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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할아버지와 가래떡 / 오기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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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작성일 2019-10-17 11:38 조회 7,59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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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산책 76 >
할아버지와 가래떡
 
오기택 / 한국문협 인니지부 회원
 
 
외할아버지한테는 항상 고소한 냄새가 났다. 그 냄새는 참기름의 고소한 냄새이기도 했고, 때로는 갓 뽑은 가래떡의 고소한 냄새이기도 했다. 나는 할아버지의 그 고소한 냄새가 좋았다. 단순히 고소한 냄새여서가 아니었다. 그 냄새를 맡으면 할아버지를 생각하게 되었고, 할아버지의 포근한 온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방앗간을 운영하셨다. 나는 할아버지의 방앗간이 좋았다. 할아버지의 방앗간에 갈 때 마다, 할아버지가 갓지은 떡을 주셨기 때문이다. 인절미, 절편, 시루떡 등 갖가지 떡을 먹을 수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래떡을 정말 좋아했다. 갓 뽑은 가래떡은 정말 맛있었다. 다른 조미료는 필요 없었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가래떡을 후후 불며 먹으면, 세상의 그 어떤 음식보다 맛있다고 느껴졌다. 지금도 가끔 가래떡을 사먹곤 하지만, 할아버지가 해주셨던 그 맛이 나진 않는다. 아마도, 할아버지의 가래떡에는 손자를 사랑하는 마법의 조미료가 들어 있었던 것 같다.
 
 
할아버지는 나를 정말 사랑해주셨다. 외가 이다보니 친가에 비해 갈 기회가 적었지만 외가에 갈 때마다 항상 따뜻하게 맞아주시며 친손자와 외손자의 구분을 두지 않으셨다. 오히려 맏손자였던 나의 기를 살려주시고자 많은 응원과 격려를 해주시곤 하셨다. 그래서일까, 어릴 적 외가댁에 가는 먼 길을 항상 즐겁고 설레는 마음으로 갔었던 거 같다. 외가댁에 도착하면, 밤이건 낮이건 할아버지는 항상 웃으며 나를 반겨주시곤 하셨다. 할아버지는 참 멋쟁이셨다.
외가댁에 갈 때마다 항상 용돈을 두둑하게 주시곤 하셨다. 또 기쁜 일이 있으면 기쁜 이유로, 슬픈 일이 있으면 슬픈 이유로 손 편지를 써주시며 격려해주곤 하셨다. 할아버지께서는 나의 모든 성장과정을 곁에서 지켜봐주셨다. 모든 순간을 응원하고 기뻐해주셨지만, 그 중에서도 군에 임관했을 때 정말로 좋아해 주셨다. 손자가 장교가 되었다는 자부심도 있으셨겠지만 현충원에 잠들어 있는 큰할아버지께 떳떳하게 자랑 할 수 있다는 뿌듯함의 기쁨도 있으셨던 거 같다.
 
할아버지는 때론 거인 같으셨다. 어렸을 적 떡 시루를 ‘번쩍번쩍’ 들어 올리시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할아버지는 한 명의 거인같이 보였다. 그래서였을까? 할아버지는 항상 건강하게 오래오래 내 곁에 있으실 거 같았다. 하지만, 나도 모르던 사이, 세월이 할아버지를 조금씩 약해지게 만들고 있었다. 군 전역 후, 내가 인도네시아로 간다고 했을 때 할아버지께서는 손자의 결심에 방해가 될까, 크게 티를 내진 않으셨으나 많은 걱정을 하셨다. 부쩍 나빠진 건강 때문에 생전 손자를 다시 못 볼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하셨던 거 같다. 나는 그건 단순한 할아버지의 염려정도라고 생각했었다. 지금은 비록 몸이 안 좋으나, 특유의 유쾌함과 강인함으로 쾌유하실 수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로 출국 후 비자문제로 한국에 다시 돌아왔을 때 할아버지는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너무 많이 쇠약해져 있으셨다. 아픈 몸에도 불구하고 손자가 왔다며 환한 미소로 반겨주시며 정말 좋아해주셨다.
 
