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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안경 동지 /김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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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작성일 2020-11-05 15:50 조회 9,30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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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131>
 
안경 동지
 
김재구 / 시인 (한국문협 인니지부 사무국장)
 
요즈음 나는 아내를 ‘동지(同志)’ 라고 부르고 싶어졌다. 아내를 동지라 부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이지만 갑자기 그렇게 부르고 싶은 것이다. ‘동지’ 라는 말에는 원래 좋은 의미가 담겨있다. 같은 뜻이나 목적을 공유하는 친한 사람들 간에 쓰는 호칭이다. 꼭 정치적인 뜻이나 목적을 같이 하는 사람들끼리만 쓰이는 말은 아니다. 같은 마음, 같은 뜻 그리고 같은 삶의 목적을 향해 간다면 못 쓸 말도 아니다. 그럼에도 정치적인 운동을 하시는 분들이 주로 쓰는 말이다 보니 자기 부인에게 쓴다면 맞지 않아 보일 수도 있고 그렇게 쓰면 듣는 사람이 다소 어색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사실 아내와 나는 동지라는 말이 무척이나 호사스러운 말일 수도 있는 사이였다. 1998년에 결혼을 하였는데, 그 전에는 몰랐다. 결혼 전에 나에게 시집을 선물하기에 시와 문학을 좋아하는 줄 알았다. 이를 인연으로 우리는 같은 뜻을 품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오산이었다. 아내는 글 읽기는 좋아하는데 창작은 아주 힘들어 했다. 오히려 나는 아주 잼병인 수학에는 거의 신기에 가까운 실력을 아내는 가지고 있다. 숫자에 밝아서 미국에서 통계학 박사까지 땄다. 그런데 나의 정서와는 잘 맞지 않았다. 사과를 살 때도 나는 자주 서너 개 혹은 대 여섯 개 사라고 하지만, “정확히 몇 개를 말하는 것이냐”
라고 되묻는 아내에게 핀잔을 듣기 일쑤다.
 
인니 돈을 숫자로 쓸 때는 꼭 마침표를 숫자 3개마다 찍어줘야 한다. 내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은데 점을 안 찍으면 아내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싫은 내색을 곧 바로 낸다. 결혼하고 산지 이제 거의 20여년인데 살면서 서로 다른 점만 계속 발견되고 도대체 같은 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아내는 나와 다르게 아주 고집도 세고 일하는데 추진력도 좋고 주장도 강한편이다. 학교 다닐 때도 공부에 관한한 일단 누구하고도 경쟁에 이를 때면 절대 지지를 않는다. 여고에서 전교 일등도 마음만 먹으면 했다고 했다. 경쟁이 없으면 재미도 못 느끼고 성적까지 떨어졌다고 한다. 반면에 나는 우유부단하고 마음이 여리고 주장이 강하지 않다. 다른 사람들의 주장을 꺾는 것도 행복하지 않다. 누가 나와 경쟁해서 나에게 지기라도 하면 내가 더 가슴이 아프고 불편하다. 주로 설명을 듣고 행하거나 경쟁에서 지는 편이 마음이 더 놓이고 편할 때가 있다. 차를 몰고 갈 때도 아내는 어지간하면 길을 잃어도 다른 이에게 길을 묻지를 않는다. 백화점에서 어떤 상점을 찾을 때에도 기어코 혼자 생각을 해 내서 원하는 곳을 찾아낸다. 나는 길을 잃으면 반드시 여러 사람들에게 묻는다.
 
늘 누가 날 도와줄 수 있나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그래서 내 주변에 도우미가 없으면 나는 삶이 아주 불편해지고 두렵기까지 하다. 하지만 아내는 아무도 주변에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도 크게 불편해 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어떤 문제가 터지면 그 문제를 혼자 풀어가는 것을 즐기는 것 같다. 특히 컴퓨터에 무슨 문제가 생겨도 아내는 구글과 유투브를 샅샅이 뒤져서 혼자 문제를 풀어낸다. 나는 컴퓨터에 문제가 생기면 아내를 찾는다. 그래서 나는 아내에게 의존도가 크고 아내는 나에게 대한 의존도가 아주 작다. 특히 컴퓨터도 그렇고 핸드폰 사용과 소프트웨어 사용에 있어 아내는 거의 일상화되어 있는 일들이다. 활용도가 엄청나다. 하지만 내게 있어 컴퓨터는 워드-타자 기능과 메일 보내는 정도다. 핸드폰도 카톡이나 와셉 정도 하는 것이 아주 큰 일하는 것이다. 그래서 직장에서 엑셀 프로그램이나 Google Docs의 사용을 하려면 나는 자주 아내에게 도움을 청해야 한다. 잔소리 엄청 들어가면서…. 특히 부동산이나 월부로 뭔가를 사고 팔고 하려면 나는 아내가 없으면 돈 계산이 잘 안돼 하기가 어렵다. 혼자 하기라도 하면 반드시 손해를 각오해야 한다. 이자율이나 숫자에 관계되는 것들은 도무지 내 적성에 맞지를 않는다. 숫자에 강한 아내가 부러울 때가 있다. 그러한 아내의 고집스러운 성격으로 인해 나는 힘이 든 적이 많았다.
 
