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 훌쩍 떠난 흔적 /이태복 > 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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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 훌쩍 떠난 흔적 /이태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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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작성일 2022-11-04 23:37 조회 10,67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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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쩍 떠난 흔적
 
이태복 (시인, 사산자바문화연구원장)
 
 
떠나는 차를 막을 수 없어 손만 흔들고 연구원에 들어선다. 손님 떠난 휑한 연구원에 머르바부 산에 걸린 구름같은 적막이 흐른다. 고도가 낮아지고 항공기 착륙 후에 고막천공이 회복된 듯 그제야 일상의 밤벌레 소리가 요란하다. 별들도 다시 반짝인다.
 
“덜커덩! 콰아앙!”
빨랄 노인네가 잠그는 요란한 쇠 대문 소리가 머라삐 화산 폭발음처럼 커지더니 스러졌고 노인네에게는 주인님의 손님이라 부담이었는지 손님이 떠나자 긴장이 풀린 듯 방에 들어가 큰 대자로 떨어져 코골이를 한다. 적도의 산골에 이방인은 다시 홀로다.
 
 
문인인 나를 형처럼 따르는 현지인 친구는 6일 쉬는 동안 할 말이 많아 일상에서 못다한 수다를 다 떨고 갔다. 그는 현지인으로서 안정된 사업체가 있어 이들 수준에서는 남부럽지 않게 사는 사람이다. 과묵한 사람이지만 내게 유독 수다떨 듯 흉금을 터놓는 친구다. 전번에는 나와 친하다는 흔적을 남기려고 사무실을 지어 주고 가더니 이번에는 짓다가 중단한 연구원의 객실 두 간을 꾸며 주었다. 
 
처음 그가 나를 찾은 것은 2년 전이다. 한국인이 자바에 와서 원주민 동네에 살고 있어 호기심에 왔단다. 이웃과 스스럼없이 부대끼며 자바문화에 관심도 많고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린다는 나의 자화자찬과 동석한 이웃들까지 바람잡이처럼 거들어서인지 이후 방문이 잦았다.
 
만나는 횟수가 늘어가며 거절 못하는 내 성격이 들통이 나자 시간이 날 때면 자신의 차에 나를 태워 반 강제로 끌고 이곳저곳을 다녔다. 사업을 밀어 붙이듯 내 의사는 반만 듣고 자신이 사는 집은 물론 일터를 소개시켜 주기도 하고 지인들을 만나는 일정도 일부러 잡아 한국친구 자랑도 하며 자신의 일상에 나를 대동시켰다.
 
카우보이 세계를 동경하는지 말도 키우며 가죽 모자까지 준비해 승마도 하다가 지금은 시들했는지 애물단지가 된 듯 비싼 월급의 마부를 고용해 늙어가는 말을 돌보아 주고 있다. 허한 마음의 공간을 채우려고 늘 새로운 시도를 하는 친구였다.
 
노래를 좋아해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고 녹화하여 페이스 북에 올리기도 하고 악기 연주를 잘하는 운전수를 고용해 악기를 구입해 주고 연주를 시켜 즐긴다. 자신이 못하고 사는 것을 나를 통해 대리만족 하는가 보다. 한량 같은 나의 생활이 좋은지 여러 방법으로 내 시간을 교묘히 가로채 내가 누리는 것을 함께 누리기를 좋아했다. 만나는 횟수가 잦아졌고 그러면서 우리는 더 가까워졌다.
 
그는 순다인으로 두 부인을 거느린 무슬림이다. 만나 보니 두 부인 모두다 남편에 대해 만족하고 있었다. 사업, 취미, 사교, 모두가 무난한 정말 대단한 친구였다. 대기업 사장도 아니면서 나와 함께 하는 동안 호텔이며 식비와 경비를 모두 지불했다. 내게는 틈을 주지 않아 간혹 주유하는 동안 내가 목마르다며 음료수 몇 병을 사서 바늘구멍 같은 새지도 않는 틈을 메울 뿐이었다.
 
내가 도시에 안 나가는 이유는 감당 안되는 경비에 공연히 연연하기 싫어서인 것을 그가 간파하고 나의 지갑을 통제하므로 철저히 금융 재제를 하고 있다. 그와 보내는 시간은 내 자유를 조금 뺏기기는 해도 솔직히 내심 금융 재제를 즐기며 방관하는지도 모른다. 나도 속물인가 보다.
 