 
할아버지와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왜 그러지 못 했을까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때 나는 참 바보 같았던 거 같다. 눈앞에 다가올 현실을 알면서도, 애써 부정하려 했던 건 아닐까싶다. 나는 인도네시아 근무지로 가야했고, 출국일정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출국 일정이 다가옴에 따라, 할아버지의 건강상태는 더욱 안 좋아지셨다. 출국일이 다가오니 내 마음은 편치 않았으나 나는 내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했다. 그렇게 쇠약해진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눈에 담고, 나는 다시 인도네시아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10월 첫째 날 저녁, 퇴근 후 확인한 나의 핸드폰에는 집에서 걸려온 부재중 전화 몇 통이 찍혀 있었다. 순간 할아버지와 관련 된 이야기일 거라는 어떤 무언의 예상은 들었지만, 과도한 추측일거라 애써 부정하며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동생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고, 할아버지는 이미 이 세상에 계시지 않았다. 그렇게, 나의 외할아버지는 그 전화 한통으로 나의 세계에서 떠나가 버리셨다.
 
 
이 소식을 처음 들은 순간,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슬픔의 눈물보단 담담한 마음의 고요가 먼저 느껴졌다. 아마도 내가 마주하기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슬픔이었기에 그랬던 거 같다. 소식을 듣고 한국행 표를 알아봤으나, 곧 나는 그 수고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일정상 아무리 빨리 간다고 하여도, 할아버지의 발인조차 볼 수 없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오히려 마음이 더 담담해졌다. 슬퍼할 수 없던 슬픔이기에, 슬픔을 슬퍼하기보단 관조 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담담할 수 있다는 것에, 나조차도 놀랐으며. 어찌할 수 없다는 무기력함에 나의 모든 감정들이 짓눌려져 버렸다. 할아버지는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가족을 배려 해주신 거 같다. 9월 마지막 날, 할아버지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가족들의 축하를 받으며, 할아버지는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사람의 죽음은 함부로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지만 어쩌면 할아버지는 가족들의 어려움을 덜어주고자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죽음과 싸우며 그 기일을 늘려 가셨던 거 같다.
 
나의 선택으로 시작하게 된 타지에서의 생활이지만, 가족과 일상을 함께 공유 할 수 없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번 일로 깨닫게 되었다. 앞으로 타지 생활이 길어질수록, 이런 일들은 필연적으로 많아 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때마다, 내 자신을 잘 추스르며 앞으로 나아 갈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이번 일을 통해, ‘타지에서의 삶’에 대한 진정한 의미와 그 양면성을 아픔으로 느낄 수 있었다. 모든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앞으로 살아가며, 내가 그 책임들을 오롯이 견딜 수 있도록 더 강해지길 기도해본다. 할아버지의 마지막을 함께 하지 못 했다는 죄송함과 아쉬운 마음에 혹여 꿈에서라도 뵙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하지만. 할아버지께서 하늘나라에서 바쁘신 걸까? 돌아가신 후 아직까지 나의 꿈에서 뵌 적이 없다. 아니 어쩌면, 타지 생활하는 손자의 마음이 뒤숭숭해질까, 걱정되어 만나고 싶어도 참으시고 계시는 중 인지도 모르겠다. 평소의 배려심 많으신 할아버지의 성품 때문에 참고 계시는 거라고 생각되지만, 그래도 꿈에서나마 한 번 뵙고 싶다.
 
인도네시아의 어제는 오늘과 같고, 오늘은 내일과 같다. 날씨 변화가 크지 않은 탓에, 시간에 대한 감각이 조금은 둔해지는 것 같다. 매일이 같을 거 같은 하루, 오늘따라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가래떡이 먹고 싶다. 다른 조미료도 필요 없던, 할아버지가 해주셨던 가래떡을 입으로 호호 불며 먹고 싶다. 그 모락모락 날아오르는 따뜻한 공기에라도 하늘에 계신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전하고 싶다. “할아버지,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하늘에서는 힘든 일 그만하시고, 항상 건강하게 행복하셨으면 좋겠어요. 제 할아버지로 계셔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사랑해요, 할아버지’ ‘가래떡,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가래떡이 너무 그리운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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