아내의 그런 신뢰가 가지 않는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지 않는 성격이 우리 사이에 갈등과 반목을 생기게 할 때도 많아 결혼 생활이 그렇게 쉽지 만은 않았다. 2005년경 여름에 한번은 우리가 미국의 플로리다 주 펜서콜라 해변에서 피서를 한 일이 있었다. 2박3일 일정의 1박은 미숫가루처럼 고운 해변가의 모래를 밟고 맑은 하늘을 마시고, 맑은 물에 더위를 식히고 바베큐를 해 먹고 하루를 아들과 함께 온 식구가 아주 잘 보냈다. 그리고 다음 날 National Naval Aviation Museum에서 비행기 전시회가 있다고 해서 가는 길이었다. 그 당시에는 아직 스마트 폰도 대중화되어 있지 못했고 GPS는 더더욱 일상화되어 있지 않았다. 지도를 가지고 다니면서 읽고 계산하고 사람들에게 묻고 그렇게 주로 목적지에 다다르곤 했다.
 
그때는 나의 임무가 아주 중요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운전은 주로 아내가 했다. 그런데 비행기 박물관이 초행이다 보니 아내가 길을 찾아 가는 것이 쉽지가 않아 보였다. 나는 차 안에서 지도를 펼치고 면밀히 지도를 살피고 뒤 자석에 앉아서 방향을 제시하여 주었다. 이런 협조적인 차 안 분위기와 좋은 날씨에 세 식구의 기쁨이 아주 충만하였다. 중간에 내려서 사 먹는 맥도날드 햄버거의 맛도 기가 막히게 맛이 있었다. 그런데 차가 박물관 근처에 다다랐을 때 길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
 
하나는 직진이고 하나는 우회전을 해야 했다. 나는 직진을 외쳤다. 그런데 우회전 길의 전봇대 위에서 아내는 “National Naval Aviation Museum”이라는 푯말을 발견한 것이었다. 아내는 완전한 확신과 자신감으로 나의 “직진” 이라는 말은 완전 깡그리 무시하고 핸들을 오른쪽으로 틀고 악셀을 엄청 밟고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아니야 그리로 가면 안돼, 직진 해야 돼!” 또 한 번 외쳤지만 차 안에서 공허하게 메아리 쳐 울릴 뿐. 아내는 그 말에 콧방귀만 끼고 차를 몰았다. 차는 하염없이 달렸다. 이미 30분이 지났는데 입구는 보이지 않았다. 가끔 좁은 길로 통하는 문들이 보였지만 내려서 가보면 단단히 열쇠로 잠겨 있었다. 아마도 박물관의 뒷문이 아니었나 싶다. 비행기 박물관의 크기는 아마도 서울시나 부산 시 만하지 않았나 싶다. 가도 가도 정문은 도무지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마음속에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미움이 싹터 그 감정을 추스르느라 하나님께 기도까지 해야 했다. 30분이나 더 달리고 나니까 박물관의 정문이 멀리서 보였다. 우회전 한 곳에서 직진만 했어도 10분이면 정문에 다다를 텐데…. 나는 입에 고여 드는 침이 그토록 쓴 맛이 날 수 있는지 흔치 않는 경험을 했다. 문제는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박물관 견학을 다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아내는 박물관 정문에서 차 머리를 왔던 길로 다시 우회전을 하는 것이었다. 왔던 길은 증명된 길이고 아직도 좌회전 길은 미지의 길이라는 이유였다. 이런 식의 반목과 갈등으로 우리의 결혼생활은 적잖이 삐걱거렸다. 우리 사이에 세월만이 약이었다. 세월은 어찌 된 건지 미움의 모든 기억들을 점차 희석시키고 조금씩 그것을 침식해 갔다.
 
