들과 눈싸움을 하게 되는 날이라도 오면 추위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진다. 아주 불꽃 튀는 싸움이 마치 전쟁같이 일어나기도 했다. 어떤 아이는 얼음 조각이 든 뭉친 눈덩이에 코를 직방으로 맞아서 코피까지 흘리곤 하였다. 눈싸움 끝에 나누던 무용담은 며칠을 아이들 입에 오르내리곤 했다.
 
그 많은 겨울 재미 중에 내가 오늘 이야기하려던 것은 썰매 이야기다. 어느 날인가 금호동 고개 길에 상수도 관이 동파되어 터져서 얼음 길이 아주 길게 열렸다는 이야기가 행당동 우리 동네에 사는 아이들 가운데 퍼졌다. 그러자 동네 아이들은 썰매를 손아귀에 쥐고 원정을 가게 되었다. 그 때까지 썰매가 없는 아이들은 새로 만드느라고 난리가 나기 시작했다. 나무 판자 적당히 자르고 나무 토막 두 개를 판자 양끝에 못으로 박아 붙이고 그 위에 또 철사를 아주 기술 적으로 홈을 파서 못으로 단단히 조여 놓으면 아주그럴 듯한 썰매가 완성된다. 평평한 호수에서 썰매를 타는 것이 아니라 주로 가파른 고개 길에서 썰매를 타는 산동네 아이들에게는 같은 길이의 두 막대에 대못을 적당히 끼워 넣어 속도를 조절하는데 쓰는 썰매 막대는 필요 없었다.
 
동네 아이들은 저마다 썰매 하나씩 옆에 끼고 금호동 고개 길로 마치 원정 전투하러 갈 때 아직은 초딩이었던 나도 견딜 수 없는 도전을 받았다. 나는 8세부터 다리 무릎이 좋지 않아 학교를 다닌 날보다 아파서 못 간 날이 더 많았다. 이 때문에 하지 못하는 운동도 많았다. 하지만 문제는 무릎을 더 많이 다치고 악화를 자주 시켜야 했다. 물론 집에는 병원에 갈 돈도 없었다. 하지만 그때는 견딜 수 없는 호기심이 나를 가만히 있게 하지 않았다. 썰매 타고 갔다 온 동네 아이들 말만 들어도 흥분이 되었다. 그리고 나만 동네에 혼자 남아 그 경험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어 동네 아는  형한테 아무렇게나 썰매 하나 만들어 달라해서 들고 아이들을 따라 갔다.
 
썰매터는 장관이었다. 수도관이 동파되어 물이 흘러서 금호동 고개 길이 완전히 먹통이 되어 있었다. 물이 터진 부분에는 축대 같은 절벽이 있었는데 얼음이 마치 깊은 동굴의 종유석 같은 거대한 기둥들이 만들어져 있었다. 물은 얼마나 오랫동안 흘러서 얼고 또 그 위에 물이 흐르고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빙판의 두께가 장난이 아니었다. 그리고 고개의 경사도 다소 가팔라 사람들은 연탄재를 깨어 임시방편으로 길을 내고 차와 사람들이 엉금엉금 다녀야 했다. 그리고 절벽 가까운 곳으로 누군가가 썰매 타기 용으로 얼음 길을 확보해 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문제는 나였다. 엄청난 전쟁터를 보면서 나는 보기보다 겁이 많은 아이였다. 아픈 다리 때문에 늘 위축이 되어 살아가는 까닭도 있었겠지만 용기가 대단하고 싸움 잘하고 그런 아이는 아니었 다. 그런데 엄청난 두께의 얼음 기둥과 얼음길을 보면서 나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막상 썰매 하나 옆에 끼고 금호동 고갯길에 친구들과 함께 다다르자 나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나뿐만 아니라 내 또래 아이들도 선뜻 나서는 아이는 많지 않았다. 형들이 한 번 두 번 세 번째 라운드를 돌 때까지 나는 썰매만 만지작거리고 도무지 고개 끝의 썰매 출발선에 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나보다 한 살 어리고 나보다 키도 작은 용석이가 눈썰매를 타고 내려오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내 머리에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 들었다. 그를 이겨야 한다는 경쟁심리 보다는 내가 용석이도 하는 것을 나는 못한다는 말을 들을 것 같은 수치심이 더 컸다. 나는 불같은 용기를 내어 출발 지점으로 이렇게 저렇게 거의 기다시피 해서 올라는 갔다. 하지만 거기서도 두 라운드 정도 타지도 못하고 주저하고 앉아만 있어야 했다.
 
저 밑에서 썰매 타고 내려오라고 손을 휘젓는 형들의 손짓이 하나 둘 뜨기 시작했다. 타야 되나 말아야 되나 나는 내 속에서 침 넘어가는 소리를 무수히 듣고 있었다. 나는 가더라도 썰매 위에 도저히 형들처럼 앉아서 갈 수는 없었다. 가더라도 배를 썰매에 깔고 누워서 가기로 했다. 엄청나게 일어나는 두려움을 목까지 지퍼를 올린 잠바 속에 밀어 넣고 나는 모자를 푹 눌러썼다. 장갑도 다시 단단히 끼었다. 주저하는 배를 썰매 위에 얹고 뒤 다리를 들자마자 썰매는 청룡 열차가 달려가는 듯이 까마득히 먼 아래쪽을 향해 내려꽂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사실 긴 시간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쩌면 찰나 같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소리도 지를 수 없었다. 울음 조차도 그 속도를 따라올 수 없었다. 귀도 먹먹해지고 친구들의 환호와 함성 소리도 아주 멀리 어렴풋이 들렸다.
 
그 순간이었다. 어디에서 오는 소리인지는 모르겠는데 마치 고요한 종소리 같은 소리가 내 깊은 내면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기쁨처럼 요란하지도 않고 설렘처럼 은은하지도 않은 그런 소리가 내 귀 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감격의 순간이었다. 온몸에 일만 볼트 전류가 흘렀던 그 맛, 내가 그 일을 해냈다는 것이 믿을 수가 없었다. 내 인생에서 내가 나를 대견하게 여긴 몇 안되는 사건이었다.
 
지금은 오십 대가 되어 버린 내게 그 때를 생각해 보면 세월이 마치 썰매처럼 무서운 속도로 흘러가고 있음을 느낀다. 조국도 아닌 먼 이국에서 외국어를 쓰면서 외국인과 함께 회의를 하고 외국 학생들을 담당하며 직장 생활하는 것이 많이 힘들고 어렵다. 평신도 선교 일도 버겁기만 한데, 내 아이도 이제 올해부터 입시를 걱정하는 나이가 되었다. 부부 관계도 예년 같지 않다. 몸도 점차 약해지고 여기저기 아프기까지 한다. 아직도 썰매를 타고 달리는 기분이다. 그런데 그 끝이 아직 느껴지지 않는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먼 것 같은 이 오십 대의 기분, 공포의 연속이다. 하지만 금호동 고개 길에서 들었던 그 아름다운 소리가 또 나에게 들려오지 않을까 하는 소망을 늘 가지고 산다. 그 소리가 또 들릴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나는 오늘 또다시 내일을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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