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빛과 그림자 / 하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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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작성일 2019-09-19 09:38 조회 7,486 댓글 0본문
< 수필산책 71 >
빛과 그림자
하연수 / 수필가 (한국문협 인니지부 감사)
오후 두 시에 만나기로 한 인도네시아 다문화 가정 출신 김현아를 만나러 부산역으로 갔다. 역 광장에 곧 눈이라도 내릴 듯 흐렸고 몸을 움츠린 사람들은 바쁜 개미가 되어 공사 중인 광장 좁은 길을 따라 오고 간다. 나는 이 광장에 설 때마다 오른 쪽 길가 건물 5층 PT. GI 부산 사무소가 있었던 곳을 습관적으로 먼저 보고는 한다. 오늘은 건물 유리창들이 여우 둔갑하듯 회색 금속판이 되어 눈을 번뜩인다. 부산 신발 산업이 인건비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릴 때 많은 신발인들이 저 건물 5층 PT. GI 부산 사무소를 통해서 인도네시아로 갔다. 김현아의 아버지도 저 사무소에서 면접을 보고 인도네시아 땅으로 떠났다. 부산신발 산업의 인도네시아 정착, 발전에 빛을 남긴 사람이지만 동시에 그림자도 남겨 두고 떠난 사람이다.
나는 가끔 부산으로 출장 와서 저 사무소에서 신발 기술자들을 면접하고 인도네시아로 가게 했다. 잘된 일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나도 이들이 빛과 어둠을 남기는데 간접적으로 일조를 한 사람임은 사실이다. 젊은날 일자리를 찾아서 인도네시아로 떠났던 사람들 모두가 빛을 남기고 돌아와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사는 모습을 본다면 내가 했던 일에도 보람을 느낄 수 있겠다. 가족들과 떠나 1년 타국 생활을 한다는 것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님을 알고 있는 내가 그 어둠을 남긴 사람들에게 도덕적 잣대를 댈 수도 없다. 우리 부산신발 동료들이 낯선 이국땅에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치며 했던 일들이 많이 있다. 그 중 동료들이 남긴 얼마의 어둠이 더 큰 빛을 모두 가릴 수는 없다는 사실을 지금 나는 김현아에게 해 주려고 한다.
김현아와 약속한 시간이 되어서 역 광장 끝 지하철 입구로 갔다. 땅 위로 큰 입을 열고 있는 지하철 통로 동굴로부터 파리한 얼굴을 한 김현아가 자기보다 커 보이는 가방을 매고 올라왔다. 저 여린 몸으로 부산에서 4년 아르바이트와 유학생활을 어떻게 견디어 냈을까, 그 인내가 안쓰럽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광장 오른 쪽 PT.GI사가 있었던 유리건물 아래 길로 들어섰다. 이곳은 내가 김현아에게 꼭 보여주며 설명을 해주고 싶었던 곳이었다. 부산 신발 기술자로 10여 년을 일했던 김현아 아버지, 부산신발 산업이 무너지며 갑자기 일자리를 잃어야 했던 시절 이야기, 비행기라고는 타본 적이 없었던 김현아 아버지가 처음 여권이라는 것을 받았고, 낯선 땅 두려움을 안고 떠났던 이야기, 이 모두가 이 건물 5층에 있었던 PT.GI 부산 사무소를 통해서였다고 말해 주었다. 6년 전 고등학생 김현아가 그리워했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라서 반가워하리라는 기대를 하며 김현아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김현아는 예상외로 차분하게 건물 위를 두어 번 쳐다보더니 별 할 말이 없다는 듯 시선을 내렸다. 김현아의 얼굴에는 6년 전 고등학교 2학년 그 소녀의 아버지 그리움과 애절함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부산으로 유학 오기 전에는 아버지를 꼭 찾아보겠다는 마음을 품고 있었는데 이곳에 와서 하루하루를 정신없이 바쁘게 살다 보니 어느 날 저절로 머릿속에서 아버지의 존재가 지워지고 없더라고 했다. 6년 전 어느 날 저녁 다문화 가정 돕기 모임에서 고등학생 김현아가 좀 당돌하게 부산 유학에 대해서 내게 문의를 했다. 유학 지식이 없었던 내가 대사관으로, 유학원으로 뛰어 다니며 알아보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그 물음은 부산 유학 공부 자체보다 그리운 아버지를 찾아보려는 마음에서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김현아의 4년 부산 유학은 생활이 아니라 오직 자신과 가족이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문제 그 자체였으리라. 얼마나 힘들었으면 저렇게 생존전사로 변하게 되었을까. 곱고 여리던 한 소녀가 낯선 땅에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생존 인자들이 소녀의 머릿속에 있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모두 지워버렸던 모양이었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대한통운 건물 뒤 길까지 왔다. 좁은 길 건너 커피 집에서 지난 4년간 김현아의 부산 유학 생활을 들었다. 대학 2학년이 되면서 학비는 장학금으로 해결되었지만 자신의 생활비와 인도네시아 가족들에게 보낼 돈까지 모아야 했다. 어머니가 살아있지만 김현아는 가정을 이끌어 가야 하는 가장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김현아는 낮에는 수업을 듣고 오후 5시에서 11시까지 아르바이트를 하고, 다시 자취방으로 돌아와서 장학금을 놓치지 않으려고 자정을 넘겨가며 학교 공부를 했다 한다. 