2011년에 나는 미국에서 직장을 잡을 수 없어서 인도네시아로 아들과 함께 왔다. 그 때 아내는 홀로 루이지애나에 남아 박사 학위 공부를 마저 마치기로 하였다. 식구들과 다시 합칠 날 만을 고대하며 끼니도 잘 챙겨 먹지 않고 잠도 잘 못 자면서 학위를 기어코 마치고야 말았다. 그 대단한 고집으로 그녀는 박사 학위를 마치고 만 것이었다. 마치자마자 많은 사람들이 미국 내에서 좋은 직장을 잡으라는 조언도 다 마다하고 남편과 아들이 기다리고 있는 인도네시아로 날아왔다. 많은 친구들이 그런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 다들 그녀를 고집쟁이라 하였다. 하지만 아내는 너무 무리를 한 탓이었는지 몹쓸 병을 얻게 되었다. 이 때문에 수술도 받고 지난 5-6년간 방사선 치료와 화학 치료도 받고 크고 작은 병치레로 많은 고생을 하며 살았다. 독한 약의 부작용으로 발톱들이 빠져서 피가 나고 걷지 못하는 모습이 측은하기도 하였다. 거친 세월의 파도와 비바람은 아내의 고집스럽고 까칠하기까지 한 성격도 조금씩 무디게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는 컴퓨터를 보다가. “내 눈이 이상해, 글들이 왜 이리 흐리지?" 하는 것이었다. 내게는 안경만 벗으면 늘 상 일어나는 일이었는데 아내는 한 며칠을 얼굴에 걱정이 한 가득 담겨 있었다. 아내는 병원에 가서 안과 의사를 만나고 노안이라는 말을 듣고 한편으로는 안심도 되고 또 한 편으로는 믿을 수 없다며 다소 침울하게 앉아 있었다. 의사에게서 안경을 써야 한다는 판정을 받고 온 것이다. 아내의 눈의 시력은 그녀의 자랑 가운데 하나였다. 안경이라는 것은 그녀의 삶에 낄 자리가 없는 전혀 상관없는 물건이었다. 안경 없이도 수 십 년을 아무 불편하지 않게 살아왔는데 이제는 안경을 껴야한다고 풀이 죽었다.
 
 
나는 50을 넘어 살아오면서 늘 상 눈이 안 좋아 안경 없이 살아온 적이 없다. 안경을 끼면 겨울에 라면 먹을 때 김이 서려 참 불편하다. 옷을 입고 벗을 때도 모르고 안경을 벗지 않으면 옷과 얼굴 사이에 끼어서 안경이 휘기도 하고 얼굴을 치기도 한다. 세수를 할 때도 벗어야 하는 안경은 없으면 안되는 참 불편한 물건이다. 그런데 일 년 전부터 나는 안경을 써도 보이지 않는 글들이 많아져 힘들어 졌다. 오히려 안경을 벗어야 가까운 글자가 보이는 것이다.
 
핸드폰에 있는 깨알 같은 글을 읽으려면 나는 오히려 안경을 머리 위에 걷어 올려 부쳐 놓고 읽고는 한다. 나이가 들어 노안이 와서 그렇다고 주위 분들이 이야기를 해준다. 나는 안경알에 돋보기가 부분적으로 박혀 있는 멀티안경을 구입하였다. 필요해도 불편한 안경 같은 물건을 아내도 나처럼 써야한다니 내 마음이 조금 안되었다는 마음이 들었다.
 
며칠 전 BSD시에 있는 이온 백화점에 함께 가서 아내는 돋보기 안경을 하나 샀다. 초록색 빛이 은은하게 감도는 투명한 뿔 테 안경이었다. 안경을 끼니까 아내가 많이 달라 보였다. 오히려 나이보다 더 어려 보이고 예뻐 보이기까지 했다. 어는 날 컴퓨터를 하는 데 둘이서 안경을 끼고 똑 같은 맥 컴퓨터를 보면서 안경을 서로 끼고 열심히 뭔가를 컴퓨터로 읽다가 나는 한 가지 깨 달았다.
아내는 이제 나의 동지 같다고. 이름하여 “안경 동지” 아니겠냐고.
 
나는 너털웃음을 혼자서 껄껄 웃었다. ‘코로나19’ 로 모두가 어려운 시기임에도 이렇게 소소한 행복을 만끽하며 아내와 함께 안경동지로 인생의 동지로 행복할 수 있기를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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