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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빨리빨리’에 대한 고찰 /김준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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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작성일 2020-09-10 18:16 조회 9,48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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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산책 123>
 
‘빨리빨리’에 대한 고찰
 
김준규 / 시인 (한국문협 인니지부 운영위원)


서양 식당에 가보면 어리 둥절 할 때가 있다. 한 끼 식사를 위해서 하얀 식탁보 위에 수북이 쌓인 포크와 나이프, 스푼 등은 다 어디에 쓰이는지 헷갈린다. 수저와 젓가락 하나면 해결되는 우리의 식사 문화와는 사뭇 대조적이다. 식사를 빨리하기로 말하면 우리나라 사람을 빼 놓을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단일민족이면서도 끊임없는 전쟁을 겪으며 외세의 잦은 침략에 의한 조공과 양반 계급이 자행하는 수탈의 역사 속에서 일반 백성들은 계속되는 궁핍과 배고픔을 겪으며 살아왔다. 서양의 식사 문화가 긴 시간 대화와 품위가 깃든 문화라면 배고픔에 시달린 우리의 식사 문화는 단시간 내 공복을 채우는데 익숙해 있다. 이러한 사회 환경은 음식을 빨리 먹는 문화로 자연스럽게 발전했을 확률이 크다.
 
강아지가 먹이에 집중할 때는 누구도 접근을 허락지 않는다. 동물들의 생존을 위한 우선순위는 먹이 활동이다. 선점을  위한 자위적 반응은 필연이 아닐까? 우리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한다. 속담의 어원이 먹고 사는 문제와 직간접으로 관련이 있다는 생각도 지울 수 없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난과 배고픔 앞에 인정사정 볼 것 없는 것은 비단 동물의 본능뿐이겠는가. 사람에게도 이러한 현상은 가능한 일이다.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위한 일이라면 체면이나 양심 따윈 불문율에 속한다.
 
 
선진국과 후진국 관료들의 부패정도를 비교하면 확연히 알 수 있다. 사촌이 땅을 사면 경쟁에서 2등으로 밀리는데 대한 불안감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남들보다 더 부지런히 뛰어왔는지 모른다. 또한 간절하고 절실한 생존의 욕구가 우리 사회의 경쟁력을 키우는데 일정부분 한몫 했으리란 긍정적 자부심도 부인할 수 없다. 가난과 빈곤의 문제가 배고픔 하나로 그치겠는가?
 
선진국이 이룩한 눈부신 문명과 산업은 더 한층 우리의 빈 곳간을 채워야 하는 조급함과 절박감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분야에서 ‘빨리빨리’ 라는 웃지 못할 문화가 우리의 생활 속 깊이 자리를 잡게 되었으리라. 빨리 먹고, 빨리 일하고, 공부도 이것저것 많은 것을 배우려면 빨리빨리 하는 습관이 필요했을 것이다. 부모 세대의 가난과 무지를 자식한테까지 물려줄 수 없다는 절박한 욕구가 요원한 불길처럼 번져 우리나라의 교육 열기는 단연 세계 최고 수준이라 하지 않는가. 빠른 시간 내에 선진국을 따라잡고 배불리 먹으려면 서둘러야 했던 당위성에 공감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서양과 백 년 이상 뒤떨어진 과학으로 무엇을 어찌 할 수 있단 말인가. 기초과학이 전무이던 우리나라의 현실은 참담한 지경 이었다. 기초과학으로 노벨상을 독차지하는 선진 국가들이 부럽기만 할뿐 그림의 떡이었다. 배고파 보라! 이 눈치 저 눈치 볼 겨를 없다. 건너뛰자, 그나마 산업생산의 초보적 단계인 노동집약 산업으로 근대화 물결에 합류한 우리나라의 산업은 70년대 이후 눈부시게 성장하였다. 그러한 인적자원의 풍부한 경험으로 우리는 생산기술 부문에서도 세계적 수준에 다다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노동집약 산업은 이미 사양길로 접어든지 오래되었다. 이제는 아이티와 첨단산업 등 이른바 4차 산업의 중심에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시대가 도래 하였다.
 
 
 
 
그동안 빈 곳간을 채우기 위해 우리는 악착같이 살아온 것 같다. 공복에 영양가 없는 밥을 채우던 시대는 지나가고 과대한 칼로리의 섭취로 각종 비만과 성인병의 위험에 노출되는 세상이 되었다. 어느덧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동안 선진문물에 익숙해져 있고 삶의 질은 고급화되어 가고 있다. 가전이나 가구의 트렌드를 보면 옛날과  다르다. 투박한 무늬와 화려한 장식은 비 호감으로 분류된다. 선진문물에 목말라 하며 빈 공간에 무언가를 채워야 했던 종래의 일차원식 인식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티비의 두께는 갈수록 얇아지고 둔탁한 테두리는 미세한 선으로 대체되고 있다. 칼라는 블랙과 화이트로 획일화 된 단조로움을 강조한다. 남의 나라 기술을 모방해서 이룩한 생산기술은 국가 경쟁력에서 뒤질 수밖에 없다. 위기라고 하는 공동의 인식이 국가와 기업에서 시작되었고, 엄청난 양의 연구 개발비의 투자로 많은 분야에서 이미 독창적인 성과를 내고 있다. 우리의 스마트 폰과 가전은 세계 시장을 휩쓸고 서양에서 들어온 팝송을 들으며 열광하던 우리는 모방을 넘어서 아이돌이나 걸 그룹 이라는 독특한 문화 콘텐츠도 탄생시켰다. 바야흐로 전 세계인이 우리가 개발한 K팝인 춤과 노래를 따라하는 시대로 바뀐 것이다.
 
세계 수학경시대회 등에서 연속 우승할 정도로 한국인은 타고난 천재적 기질도 있지만 부지런한 국민성과 ‘빨리빨리’ 정신이 낳은 기적의 성과가 아니겠는가. 빨리 먹고 포만감을 즐기는 우리나라 사람의 위암 발병률은 세계에서 가장 높다고 한다. 아직도 우리는폭식과 ‘빨리빨리’ 의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음식 문화와 생활방식도 경제성장과 더불어 점차 바뀌어야하고 과속으로 인한 오류와 부작용을 견제해야하는 시점이 아닌가 싶다. 사랑도 너무 ‘빨리빨리’ 하다 보니 오래가지 못하고 빨리 끝내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 같다. 꾹꾹 눌러 절제된 사랑으로 진정한 영혼에 불을 지피고 ‘느리게 천천히’ 함께 사는 세상을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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