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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3.1운동이 맺어준 선린 관계 /우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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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작성일 2020-03-04 14:08 조회 7,20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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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산책 96>  3.1절 특집
 
3.1운동이 맺어준 선린 관계
 
우병기 / 소설가 (한국문협 인니지부 회원)
 
 
당신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국가적인 사건이  무엇입니까? 라고 누군가 나에게 질문을 한다면 나는주저 없이 1997년 11월 발생한 IMF 외환위기라고 말할 것이다. 통계에 의하면 30대 연령 이상 대한민국 국민의 절반 이상이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 IMF 외환위기는 당시를 살아가던 모든 국민들 삶에 어떤 식으로든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정부는 낙관적인 중상주의 정책들을 쏟아 내었으며, 기업들은 정부에서 아낌없이 지원해주는 금융 자양분으로 경쟁자 없는 좁은 내수시장에서 승승장구 하였다. 하지만, 장미 빛 밝은 미래만 있을 것 같은 기대와는 달리 국가부도라는 최악의 날에 직면한 것이다.
 
나라의 경제주권을 한순간에 잃어버린 국가적인 사건은 내게도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당시 경영학과 2학년생 이었던 나는 4학년 선배들 대부분이 졸업과 동시에 실업자로 전락하고, 운 좋게 취직 한 선배마저도 입사 취소 통보를 받는 상황을 눈으로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그때 느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신문사에서는 한국의 베이비부머 세대 이후 가장 많은 인구를 형성한 90년도 학번 세대는 ‘저주받은 학번’이라는 사설을 통해 슬픈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청춘들을 위로하기도 하였다. 나라에서 놓아버린 경제주권을 다시 찾기 위해서 당시 모든 국민들은 스스로 무엇인가를 해야만 했다. 그것이 국민 전체적인 행동으로 표출된 것이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금모으기 운동이었다. 금모으기 운동 결과에 대한 평가는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갑론을박을 하고 있지만, IMF 지원 금융자금을 조기상환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고, 온 국민의 단합된 구국의 힘을 전 세계에 보여준 운동이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IMF 외환위기 이후, 나는 우리나라의 어려운 경제상황 속에서 스스로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기회를 찾을 수 있는 길은 해외취업 이라고 생각했다.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해외취업을 준비한 덕분에 운 좋게도 2000년 대학 졸업과 동시에 첫 직장 생활을 인도네시아에서 시작할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는 우리나라와 마찬 가지로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겪은 나라이기 때문에 구제 금융 속에서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많이 어수선한 상태였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느낀 상실감 또한 우리와 큰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민주화 운동으로 이루어낸 정치 안정화는 경제 구조조정을 통한 경제성장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대통령의 집권기간(2004년~2014년)을 거쳐 조꼬 위도도 대통령(2014년~현재)으로 이어지는 평화적인 정권교체는 성숙한 민주주의의가 인도네시아에 뿌리를 내렸다는 것을 입증하였으며, 정치적으로 안정된 민주주의 속에서 인도네시아 경제는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세계 17위의 경제규모를 가진 G20개국의 일원으로 성장하였다. 2018년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안게임을 성공적으로 개최하여 국가 브랜드 이미지도 한층 높였다. 2020년 현재의 인도네시아는 명실공이 동남아시아를 대표하는 국가라고 자부할 수 있을 것이다.
 
1960년대 후반 코린도 및 남방개발 등, 초기 한인기업들의 인도네시아 진출과 동시에 재인도네시아 한인사회 역사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많은 교민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재인도네시아 한인사회 역사는 올해로 100주년을 넘었다. 인도네시아에서 20년째 살고 있는 교민의 한 사람인 내게도 인도네시아의 한인 이주역사가 100년이나 되었다는 것은 다소 생소한 정보이다.
 
재 인도네시아 한인사 연구자인 김문환 선생의 자료에 의하면, 인도네시아 한인사회의 출발점은 장윤원 선생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는 1919년 당시 은행에 근무하면서 은행 돈의 일부를 3.1운동자금으로 빼돌렸다가 일본경찰에 적발되자, 임시정부가 있던 중국으로 탈출하였고, 얼마 후 독립자금을 마련하라는 상해 임시정부의 명령에 의해 1920년 9월에 바따비아(Batativa, 자카르타의 옛이름)에 도착하였다. 장윤원 선생은 일본의 패망을 인도네시아에서 맞이하였다. 그리고 바따비아에 설립되어진 재 자바조선인민회(인도네시아 최초의 한인단체)와 고려독립청년당(연합군 포로감시원으로 강제 동원된 청년들을 중심으로 인도네시아에서 일제에 무력 항거한 단체-이상문 선생 등 2008년 12명이 독립유공자로 서훈됨)을 후원했고, 일본 군속으로 왔던 징용자, 포로감시원, 위안부 등 해방을 맞이한 조선인들의 귀국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고 한다.
 
