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초원의 여백 / 김준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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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작성일 2020-05-21 16:32 조회 8,477 댓글 0본문
< 수필산책 107 >
초원의 여백
김준규 / 시인 (한국문협 인니지부 운영위원)
몽골하면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 중에 혈통에 관련된 우리 민족과의 유관설이다. 동북아의 다른 인종과 모습을 비교하더라도 일본이나 중국인의 골격보다도 몽골인의 모습에서 친근감에 기인한 남다른 유사성을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둥글 넙죽한 얼굴과 약간 뭉툭한 코에 작은 눈, 볼그스름하게 솟은 광대뼈까지, 과학적 근거에 기초한 DNA조사에서도 이미 다른 어느 민족보다도 유사성이 깊다는 결론을 내린바 있다. 한때는 세계지도를 새로 그리며 천하를 호령하던 칭기즈칸의 나라, 몽골이 역사에 남긴 흔적과 그 업적은 과연 무엇일까? 몽골에는 한 나라의 흥망 성쇄와 문화를 상징하는 변변한 건축물도 없다. 마차 하나에 모든 생활 도구를 싣고 삶의 터전을 찾아 황막한 초원을 이동하며 문명을 등진 채 살아가는 유목민의 모습은 수 천 년이 지난 오늘 날에도 크게 변하지 않고 있다.
이토록 척박한 환경에서도 한때는 황하 문명의 발상지인 중국은 물론 유라시아 대륙을 지배한 그들의 원동력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세계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그들에 대한 의문은 지금도 많은 세계인이 궁금해 하는 수수께끼 중의 하나로 남아 있다. 어떤 역사가들은 이러한 의문을 그들의 척박한 초원에서 찾고 있다. 사막과 초원에서 말과 양떼를 방목하며 익힌 병사들의 마상전투 기술의 민첩성과 드넓은 초원에서 대량 생산이 가능했던 조랑말 (짧은다리)의 지치지 않는 지구력을 특징으로 꼽고 있다. 몽고말의 작은 키는 먼 거리 작전에서 서양 말과 비교될 수 없을 만큼 유리하다는 결론이 이미 여러 실험에서 밝혀 진 바 있다. 신식 무기가 등장하기 이전 칼과 말이 전부이던 시절 백병전에서 번개처럼 치고 빠지는 몽골 병사의 민첩성에 서양의 미련스럽게 우둔한 갑옷의 전사들은 여지없이 바람 앞의 촛불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때 세상을 지배하며 수많은 격전지에서 용맹한 군사들이 얻었을 전리품은 다 어디다 숨겨 놓았을까? 그리고 그들의 후손들은 얼마나 많은 부와 영광을 물려받은 것일까?
아이러니 한 것은 그들에겐 찬란한 역사의 흔적도 고귀한 문명의 유물도 발견된 것이 별로 없으며 근대 경제 부흥의 흔적도 찾아보기 힘들다고 한다. 그들은 아직도 황막한 언덕의 초원에서 양 떼와 말을 기르고, 사람이 죽으면 독수리에게 시신을 바치며 게르를 짓고 사는 마을에는 물질문명과 야합하지 않는 기름때 젖은 민초들이 살고 있을 뿐이다. 소련 치하의 냉전 시대 이룩한 울란바토르의 칙칙한 도시풍경은 우리나라의 70년대를 보는듯 하다. 