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비등점에 대하여 / 김준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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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작성일 2019-09-26 09:45 조회 5,903 댓글 0본문
< 수필산책 73 >
비등점에 대하여
김준규 / 시인 (한국문협 인니지부 운영위원)
어느 날의 오후, 출출한 뱃속의 신호를 받아들여 라면을 끓여먹자는 발상이 떠올랐다. 달그락 달그락 냄비뚜껑이 들썩거리며 집안의 정적을 깨운다. 아래로부터 후끈하게 열리는 에너지의 출구 사이에 알루미늄 철판은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며 냄비 속에 담긴 물이 비등하는 시점을 기다린다. 물을 가열하면 온도가 올라가다가 어떤 온도(끓는점)에 이르면 더 이상 증가하지 않고, 내부에서 기포가 부글거리며 표면까지 올라와 수증기로 바뀌는 현상이 일어난다.
이러한 현상을 비등이라고 하고 이때의 온도를 끓는점, 비등점(沸騰點 boiling point)이라고 한다. 나의 입맛은 인스턴트 식품의 사탕발림에 순진했던 시절을 잊지 않은걸까? 타인의 간섭이 배제된 혼자만의 자유로운 공간에서 자율신경처럼 작동을 멈추지 않는 자유와 무위의 몰입, 컬러풀한 라면봉지와 수프의 귀퉁이를 가위로 잘라놓고 어린아이처럼 물이 끓어오를 때를 기다린다. 뜨거운 열기에 인내를 포기한 물 조각이 입에 거품을 물고 솟아올라 수증기로 둔갑한 후 급하게 승천을 시도한다.
인스턴트 맛에 통달한 혀끝은 스프향을 이내 감지한 듯 낼름거리고 눈치에 익숙한 뱃속의 소화액은 꼬르륵 거리며 행군을 시작한다. 희열로 반짝이는 눈빛, 현란하게 끌어 오르는 거품에 휘둘리는 먹음직한 면발들, 와! 역시 이 순간만큼은 행복한 순간이다.
환자를 진단하는 의사들 말로는 현대인의 스트레스가 만병의 원인이라고 하지만 문명의 혜택을 포기할 심산이 아니라면 자업자득으로 과잉 생산된 업보의 부메랑을 감당할 수 있을까? 행동반경이 도보의 한계만으로 결정되던 느리고 가난하며 청승맞게 생각되던 옛날에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문명의 언어가 돌연변이처럼 우리 몸에 만병을 지어낸다. 지금 생각하면 아득한 옛날에 짚신 신고 다니던 조상들의 후예, 바퀴로 굴러가는 인력거의 첫 수혜자는 먹이사슬의 맨 앞 쪽에 있던 세도가들의 전유물이 아니었던가, 신분을 들먹거리던 시대의 오만처럼 귀족이라도 된 듯 자동차에 오르면 운전수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길을 달리면서 껄떡대는 걸림돌에게 여지불문하고 불만을 퍼 붓는다. 티비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를 보니 평화롭던 부모와 자식 간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분노를 보고 경악한다. 공생 관계의 남녀는 절벽에서 외줄을 타고 타협에 실패한 어느 한 쪽은 줄을 놓아야 할 때도 있는 것처럼.
냄비 속에서 뜨거운 압력에 들볶이던 물은 어느덧 인내의 한계점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풀어 넘치고 비등점에 도달하고 나면 비로소 잠잠해 진다. 어쩌면 우리의 인간사도 마찬가지다. 라면 물이 끓는 것처럼 부글부글 끓던 분노가 입에 거품을 물고 하늘 높이를 가늠하지 못한 채 스트레스에 피폭된 현대인들은 언제부터인가 분노의 노예가 된다. 무탈하고 평범하던 일상도 길어지면 지루해지고 진력이 난다. 내면에 도사린 새로움에 대한 욕망이 간헐천처럼 꿈틀댄다. 야구 스포츠 경기장도 마찬가지로 물이 펄펄 끓는 냄비와도 같다. 구름처럼 모여드는 관중들, 그에 따른 스트레스를 한방에 때려눕히려는 타자의 방망이가 둥그런 스터디움을 환호성으로 들썩이게 한다. 풀라멩고의 정연한 머리처럼 관중의 시선은 주먹만한 야구공이 날아가는 향방에 혼신을 걸고 담장을 훌쩍 넘기는 홈런볼을 바라보며 환호하고 열광한다. 스스로 설정해놓은 편 가르기는 분노와 희열이 뒤섞이며 그라운드의 열기는 한 순간의 비등점을 확인하려는 눈빛으로 빼곡하다.
융기의 전조인 듯, 풍랑이 일던 바다의 고요는 괜히 불안하다. 빌딩 숲 속에서 모든 음모가 꾸며진다. 허우대가 번듯한 건물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투자 설명회, 소일거리에 목마른 사람들이 샘물을 찾아 꾸역꾸역 모여들고 행사장에서는 천사처럼 부드러운 말씨의 연사가 몇날 며칠 설명에 열을 올린다. 연례행사처럼 터지는 한탕주의는 피아 간에 궁합을 끼워 맞추며 술술 굴러가다 외도의 절벽에서 마차와 함께 최후를 맞이한다. 때를 만난 공중파 티비들은 다투어 벌 떼처럼 윙윙 거린다. 열기가 식어 썰렁한 행사장, 허언증에 걸린 사람들이 걸어놓은 현란한 광고의 흔적이 가시에 긁힌 상처처럼 덩그렁 거린다. 마음을 다친 사람들은 텅 빈 냄비 속을 할 일 없이 배회한다.
사람들을 불귀의 세상으로 인도하는 스트레스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신의에 좌절한 배우 장자연은 말없이 이승을 떠나갔다. 어떤 정치 선동꾼들은 죽은 자의 묘지까지 파헤치는데 주저함이 없다. 존재하지도 않았을 그녀의 유서는 위조되고 변질되어 이익 집단의 도구로 변한다. 무대에 올려진 허영심 많은 또 다른 여인은 앵무새처럼 세상을 종횡무진 날아다니며 단숨에 영웅이 된다. 온갖 먹이를 찾아내는 일에 하이네의 질긴 송곳을 당할 수가 있을런가. 언론들은 끓어 넘친 냄비의 뚜껑을 두들기며 덩달아 춤을 추기에 여념이 없어 보인다.
어떠한 사회도 우리 삶에 평화와 안정을 주는 요소는 찾아보기 힘든 것 같다. 끓는 물처럼 비등점(沸騰點)인 어느 절정에 도달해서야 비로소 분노를 가라앉히는 사람들, 과연 우리의 삶에는 분노를 다스리는 신은 정녕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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