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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해당화 열매 /하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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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작성일 2020-07-02 21:59 조회 13,91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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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산책 113 >
 
해당화 열매
 
하연수 / 수필가 (한국문협 인니지부 감사)
 
 
뜬 눈으로 밤을 새우며 등대마을 고모님 영전에 올리는 편지를 썼다. “떠나시는 고모님 마지막 길에 꽃 한 송이 뿌려 드릴 수도 없네요. 몸은 멀리 있어도 마음만은 구만 리를 날아 바다, 소나무, 그리고 해당화가 있는 등대마을로 갑니다.” 나의 이 미안함은 오랫동안 내 가슴 속 어느 구석에 회한의 멍울로 남아있을 것 같았다. 아무리 바빠도 등대마을 언덕배기 해당화가 지기 전에 고모님께 인사드리러 가겠다고, 이렇게 내 마음은 무거울 때 볕이라도 있다면 좋으련만, 지금 이 땅은 하루도 빠짐없이 습하고 차갑고 침침했다. 등대마을 언덕배기 해당화 꽃 피어있을 여름은 다 보내버리고 가을이 깊어 갈 때서야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다.
 
내 조국 땅 온 산천은 가을로 물들어가는 중이었고 동경주로 넘어가는 추령 산마루턱 높은 나무 가지마다 가을로 가득했다. 꼬불꼬불 내려가는 길 위 비탈에도, 아래 비탈에도 가을햇살은 붉은 단풍나무 잎들 사이 공간으로, 검붉은 옻나무 잎들 아래 공간 사이로 투명한 볕의 그림자 무늬를 그리며 돌아 다녔다. 추령 산마루 길을 거북이걸음으로 내려 온 버스가 멀리 소나무 숲 너머로 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들어서자 소금기를 품은 바다 바람이 내 코끝에 와 닿는다.
 
 
철 지난 참외 밭이 지난 여름 포식으로 부른 배를 내놓고 길게 누워 있다. 참외 값을 서로 내겠다고 팔을 잡고 뿌리치는 작은 소동을 보여주는 어머님과 고모님 모습도 보인다. 내 나이보다 젊은 시절 두 여인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오래된 영화 속으로 나는 빠져 들어간다. 내 머리 속 기억의 파편들이 빠르게 이합집산을 하다가 31번 국도로 가서 다시 모아진다. 바다를 끼고 달리는 해안도로를 달리는 버스가 나타났다. 등대마을 장손의 대를 이어 줄 아들이 없는 며느리의 절박한 심정으로 이 길을 오고 가는 바쁜 고모님의 모습이 보인다. 용하다는 점집을 찾아 갈 때도 이 길을 오고 갔고, 월산 깊은 계곡 절에 백일기도하러 갈 때도 이 길을 오고 갔다. 대를 이을 사내아이 낳는 일이 여자의 일생 전부인 것처럼 그 목적 하나에 몰입해야 하는 모습이 시청자를 안타깝게 한다. 그런 치열한 기도와 염원에도 신은 전혀 반응을 해 주지 않았다. 중년 여인이 되어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기도를 드리고 돌아오는 길에서 고모님의 삶을 크게 바꾸어주는 인연을 만나게 되었다.
 
가을 햇살이 따가운 경주역 앞 성동시장 길가 생선장수 여인의 등에 붙어있는 세 살 정도 아이를 보는 순간 온 몸에 전기가 흐르는 듯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생선을 가득 담은 갈색 고무 대야 앞에 앉아 있는 그 여인은 용기가 없는지 오고 가는 사람들의 눈도 쳐다보지 못하고 있더라고 했다. 고모님은 자신도 모르게, 무엇에 끌리듯 그 생선장수 여인에게로 가서 생선 사라는 말 한마디 없이 그렇게 앉아만 있다가는 생선 하나도 팔지 못 할 것이고, 그렇게 팔지도 못할 생선을 놓고 이 따가운 곳에 무엇 하러 나와 있느냐, 생물인 생선도 모두 버려야 할 것이라고 나무랐다고 했다. 그리고 시장 안 생선가게 남자를 불러 본전보다 훨씬 낮은 가격으로 여인의 생선 모두 넘겨버린 후 여인과 아이를 데리고 시장 안 돼지국밥집으로 갔다고 했다. 국밥집 평상에서 초상집 강아지같이 흙먼지로 더러워져있는 아이의 머리를 털어주다 눈을 마주치는 순간 갑자기 숨쉬기 힘들 정도로 가슴이 쿵쾅 거리더라 했다.
 
