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 나의 피터 팬은 어디로 갔을까 /이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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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작성일 2021-04-09 10:34 조회 9,043 댓글 0본문
<수필산책 153>
나의 피터 팬은 어디로 갔을까
이병규 / 한국문협 인니지부 회원
한 달을 준비하던 본사와의 회의가 끝나고 오늘은 기필코 일찍 퇴근하겠다는 일념으로 급한 보고서만 몇 개 처리하고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코로나 때문에 럭다운 하던 시절이 그리울 정도로 오늘 수디르만 대로는 차량들로 꽉 막혀 있었고, 이른 퇴근에도 불구하고 차량 정체에 지친 몸은 차량 시트로 자꾸 파고들었다. 막힌 차량들 사이로 날 파리 떼처럼 요리조리 쏙쏙 빠져나가는 오토바이들을 보면서 괜한 짜증만 낸다. 내 삶은 언제부터 이렇게 피곤하기만 했던 걸까? 답답한 교통 체증을 뚫고 평소보다 20분이나 더 걸려서 겨우 집에 도착했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차량이 들어오는 입구에서 내려 메인 로비를 지나면 양쪽으로 아파트가 두개의 동으로 좌우로 나뉘어져 있고, 한가운데 큰 수영장이 자리 잡고 있다. 그 수영장을 지나면 한 가운데 한개 동의 아파트가 더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메인 로비를 지나면 난 항상 오른쪽으로 갈지 왼쪽으로 갈지 고민을 하는데, 늘 나는 왼쪽으로 돌아간다. 오른쪽이 사람들이 많이 앉아있기 때문인데 굳이 사람 많은 쪽으로 가지 않으려는 생각에 항상 왼쪽으로 길을 선택했다. 오늘도 역시나 왠 꼬맹이 한 무리가 오른쪽 편에 자리 잡고 있길래 왼쪽으로 돌아가려는데, 그렇지 않아도 교통 체증에 삐딱해진 내 눈에 걸리적거리는 모습이 들어왔다.
꼬맹이들이 썬베드와 둥근 탁자에 각각 삐딱하게 기대고들 앉아 있는데 턱에 마스크를 대충 걸치고 있었다. ‘마스크도 제대로 안쓰고 짜식들… 한 마디 해줄까?’ 하는 마음으로 오른쪽으로 길을 정하고 꼬맹이들 마스크 제대로 쓰라며 훈계 질 하려고 가고 있는데, 그 중 한 녀석의 말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어제 아이언 맨 영화 봤는데 진짜 쩔더라. 그 수트만 있으면, 하늘을 맘대로 날 수 있어. 엄청 재밌을 거 같지 않아?" "어! 나도 그거 봤어. 주인공 그 수트 너무 멋지지? 수트에서 무기도 나와서 악당들도 막 무찌르고 완전 멋있던데?” “맞아 맞아! 나도 하늘을 막 날아보고 싶어. 어쩌면 NASA에서는 벌써 그런 수트를 만들었을거야” “그렇지? UFO가 쳐들어오면 출동할 수 있게 준비해뒀을걸?” 맞은편의 꼬마가 더 크게 대응했다. 이들의 진지한 대화에 난 혼쭐을 내주겠다는 생각은 접고 피식 웃으며 발걸음을 늦추고 그들의 이야기를 훔쳐 들었다.
