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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초심자의 길 /전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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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작성일 2021-09-17 09:53 조회 10,00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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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176>
 
초심자의 길
 
전현진 / 한국문협 인니지부 회원
 
 
어느 해 가을, 친구들과 함께 부산행 기차 안에서였다. 절에 가자는 건 순전히 내 제안이었다. 가본 적 없는 곳이었다. 기차에서 내려 사찰이 있는 산으로 향했다. 등산로 입구의 안내도는 명료했다. 길 따라 오르면 도착이었다. 갈림길도 딱히 없고, 어려울 것 없는 코스였다. 산 입구는 공원 산책로로 양쪽에 꽃과 나무가 나란히 이어졌고, 평평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중간 중간 쉬어갈 수 있는 긴 벤치도 놓여있고 오가는 사람들도 여유롭게 거닐고 있었다.
 
새벽에 내린 비로 촉촉하게 적셔진 나무숲에서 맑고 신선한 공기가 뿜어져 나왔다. 은은한 꽃향기가 보드라운 흙 내음과 섞여 숨만 쉬어도 말끔해지는 것 같았다. 산뜻한 발걸음으로 길을 걸었다. 주고받는 말에 웃음이 묻어났다. 우리는 금세 목적지에 닿을 것 같았다. 어느 굽이에서부터였는지 평지가 우뚝 올라서기 시작했다. 계단을 오르듯 돌을 올라서고 물기에 젖은 흙에 발을 헛딛지 않기 위해 바닥을 살펴야했다. 곧은길인 줄 알았는데 발이 닿는 곳이 이리저리 휘어지고 있었다. 송골송골 땀이 차오르고, 호흡이 쇳소리를 냈다. 길다운 길은 진즉에 없어졌고, 사람들 발길로 낸 길도 무너져, 중간 중간 보이는 화살표가 없었다면 분명 길을 잃었다고 여겼을 것이다.
 
 
아래를 내려다봐도 꺾어진 길에 가려져 우리가 올라왔던 길이 보이지 않았다. 스산한 기운마저 느껴졌지만, 짐짓 아닌 체 했다. 나를 위해 길을 나서준 고마운 친구에게 미안했기 때문이다. 나란히 걷던 우리는 한 줄로 걸었고, 대화는 점점 잦아들었다. 친구의 하얀 새 운동화가 이 흙길에서 뒤처지지 않기를 마음으로 빌 뿐이었다. 언제 이 길이 끝날지 몰랐다.
 
예상했던 도착 시간은 이미 지나있었다. 저 멀리라도 목적지가 보이면 오르는 걸음이 의심스럽지는 않을 텐데, 바위에 가리고 나무에 숨겨져 있으니 알 수가 없었다. 내려오는 사람도, 올라가는 사람도 없었다. 속이 바짝 탔다. “이거 버찌나무다!” 바짝 웅크린 채, 오르는 길바닥만 보다가 친구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순간, 나뭇가지 사이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두 눈을 감았다 떴다. 찡그렸던 미간이 펴지고 맑고 깨끗한 하늘이 담겼다. 새벽 비에 씻긴 하늘이 너무나 말갛게 개었다. 도르르, 나뭇잎에 숨어있던 물방울이 반짝 뛰어내렸다. 발밑만 보느라 한참 놓쳤던 풍경이 한꺼번에 나타났다. 잠시 서서 몰려오는 풍경을 보고, 듣고, 냄새 맡았다.
 
길을 잃은 게 아니었다. 두려움이 부풀린 미로는 처음부터 허상이었다.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우리는 그저 비를 머금은 산길을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실재하는 것은 크고 작은 바위로 이어진 길과 사이사이 틈새마다 비집고 나온 풀들, 산길에 선 버찌나무였다. 후드득 버찌를 떨구고 우리가 고개를 들기를 기다렸을까.
 
거의 다다랐다는 표지판이 보이고, 저 위로 단청의 오방색이 보였다. 선명한 색과 맞닿으니 갈 길도 명확해졌다. 꼭대기가 나무에 가리고, 모퉁이가 바위에 막혀도 곧 다시 나타났다. 발걸음에 힘이 실렸다. 돌계단이 반가웠다. 드디어 평지를 만났다. 반짝이는 기와에서 햇살이 기지개를 펴는 것 같았다.
 
이 깊은 골짜기에 절을 어떻게 세웠을까? 나무를 이고 지고, 자재들을 펼치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들의 품이 들었을까?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절벽과 나무와 바위로 둘러싸인 절이었다. 마당의 개 한 마리와 작은 텃밭, 줄지어 걸린 연등이 대웅전 앞에서 객을 맞이했다. 진분홍 연꽃에 마음이 살랑였다. 내려오는 길은 전혀 달랐다. 휘감은 것 같던 길은 오간데 없고 차근차근 내려가기만 하면 되었다. 그늘에는 아직 물기가 있었지만, 바윗길이 특별히 미끄럽거나 위험하진 않았다. 흙을 뚫고 올라온 풀잎 사이엔 작은 꽃도 피어있었다. 산 뒤쪽으로 케이블카가 있어 반대편에서 내려오는 사람들도 만났다. 미지의 길을 갈 땐 언제 끝날지 모르고 굽이치던 길이 어느새 쭉 뻗어 있었다. 축지법이 붙었는지 속도가 늘어 짧은 시간 내에 내려왔다. 군데군데 있던 화살표도 필요 없었다. 그세 눈에 익어 있었다. 왜 아까는 그렇게 멀고 험하게 느껴졌던 걸까. 어느 쯤에 버찌나무가 있었는지도 깜박 잊고 술술 걸었다. 아, 흰 운동화여, 버찌의 검붉은 물에 현혹되지 말지어다. 영화 매트릭스처럼 모두 피해가길.
 
 
자갈치 시장에 들러 회 한 접시를 가운데 두고 친구와 앉았다. 혼자서는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올라간다한들 중간에 주저앉아 울었을 것이 분명했다. 올라가기 험한 줄도 모르고 새신을 신은 그녀에게 산을 권한 게 내내 걸렸지만, 비 머금은 숲 냄새와 밟히던 흙 기운, 촉촉한 물기, 지저귀던 새소리, 뺨에 닿았던 싱그러운 바람, 눈에 쏟아지던 햇살과 물감으로는 다 따라할 수 없는 수천수만의 녹음을 누군가 함께 나눌 수 있어서 고맙고 좋았다.
 
가보지 않은 길을 나서는 것은 도전이고 모험이라 두려움과 위험을 함께 쥐고 간다. 새로운 것이 늘 짜릿한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영 그렇지가 못하다. 겁 많고 긴장하고 떨려 정말 보아야할 것을 놓치기도 한다. 지나고서 후회한들 무슨 위로가 될까. 누구에게도 없던 처음은 없다. 나의 처음을 먼저 지나간 이가 반드시 있었다. 그러니 너무 겁내지 말기로 하자. 버찌나무는 늘 거기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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