자식 농사 한 번 잘해 보고 싶어도 하늘이 고모님에게는 그 기회를 주지 않아서 가슴에 피멍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고모님이었다. ‘팔자에 없는 아이 그만 찾아다니고 이미 태어나 돌보지 않는 이 아이 허기나 채워 주는 사람이 되라’는 소리가 들려오더라는 것이었다. 고운 장미꽃 망울이었던 고모님이 등대마을 장손 집 맏며느리로 시집가더니 그만 해당화가 되어버렸다고 어머님께서 늘 걱정하셨다. 큰 자식이 되든지 작은 자식이 되든지 우선 문중 대를 이을 아들 하나라도 얻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아이 얻으려고 저렇게 고생한다고 안타까워했다. 고모님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바로 하고 그렇게 하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을 했는데 고모님은 그것을 신과 한 약속이라 했다. 당신의 가족 외에는 한 번도 남을 위한 기도를 해 본 적 없었던 고모님이 평생 처음으로 남을 위한 기도를 올렸다고 했다. 그동안 삶에서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을 보았고, 고모님 당신 삶도 다시 시작되었다고 말씀하셨다.
 
 
그 생선장수 여인의 아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신과의 약속 의무가 끝이 났는데도 고모님은 마지막으로 이 아이에게 직업학교를 찾아 준 후 지원을 마치고 싶어했다. 고모님은 사람의 인정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렇다며 이 일 하나만 심부름해 달라고 나에게 부탁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그 소년이 갈 만한 직업학교를 수소문해서 찾아냈다. 그해 2월 소년과 함께 대구 근처 직업훈련교육원으로 갔다. 주변에 아무 건물도 보이지 않는 외진 곳 넓은 터에 큰 직업훈련교육원 건물이 보였다. ‘자 이제 들어가자. 절대 돌아보지 말고 가야 한다.’는 내 말에 소년은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교육원 본관 건물을 향해 소년의 등을 밀어 보냈다. 건물 입구까지 잘 걸어가던 소년이 문 앞에서 멈춰 서자 내 심장이 벌컥 벌컥 뛰었다. 잠시 멈춰 서있던 소년이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건물 안으로 사라져갔다. 5초 정도 서 있었겠지만, 내 평생 그렇게 긴 5초는 없었다.
 
긴 숨을 쉬며 회상에서 깨어나니 버스는 푸른 바다를 끼고 달리고 있었고 멀리 하얀 등대가 보였다. 버스가 다시 숲길로 들어갔다 돌아 나오니 찻길 아래로 등대마을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버스에서 내려 마을을 지나 등대 오른쪽 길을 따라갔다. 언덕 아래 고모님 가족 사업이었던 돌미역, 김 포자 양식 시설들은 보이지 않고 그 주변 언덕배기에 해당화 가시나무들이 빨간 열매들을 동글동글 달고 있었다. 푸르든 회색이든 바다는 그저 언제나 같은 바다라고 빨간 해당화 열매는 내게 말하는 것 같다. 신의 부름을 받고 떠나신 고모님은 가을 바다 언덕배기에 빨간 해당화 열매가 되었을까. 오늘따라 그 해당화가 고모님의 묵시인 양 경건하게 가슴에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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