"에이! 하늘은 날아서 뭐하게? 난 집에서 게임하는 게 훨씬 재밌던데? 어제 젤XX의 전설 엔딩까지. 깼어!" "아 진짜? 와!!!! 맞아...맞아... 하늘을 날아서 뭐하냐?" "그래 나도 들었는데 하늘 위로 올라가면 공기도 없고 엄청 춥대" "뭐야? 공기가 없으면 죽는 거잖아? 춥기도 하다고? 그리고 하늘 높이 날다가 떨어지면 어떡해” "그러게 무섭다. 우리 게임이나 하러 가자" "주말에 아빠가 새 게임팩 사줬어" "아 그거? 주인공 들고 있는 총이 엄청 쌔다구 하던데 구경 시켜줘!!!“
이외의 전개, 내가 잠시 얼이 빠져있는 동안 꼬맹이들은 우르르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찰나였지만, 잠시 내가 그들의 이야기에 빠져 있었던 건, 며칠 전 한 후배의 페이스 북에서 본 글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얼마 전 그 후배는 페이스 북에 자기 친구들이 각자의 길을 열심히 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자기의 피터 팬은 죽었다고 넋두리를 했다. 어떤 녀석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8수를 해서 대학 시험을 다시 쳤고, 어떤 녀석은 고시공부를 한다고 머리 싸매고 다시 고시원으로 갔단다. 그런데 자기는 그런 모습이 진짜 그들이 살고 싶은 삶인지 궁금하다고 했다. 사회라는 곳에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천문학자를 꿈꾸고, 작가를 꿈꾸던 친구들이 하나 둘 먹고 사는 문제를 가장 잘 해결할 수 있는 길로 전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작 본인은 별로 하고 싶은 일도 없고,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다고 했다. 그와 그의 친구들에게 피터 팬은 각자 다른 의미로 이미 죽어버린 것 같다고 했다. 너무나도 현실적으로 변한 자신들의 모습이 어른이 되어버려 날지 못하는 피터 팬과 그 친구들처럼 변한 것 같아 너무 슬프다고 했다. 나도 그들과 같이 현실의 직장에서 하루하루 삶을 살아가는데 머물러 있다. 나도 한때는 먹고 사는 게 아닌 나 자신의 적성과 좋아하는 일을 위하여 몰입하던 때도 있었고, 다가오지 않은 많은 것들을 준비하며 보낸 시간들이 있었다.
그 모든 좋아하던 일들은 취미생활이 되었고, 나와는 아무 상관없을 것 같았던 직장에서, 타국에서 아무 관심도 없는 업무를 하며 그에 엮인 각종 사회적인 만남들을 가지고 있다. 그런 것이 많아질수록 나의 꿈과 하고 싶은 일들과 멀어지고 대신 그것에 대한 체념들로 채워졌다. 이제 사회를 살아가면서 조금 씩 조금 씩 늘어가는 지식과 그에 더불어 늘어가는 얄팍한 걱정들이 내 어릴 적 꿈과 무한한 상상력을 자꾸만 가로 막고 서서 내 맘속의 피터 팬을 날지 못하게 하고 평범한 인간으로 늙게 만들어버렸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나의 어린 시절에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며, 인어공주도 있었고, 사라진 무 대륙도 있었다. 지구 속에 있다는 미지의 세상도 있고, 지구가 위험할 때 출동한다는 로봇 태권브이도 63빌딩 속에 출동 대기 중이었다. 친구들과 모이면 모두들 그런 상상의 나래들로 시간을 떼우기 일쑤였다. 나와 친구들 각각의 맘속에 그려지는 모습들은 달랐을 지라도 언젠가 그 상상 속의 인물들을 만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곧 우리에겐 놀이였고 즐거움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내가 어렸을 적에는 하늘을 나는 꿈을 꾸면서 숨을 못 쉰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않았고, 내가 로보트 태권브이를 조정할 때 한 발 한 발 조심히 내딛지 않으면 집들이 부숴질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 본적이 없다. 또, 지구 안의 또 다른 세계를 꿈 꿀 때는 지층 속에서 꿈틀댄다는 용암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나의 그런 상상력을 방해할 만한 싸구려 오락게임이나 영화, 심지어 텔레비전조차도 흔치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 어른들은 과학과 이성이라는 미명아래 우리의 아이들에게 수많은 상상과 꿈들이 버려지게 하고 너무나도 현실적인 숙제들을 우리 아이들에게 주고 있지는 않은가 의문을 가져본다.
오늘 저녁에는 TV 예능 프로나 보고 있을게 아니라 아이들에게 피터 팬 동화책이라도 한 번 더 읽어 줘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집으로 향했다. 얼마 전 후배의 SNS에 남겨진 글을 보며 우리의 아이들은 내가 어릴 적 꾸었던 꿈들을 마음대로 꾸게 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나에게서 우리 아이들에게 심어주고 그것이 그들의 상상력 대신 현실에 대한 준비만을 강요하는 핑계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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