나는 몽골 초원의 투어를 시작하기로 한 전날 울란바토르의 호텔에 짐을 풀고 경내를 돌아보던 중 복도에 걸린 특이한 수채화 하나를 보게 되었다 사방 1미터 크기의 액자 화폭엔 온통 연한 녹두 색으로 가득하고 맨 아래 끝 부분에 하얀 점들이 몇 개 띄엄띄엄 찍혀 있었다. ‘여백’ 이라는 제목의 그림이었다. 어느 화가의 천재적 추리력을 알량한 나의 상식으로 유추할 여지도 없이 의문의 부호를 남기는 그림이었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의 외곽을 달리다 보면 너울처럼 굽이치는 완만한 둔덕을 뒤로하고 다시 이어지는 초원의 끝에 하늘이 맞닿아 있다. 흰 구름 사이로 푸른 허공이 길쭉하게 가로 지르고 시선의 이동에 따라 수시로 형상을 바꾸는 회색 빛 조개구름, 원근의 법칙을 아랑곳 한 듯 광막한 언덕에 누각처럼 펼쳐지는 신기루! 인간의 작은 눈으로 이 넓은 광야를 어찌 다 볼 수 있으리, 햇빛에 뒤틀리며 물결처럼 고물고물 움직이는 하얀 양 떼, 온 천지는 녹두 빛으로 가득하고 지평선을 달음질하다 하늘이 맞닿은 녹색의 줄기아래 게르(유목민의집)의 동그란 점들이 이마를 맞대고 있어 그곳엔 얕은 시냇물이 흐르고 유순한 사람이 모여 사는 마을임을 짐작케 한다. 구름을 잡는 높은 산과 수풀이 없어 대지는 늘 목마르고 풀을 뜯는 양떼는 바늘처럼 가늘고 낮은 풀잎을 찾아 종일토록 언덕을 오르고 내린다. 헤아릴 수 없는 수효의 언덕을 넘고 수심 낮은 개울을 몇 번 건너고 조약돌이 반짝이는 들판을 지나면 다시 길을 막는 언덕이 있다. 숨 막히는 대 초원의 광막함에 지친 몽고의 샤먼들은 일찍이 광야의 군데군데에 돌무덤을 쌓고 헝겊으로 만든 오색의 깃발을 달아 바람의 손짓에 순응하며 생존을 위해 치성을 드렸을 것이다.
아! 몽골의 파란 만장한 역사는 어느 순간 초원에서 부는 은근한 바람 속에 묻혀 사라진 걸까? 칭기즈칸은 죽기 전 내 무덤의 위치를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했고, 장례식에 참여한 병사는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또 다른 군사에 의해 몇 번의 죽임을 당하는 참혹한 전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몽골의 역사는 철저히 비밀을 간직 한 채 초원 어딘가에 묻혀 깊이 잠들어 있을 것이다. 처음 호텔 복도에서 목격한 한 폭의 수채화처럼 몽골의 비밀을 영원히 녹두 색의 여백으로 남겨두고 싶은 어느 화가의 욕망처럼.
몽골의 꿈 / 김준규
몽골의 꿈 / 김준규
마른 고기 씹으며
말 위에서 잠을 자던
용맹한 병사의 칼끝은 녹이 슬고
질풍 같던 조랑말은
초원에 마른 똥만 남기었다
피 바람이 일던 시간의 소용돌이
광란의 굿판이여!
별빛 찬연한 고비 사막 깊은 곳에
고요히 잠들었나
알 수 없는 초원 어디선가
칭기즈칸의 무덤을 지키는
초혼의 피리 소리
영웅들의 혼을 태우던
샤먼들의 돌무덤에
영욕의 시간을 걸어놓은
오색 깃발
광막한 초원에서
겨우 살아남은 것은
한줌 바람 이었나
말 위에서 잠을 자던
용맹한 병사의 칼끝은 녹이 슬고
질풍 같던 조랑말은
초원에 마른 똥만 남기었다
피 바람이 일던 시간의 소용돌이
광란의 굿판이여!
별빛 찬연한 고비 사막 깊은 곳에
고요히 잠들었나
알 수 없는 초원 어디선가
칭기즈칸의 무덤을 지키는
초혼의 피리 소리
영웅들의 혼을 태우던
샤먼들의 돌무덤에
영욕의 시간을 걸어놓은
오색 깃발
광막한 초원에서
겨우 살아남은 것은
한줌 바람 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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