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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믿을 신(信)에 대하여 / 김준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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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작성일 2020-02-13 11:30 조회 6,63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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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93>
 
믿을 신(信)에 대하여
 
김준규 / 시인 (한국문협 인니지부 운영위원)
 
한자에서 믿을 신(信)자를 자세히 살펴보면 사람 인 변에 말씀 언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작은 글자 하나에서 보여주듯 사람과 사람사이를 연결시키는 도구는 언어로부터 시작되고 입에서 나온 말은 내가 아닌 상대방의 나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는 잣대가 되기도 하고 자신의 신용을 타인에게 담보하기도 한다.
 
목에 힘을 주며 열변을 토하는 사람일수록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신의 상식과 기준을 전제로 믿음을 강조하는 내용에 비중을 두고 있다. 그러나 듣는 사람이 상대가 제시한 믿음의 허와 실을 판단하고 수용여부를 고민하는 것은 개인의 이해득실과 연관되어 있고 거꾸로 내가 화자가 되었을 때 상대의 동의를 얻어내는 길잡이로 삼기도 한다. 믿음이 결여된 조직이 제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모래성처럼 무너지는 일이 일상처럼 일어나고 있다. 믿음이 사람들 간에 협업관계를 유지 발전시키는데 근간이 되고 경제규모가 비대해지는 근대사회는 더욱 복잡하고 난해한 신용의 도구로 변모해 간다.
 

인간본성 중에 잠재한 이기주의는 언제부터인가 믿음이라는 용어가 나를 떠나 타인으로부터 동조를 강요받는 이분법적 수단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상품을 팔아야 하는 기업은 과장광고 등의 수단으로 소비자들의 구매 욕구를 부추기고, 정치를 하는 국회의원이나 대통령 후보는 검증되지 않은 선심공약으로 청중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기도 한다. 국가적 이익을 도모하는 발상이라면 적어도 수년간에 걸친 전문가들의 면밀한 연구와 분석이 따라야하고 공청회 등을 통하여 대다수 국민이 인지할 수 있는 합의가 도출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이기주의에 기초한 그들의 임시방편적 사고는 허황한 공약을 떠벌리는데 공을 들이며 아니면 말고 식으로 믿음의 가치관을 훼손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인간사회는 천재지변 등 자연의 불가항력적인 모순 속에서 발전하여왔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확실성의 환경은 서로 믿으며 의지하려는 순종적 본성이 생겨났을 터이고 그러한 바탕은 지구상에 수많은 종교의 탄생을 이끄는 계기가 되기도 했으리라. 그러나 믿음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종교가 갖는 또 다른 모습의 폐해 역시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아니겠는가.
 
오늘 날의 종교는 단순히 신자들의 숫자를 늘리며 전통적인 교세 확충에 만족하지 않는 것 같다. 물질의 단맛에 세뇌된 종교인들은 기업처럼 초대형화에 몰두하거나 화려한 행사 등으로 군중몰이를 하는가 하면 일부 교회에서는 성서의 교리를 교묘하게 해석하여 신비주의를 부추기고 헌금강요 등의 수단으로 삼아 종교의 본질을 흐리게 한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사회 문제로 대두되는 권력화 된 성직자의 부정세습과 비리는 종교를 혼탁하게 하는 주된 원인이 되고 있다. 교리를 왜곡하여 교주를 신성시하는 이단적 종파가 크게 번성하는 것도 잘못된 믿음의 병리현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현대사회가 빠른 속도로 발전할 수 있었던 계기는 법률적 구속력 이전에 신용이라는 도덕적 기준으로 사회구조가 세분화되면서 이를 지켜나가기 위한 집단의 노력이 따라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과 사람관계를 형성하는 첫 번째 요건인 믿음으로 사랑과 우정이 싹트고 이웃과의 공동체를 이루며 시장경제는 성장하게 된다. 반면 그러한 믿음을 악용하여 부당하게 이익을 획책하려는 사회일각의 부작용도 종종 발생한다. 상대에 대한 믿음을 신중하게 다루지 않으면 집나간 자식처럼 불안전하여 타인에 의한 그릇된 욕망의 표적이 될 수도 있다. 이는 언젠가 나에게 회복불가한 손해로 돌아올 수도 있을 것이다. 믿음이라는 유약한 인간 본성을 건드리며 은근히 접근하는 사람의 속내를 조심해야 하는 이유이다. 부드럽고 고운 말 솜씨로 요술을 부리는 사기꾼들의 속임수를 감당하기란 그리 쉽지 않기 때문이다.
 
티비 드라마 에서도 흔히 볼 수 있듯이 누구나 일생에 한 두 번은 믿음의 덧으로 인하여 큰 손해를 보거나 불행의 빚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예상 외로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가톨릭 성서에서는 예수에 대한 믿음을 의심하는 제자에게 "묻지 않고 믿는 자는 행복하다" 라고 가르치고 있다. 현대사회가 지향하는 신용사회의 기반과도 같은 맥락일 수 있다. 은행에 돈을 맡기면 제일 안전하다고 믿는 사람들은 많지만 은행이 부도라도 나면 돈을 떼일 수도 있다고 고민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수년전 저축은행의 도산으로 사회전반에 엄청난 혼란이 있었다. 우리가 철저히 믿고 싶어 하는 은행도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반증 하는 셈이다. 신용으로 층층이 쌓아올린 벽돌의 일부가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이탈하였을 때는 사회전체가 도미노처럼 무너지는 참사를 상기시키는 사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탑을 지탱하는 일부의 벽돌(믿음)이 깨지는 부작용이 발생하더라도 이는 우리사회가 떠안고 가야하는 필요악이 아니겠는가. 끊임없이 서로를 믿으려고 노력하고 개인에게 주어진 신용을 지키는 일은 인간성을 회복하는 첫걸음이며 선진사회 진입의 필연적 관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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