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눈물이 없습니다 /이재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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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작성일 2021-02-26 15:44 조회 12,782 댓글 0본문
<수필산책 147>
눈물이 없습니다
이재민 / 한국문협 인니지부 회원
눈물이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놓고 싶어서 저는 오래전의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 합니다. ”내 삶의 배가 잘 가고 있는가?“ 깊은 회의감이 몰려올 때였습니다. 늘 일을 핑계로 술에 취해 살았거든요. 그때 타지키스탄에서 3개월 선교를 제안 받았습니다. 일과 가정의 문제를 훌훌 털어버리고 어딘가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밀물처럼 몰려올 때였어요. 머리도 식힐 겸 여행 삼아 덜컥 비행기에 몸을 실어 버렸죠.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공항에서 타지키스탄 행 비행기를 갈아 탈 때였습니다. 제 손에 꼭 쥐고 있던 리턴 티켓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던, 동행한 목사님께서 말씀 하시더군요. 그렇게 꼭 쥐지 않아도 된다고. 그 티켓이 필요가 없을 거라고. 생명줄처럼 잡고 있던 그 티켓이 무안하게 제 손에 꼭 쥐어져 있었답니다.
타지키스탄에서 무엇을 했느냐고요? 칼칼한 바람과 맞섰답니다. 물기 하나 없는 바람을 느껴본 적이 있으세요? 따가워서 피부가 벗겨질 듯한 바람을요. 그 바람은 물리적이면서 물리적이지 않은 바람입니다. 저를 발가벗기는 바람 앞에서 저는 휘청거렸고, 가까스로 쓰러지는 몸을 지탱해야 했습니다. 폭격을 받아 절반이 무너졌지만, 담쟁이 넝쿨을 몸에 걸치고 살아 있음을 외치는 타지키스탄의 담벼락처럼 말이지요. 타지키스탄은 내전 중이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의 영혼과 내전 중이었구요. 누군가 하나는 쓰러져야 끝나는데 좀처럼 이기는 쪽도 지는 쪽도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한해가 지나고 비자 발급을 위해 담임 목사님과 함께 한국에 잠시 들러야 했습니다. 그때 다급한 연락이 왔습니다. 탈레반 교육을 받은 무리가 교회에 폭탄을 터트렸다구요. 열 명이 죽고, 백이십명이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는... 그 소식에 다급히 상처치료에 쓰일 약을 들쳐 메고 허겁지겁 타지키스탄으로 향했습니다. 도착해 보니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습니다. 교회 건물은 거의 날아가고, 교인들과 제자들은 상처를 부여잡고 울부짖고 있었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었겠습니까. 피 떡이 된 사람들의 팔 다리에 연고를 쏟아 붓고 울먹이는 일이 제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습니다.
‘9.11 테러’ 기억하시죠? 그날 이후 저와 아프간이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종군 기자 한 분과 아프간으로 향하게 되면서부터요. 당시 타지키스탄 국경인근에는 아프간 난민들이 탈레반을 피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갓난아기를 업고, 노인을 부축하고, 짐 가방 몇 개를 둘러맨 채 배고픔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들을 보니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더군요. 그날 이후 매일 빵을 싸들고 국경을 오갔답니다. 새벽에 넘어가서 밤이 되어 돌아오는 고된 나날의 연속이었죠. 세 달쯤 지나니 아프간 국경 수비대장은 제가 기특했는지 한 가지 제안을 하더군요. 매일 힘들 게 국경을 넘지 말고, 차라리 아프간에 머물라는 것이었죠. 그리고는 쿤두주 주지사도 소개시켜 주었답니다. 이후 저는 주지사의 특별 명령으로 발급된 비자를 받고, 낡은 집 하나를 얻어 아프간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동양인 하나가 들어와 타지키스탄 청년들과 빵을 실어 나르는 모습이 희한했는지 마을 사람들의 태도가 처음에는 아주 호의적이었답니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제가 태권도라는 무술을 가르치고, 기독교 복음을 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호의적이라는 단어가 호전적이라는 단어로 바뀌어 버렸어요. 살면서 욕 좀 들어보셨나요? 저는 정말 사람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욕을 먹고 아프간에서 살았답니다. 하루는 타지키스탄 제자와 길을 걷고 있는데 탈레반 무리가 트럭 위에서 저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무어라 계속 말을 하더군요. 곁에 있던 제자가 설명해 주었답니다. 세상에서 가장 디테일한 욕이라고. 그 말을 듣고 그냥 웃고 말았습니다.