 
그는 지인들이 많지만 오늘도 나를 찾았다. 전화를 하든지 찾아온다. 그가 사업을 하다가 사람 관계 속에서 오해를 받거나 고민이 있을 때다. 친형처럼 흉금을 터놓았다. 그가 나로부터 얻고 싶은 것은 그가 가진 것으로 해결 할 수 없는 상황에 부딪혔을 때 길을 얻고 싶은 것이다.
 
내가 예수처럼 길이 되는 구세주도 아니고 그런 상황에서 그는 그저 내 생각을 들을 뿐이었다. 남이 두는 장기판 곁에서 보면 조금 보이는 것이 있듯 그저 내 수준에서 보이는 대로 걱정해 주기도 하고 그냥 들어 주는 것이 대부분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에 내가 믿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기다리다 보면 그가 모든 것이 해결됐다며 호들갑을 떨며 해피엔딩의 아름다운 소식을 전해 왔었다. 그럴 때면 우리는 함께 기뻐했다. 그것이 우리 만남의 전부다. 우리는 그러면서 친해졌다. 
 
지난 4개월 동안 출판 관계로 한국을 두 번이나 다녀오며 내 자신이 조금 바빴다. 없는 동안 연구원을 이틀 다녀갔단다. 이번에는 나도 쉬고 싶던 차였다. 그가 모처럼 시간이 있다며 쉬러 왔다. 독서나 교제 등 준비 없이 쉬는 것은 휴식이 아닌 노는 것이 될 수 있다. 그리고 편하지 않는 사람과 쉰다는 것 또한 피로가 더 할 뿐이다. 우리는 6박 7일을 서로 편히 함께 쉬었다. 그는 파인애플 한 자루를 갖고 와 이웃들과 정도 나눴다. 그의 향기는 이웃들에게도 파인애플 향기 같았다. 
 
그가 있는 동안 그의 지인들도 놀러왔다. 연구원은 유유상종 시끌벅적 사람들의 생기로 가득 찼다. 연구원에는 편의 시설로 완성된 카페와 세미나실외에 노래방이나 사우나 등 여러 기능의 장소를 꿈으로 준비하고 있다. 완성되면 방이 13개다. 처음부터 한인 현지인 구분 없이 필요한 사람들이 함께 쓰려고 개원했기에  늘 개방되어 있다. 숙박이 무료이기에 아무나 올 수 있는 곳이다.
 
펜데믹 때는 적막강산이었는데 지난달 25일은 소설 암바라와 덕분에 대사관 직원 두 명이 암바라와를 다녀갔고  27,28,29일에는 한국에서 문인들 9명이 암바라와 역사를 집중 탐방하러 와서 연구원에서는 디너쇼를 마련하고 전통춤 공연을 준비해 대접했다.
 
연구원은 퇴직한 현지인 군수. 경찰 군인 등이 커피를 나누는 사교 장소다. 연구원이 해 주는 것이라고는 조명 켜 주고 서민 커피인 커피 부북 한 잔 대접하는 게 고작이지만 현지 친구들이 몰려와 심심할 겨를이 없다. 나는 그의 마음 공간을 채워 주고 그는 나의 온전치 못한 보이는 공간을 완성시켜 주고 있다. 연구원은 드나드는 모든 사람들이 내 집처럼 여기기에 아마 내가 없어도 잘 운영 될 것이다.
 
사람이 다녀가고 나면 내 마음에는 늘 사랑의 흔적들로 가득 차 있다. 그가 떠난 후에 정원에 가보니 먹으려고 심어 놓은 고추가 어느새 자라 고춧대가 감당 못 할 만큼 주렁주렁 달려 있다.
 
‘아! 깜빡 잊었었구나.’ 풋고추라도 좀 따서 챙겨 보낼 걸……. 그는 거래처에서의 호출로 갑자기 훌쩍 떠났다. 보낼 준비도 못하고 떠나보냈다. 나도 이 세상 훌쩍 떠나겠지. 훌쩍 떠나는 게 인생사인가 보다. 그의 직원들이 내일 객실 마무리를 하고 또 떠난다. 내일 점심에는 닭 몇 마리라도 잡아 일꾼들을 대접해 보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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