 (한인 진출 1호 장윤원 선생 가족)
 
100년 전 어려운 대한제국의 위기상황 속에서 인도네시아로 독립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혈혈단신으로 인도네시아로 건너온 장윤원 선생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100년 전 나라를 잃은 우리 선조들의 상황과 내가 겪은 IMF 외환위기 시대의 상황은 많이 다를 수 있겠지만,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일반 국민의 입장에서 느끼는 위기감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당시 대한제국의 상징은 고종황제이었을 것이다. 나라를 빼앗겼다고는 하지만, 아직 나라의 상징인 고종황제가 살아 있었고, 비록 일제의 무력통치가 극에 달해 있던 시기였지만 많은 국내외 단체들이 여러가지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국민들 마음에는 언젠가 반드시 나라를 되찾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라의 상징인 고종황제가 서거하면서 모든 희망이 한순간에 무너졌을 것이다. 나라가 없어졌으니, 백성들 스스로 무엇인가를 해야만 하는 절박한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각자 스스로 상실감을 만회하기 위해서, 누군가는 태극기를 그렸고,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배포하였다. 누군가는 거리로 나와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고 목청 높여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을 것이다.
 
그리고 장윤원 선생처럼 나라 잃은 슬픔을 한탄하면서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서 나라를 떠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나라를 한순간에 잃은 위기의식은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퍼져 나갔을 것이고, 모든 백성들이 스스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을 것이다. 온 국민이 참여한 100년 전 독립만세운동은 스스로 운명을 책임지고자 하는 자주정신 의지를 전 세계에 알렸으며, 통합된 임시정부라는 구체적인 결과물을 만들어 내었다. 우리는 이 운동을 3.1운동이라고 부른다. 3.1운동은 중국의 5.4운동과 인도의 비폭력운동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동남아시아 및 중동 지역의 독립을 갈망하는 많은 나라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인도네시아도 네덜란드로부터 독립을 하고자 많은 국민들이 애를 쓰고 있던 시기였으므로 3.1운동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2018년 해외홍보문화원에서 전 세계 여러 나라들을 상대로 조사 발표한 대한민국 국가 이미지 자료에 의하면, 한국에 대한 호감도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는 인도네시아이며, 호감도는 무려 96.4%라고 하였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한국을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지 요즘 젊은이들 좋아하는 K-드라마와, K-POP 때문일까? 나는 그 이유만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통적인 농경사회를 바탕으로 건국된 인도네시아는 가족과 마을을 중심으로 구성된 생활양식을 가지고 있다. 과거 우리나라 사람들의 생활양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에 두레와 품앗이 같은 상부상조 전통이 있다고 하면 인도네시아에는 고똥 로용(Gotong:어깨에 지다. Royoung:함께) 이라는 관습이 있다. 상부상조를 중시하는 공동체 생활은 공동체가 위기에 처하면 구성원 스스로가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자주적인 태도를 취한다. 이러한 방식은 우리가 이루어낸 3.1운동 정신과 아주 비슷하다. 인도네시아인 들은 그들과 닮은 공동체 생활양식을 가진 한국의 문화와 자주정신에 거부감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면에서는 동질감을 가진다. 그래서 한국 문화의 발전에 열광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국 이기주의가 득세하고, 불확실성이 높아지고 있는 국제환경 속에서 동남아시아를 대표하는 인도네시아 국민들이 한국에 대한 호감을 가지고 응원을 해주는 것에 감사한다. 100년 전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한인 1호 장윤원 선생이 지금의 우호적인 양국관계와 발전상을 보신다면 매우 기뻐하시지 않을까. 인도네시아의 역사를 보면, 그들의 극난극복 역사가 우리와 사뭇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국가의 위기가 오면 국민 스스로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아는 나라이다.
 
자주정신을 바탕으로 여러 민족이 협력하여 세운 인구 2억7천만 명의 나라가 지금의 인도네시아이다. 3.1운동이 인도네시아의 독립운동과 건국에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하니 인도네시아에서 살아가고 있는 교민의 한사람으로서 감개무량하다.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희망찬 나라를 만들고 있는 한국과 인도네시아 두 나라 간의 발전적인 선린관계가 앞으로도 지속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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