저는 쿤두주에서 2년을 보낸 후, 카불에서 11년을 보냈습니다. 혹시 <연을 쫓는 아이> 읽어보셨나요? 아미르와 하산이 성장한 그곳 카불이요. 카불에서 겪은 일은 며칠 밤을 새워도 다 풀어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저 지금도 저에게는 칼칼한 바람만이 마냥 그리운 이름이지요. 그곳, 사람들은, 눈물이 없습니다. 10미터쯤에서 폭탄이 터져 사람들이 다치고 죽어나가도, 무덤덤하게 빵을 팔고, 채소를 정리하죠. 죽음은 그들 삶의 일부입니다.
이제 인도네시아까지 제가 흘러온 얘기를 해야겠죠? 인도네시아는 아프간 사람들에게 고마운 나라입니다. 왜냐하면 아프간 사람들을 위해 난민 선을 띄운 몇 안 되는 나라이니까요.
아프간은 상황이 점점 나빠져 더 이상 제가 머물 수 없는 곳이 되었습니다. 아프간을 떠나오던 날, 타지키스탄에서 버렸던 비행기 티켓이 아련히 떠오르더군요. 아프간을 떠난 뒤에도 저는 아프간 난민들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습니다. 터키로, 그리스로 향했지요. 국경이라는 껍질을 벗겨내면 세상에는 참 좋은 곳이 많더군요. 풍요라는 잊고 있던 말도 자연스레 떠오르구요. 두 나라는 풍요롭지만, 제 마음이 이상하게 풍요롭지 못했어요. 그래서 무작정 아프간 난민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인도네시아로 향했답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어찌어찌하여 유엔 산하기관인 미국 단체와 연락이 닿았는데, 난민들을 돕고 있다는 아프간 사람의 주소를 제게 전달해 주더군요. 무턱대고 그 사람의 사무실이 있는 곳으로 찾아갔지요.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제가 알고 있는 사람이 그 안에 있었습니다. 아프간 제자였습니다. 그를 보자 저도 모르게 ‘아멘’이 절로 튀어나왔지요. 그렇게 또 지금까지 저는 또 아프간 난민들과 이곳에서 연을 쫓고 있네요. 난민들에게 희망은, 다시 난민 선을 타고 그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 어딘가로 향하는 것입니다.
난민 캠프에 수용된 사람들은, 밥은 굶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혜택마저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굶주리며 부평초처럼 떠돌 수밖에 없어요. 혹시 언론에서 보셨는지 모르겠어요. 얼마 전 500명 아프간 난민들이 인도네시아 교도소로 찾아가 그들을 받아달라고 부탁했던 일을요. 어찌된 일인지 교도소에서 그들을 받아주었답니다. 어처구니없죠? 살기 위해서는 죄를 짓지 않고 교소도라도 가야만 하는 현실이요. 이곳에는 캠프에 수용되지 못한 아프간 난민이 많아요. 그들은 일도 할 수 없고, 자녀들은 교육을 받을 수도 없답니다. 그래도 배움이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자녀를 위해 선생을 자처합니다. 인도네시아의 바람은 습해요. 칼칼한 맛이 없죠. 아직도 제가 가야할 길은 멀어요. 끝이 없죠. 하고 싶은 말이요? 글쎄요. 이곳 난민들이 열대 야자수처럼 활짝 기지개 좀 켜고, 자주 웃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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