그 길고 힘겨운 인내와 고통의 터널을 지나 대학 졸업시험도 통과했고, 부산 어느 회사에 입사 원서 내고, 취업 면접까지 합격하여 최종 통보를 기다리고 있다 한다. 이 사실만으로도 김현아는 절반의 성공 길에 들어섰음을 알 수 있었다. 나의 진심 어린 축하 말에 김현아는 쑥스러워했다. 이 작고 여린 대학 졸업반 처녀의 생명력은 백마강 겨울 절벽에 끈질기게 붙어사는 고란초의 생명력이다. 김현아의 아버지는 자신이 남겨두고 떠난 딸에게 이런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이라도 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현아는 왜 한국 남자들, 한국에 아내와 아이들이 있던 남자들까지도 인도네시아에 와서 또 다른 살림을 차리는지, 또 자신이 이룬 현지 가정을 왜 끝까지 책임을 지지 않고 떠나버리는 지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 아버지들의 무책임과 부도덕성에 대해서 어떤 대답을 해 주어야 김현아의 앞으로 삶에 도움이 될까? 김현아의 어머니 말처럼 김현아가 아버지에 대한 좋은 기억만을 간직하고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너무 많은 것을 감추면 더 이상 철부지 소녀가 아닌 김현아가 믿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생각을 하다 김현아 아버지를 포함한 이곳에서 어렵게 살았던 신발 인들의 근무 환경 설명만은 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발, 봉제 기업들이 인도네시아로 옮겨올 그 때 까지만 해도 한국은 식민지 시대를 거쳐 동족 간 전쟁에 휘말렸던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나라였다. 변변한 해외투자 안내서, 해외 근무 행동 수칙 같은 것 하나도 없었던 시절에 신발 봉제 등 노동집약 산업 공장들이 인건비 압박으로 갑자기 해외 이전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해외 투자 경영은 치밀한 계획과 준비를 모두 하고 진출해도 정착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럼에도 그저 ‘안 되면 되게 하라’ 라는 원시적 전투구호를 외치면서 밀려나듯 진출했던 부산신발 인도네시아 진출이었다. 정말 몰라서 용감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야말로 해외 공장 관리 경험 없는 부산 신발 기술, 관리자들은 수도 없는 시행착오를 하며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고를 반복하며 자리를 잡아갔다. 가끔 불순분자들이 주동하는 폭동사건으로 공장이 불타고 많은 신발 인들이 다쳤다. 월남참전 용사 박YD계장은 폭동으로 불이 타 버린 공장을 보면서 이런 말을 했다. 이것은 1967년 1월 월맹 군 적진 짜빈박(Tra Bihn Bac )에 걷혀버렸던 해병 3대대 9중대 처지와 비슷하다 했다.
밀림을 밀어내고 공장을 짓고 설비 가져와서 설치하고, 5천명 이상의 현지인들을 모집해서 부서별, 공정 별로 배치하고 몇 마디 배운 말로 복잡한 기술을 가르치고 생산. 수출을 지도 관리해야 했다. 이들의 그 시절 헌신적 노력은 훗날 부산 신발 산업이 인도네시아 땅에서 다시 꽃 피울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이들은 이렇게 빛을 남기고 사라졌던 사람들이다. 나날이 일어나는 사고로 불안했던 이들을 지켜줄 수 있는 곳도, 지친 몸과 마음을 기댈 수 있는 곳도 없었다. 유일하게 나날이 얼굴을 맞대는 인도네시아 여공들의 참한 모습에서 큰 위로를 받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다 이룬 가정들이 다문화 가정이었다. 이 가정을 지금까지 지켜가는 훌륭한 산업 전사들도 많이 있다. 문제는 이 가정을 끝까지 지켜주지 못하고 떠나버린 아버지들이다. 이들은 결손 다문화 가정이라는 용서받지 못할 어둠을 남겨놓고 떠나버린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들이 부산신발 산업의 인도네시아 정착, 발전에 큰 빛을 남겨 놓고 떠난 사람들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차돌만큼이나 단단해 보였던 김현아의 눈은 엘로(Elo)강의 부드러운 화산석이 되어 “아버지”라며 눈물을 보였다.
커피 집을 나오니 흰 눈이 내리고 있었다. 부산역 광장 지하철 입구에 서서 김현아의 두 손을 잡고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떠나기 전 김현아는 결손 다문화 가정 청소년 후원 단체의 목적이 청소년들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자립정신을 길러주는 것이었음을 알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성공적 자립에 밑거름이 되어준 후원단체 CITRA K,T. 한인회, M공부방 등 단체들에게 감사의 말도 잊지 않았다. 김현아의 이 한 마디가 우리 동료들이 빛은 남겼지만, 뜻하지 않게 어둠도 남기고 간 행위들을 이해는 할 수 있다는 말로 들렸다. 이제 버팀목이 없어도 스스로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이 된 김현아를 보내고 나는 한층 가벼워진 마음의 보따리를 들고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천천히 움직이는 KTX 차창 너머로 김현아가 흰 눈이 되어 손을 흔들며 멀리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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