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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나의 하얀 들창코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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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작성일 2024-12-08 23:52 조회 6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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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하얀 들창코 


전현진(한국문협 인니지부 회원)


1부


속도가 잦아들고 낯익은 배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차창을 조금 내리자 습기를 머금은 공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차가웠던 에어컨 바람 위에 육중한 바람이 이불처럼 덮여 살며시 눈을 감았다. 매미가 소란스럽게 여름을 고하고, 이름 모를 새가 ‘삑삑’ 아기 걸음마 신발 같은 소리로 울었다. 나뭇가지마다 가득 달린 나뭇잎이 위아래로 펄럭이며 커다랗게 파도 소리를 냈다.


풀냄새가 청량한 공기와 뒤섞여 날리는 듯했지만, 아무런 냄새도 맡을 수 없었다. 간신히 입으로 숨만 내쉴 뿐이었다. 부풀어 오른 코 때문에 머리가 무겁고 살짝 어지러웠다. 그래도 얼굴을 창에 가까이 대고 하늘을 바라보니 멀미가 수그러들었다. 차가 아파트 길로 들어서자 아파트를 상징하는 은빛 조형물에 빛이 반사되어 눈이 부셨다. 까맣게 선팅된 유리창을 올리고 얼굴을 안으로 당겼다.


대리기사가 아파트 지하 주차장 입구에 차를 세우고 비상등을 켰다.

“다 왔습니다.” 그가 하차하며 나를 힐끔 봤다.


나는 뒷자리에서 신발을 벗어 조수석으로 떨어뜨렸다. 한 발을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에 올리고 몸을 틀어 앞으로 숙였다. 코가 차창이나 의자에 부딪히지 않게 조심하면서 운전석으로 옮겨 탔다. 신발을 주워 신고 의자의 높낮이를 조절하고 다시 시동을 걸었다.


백미러로 뒤따르는 차가 없는지 살폈다.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다. 얼굴 중앙에 붙여놓은 압박 붕대만 거울에 드러났다. 콧대를 감싼 의료용 테이프마저 내 것 같았다. 기어를 변경해 주차장 안으로 들어가자 곡선의 길이 이어졌다.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며 아래층 깊숙이 들어갔다.


“얘야, 너는 특히 우산을 잘 쓰고 다녀라. 비가 오면 빗물이 다 콧구멍으로 들어갈라.”

십수 년 전에 들었던 문장이 시간처럼 날아가지도 않고 귓가를 맴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살결이 뽀얗고 통통한 체구를 지닌 아이였다. 특별히 튈 것 없는 평범한 소녀는 까만 머리카락을 항상 뒤로 잡아당겨 하나로 묶었다. 이마가 훤하게 드러났다. 치렁치렁한 치마보다는 시장에서 산 가성비 높은 바지를 주로 입었다. 깨끗하게 빤 옷차림이었지만, 양말 바닥은 배어 있는 때가 완전히 지지 않아 어느 색이든 회색빛이 섞여 있었다. 때론 느린 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머릿속은 갈팡질팡하느라 바빴다. 낮은 코에 앞을 보려고 일어선 콧구멍이 조신하지 못한 건 내 잘못이 아니었다.


할머니가 어린 나를 데리고 나가면 사람들이

“어머나, 애기네!”

“아유, 뽀얘라!”라는 말을 많이 했다고 했다.

할머니의 말을 들을 때마다 ‘까만 아기가 어디 있을까?’라고 생각했다. 아기에게 아기라고 하는 말은 사실 명시이지, 찬사가 아니다.


엄마는 내가 집에서 TV를 보고 있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때마다,

“그렇게 있지 말고, 코 좀 이렇게 세워서 잡아당겨!”라고 말했다.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자신의 콧대에서부터 콧방울까지 잡아당기는 시범을 보이며 내가 따라 하도록 했다. 어린 나는 코가 낮은 것이 내 잘못인 줄 알고, 아예 미간부터 인중까지 잡아당겼다. 잡아당겨서 높아질 코라면 성형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긴 했지만, 신중하게도 이런 말을 함부로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어느 방학엔가 아침 TV 프로그램에 유명한 운동선수가 나왔다. 진행자가

“00 씨는 키도 크고, 코도 크고, 귀도 크고, 손발도 무척 크시네요.”하고 놀라는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하하, 제가 처음부터 이렇게 컸던 것은 아니에요.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매일 팔다리를 쭉쭉 늘려주고, 코와 귀도 매일 이렇게 당겨주셨는걸요. 하하, 어른이 되니 이렇게 멋진 코가 되었더라고요.”

그의 크고 잘생긴 코는 얼굴 중앙에 오뚝하게 솟아 있었다.


“거봐라, 저 사람도 코를 열심히 잡아당겼다잖아.”

거실을 오가며 집안일을 하던 엄마가 한 마디 던졌다.


‘저 사람은 엄마가 해줬대요.’

나는 고개를 돌려 집안일과 가게 일에 쉴 틈이 없는 엄마의 등에 대고 눈으로 말했다. 등을 뾰족이 세우고 청소를 하는 엄마는 분주해서 답이 없었다.


주말마다 친척들이 집에 오는 게 좋았다. 아는 얼굴들이 북적이면 아무도 없는 빈집에서와 달리 마음이 꽉 찼다. 그러나 둘째 고모부는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만날 때마다, 내게 ‘비 올 때 우산을 꼭 얼굴 앞으로 쓰고 다녀라.’라든가, ‘너는 들창코라서 비가 오면 빗물 다 들어가겠다.’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고모부의 막내딸은 나보다 다섯 살 위였는데, 어린애답지 않게 키가 크고 늘씬했다. 긴 머리를 반만 묶어 커다란 리본을 달았고, 나머지 반은 허리까지 내려뜨렸다. 언니는 병아리 털처럼 보드라운 스웨터나 분홍색, 연한 보라색 치마를 즐겨 입었다.


언니의 두 눈은 쌍꺼풀이 짙었고, 속눈썹이 동그랗게 말려 하늘로 향했다. 마치 눕히면 눈을 감는 인형처럼 머리숱도 눈썹도 풍성했다.


언젠가 할머니에게 눈물점은 울 일이 많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정말로 옆집에 사는 같은 반 친구 보라는 아무 일도 아닌데 울곤 했다. 많이 걸어서 다리가 아프다거나 화장실이 급하다고 우는 보라의 눈에는 눈물점이 있었다.


고모부는 매번 언니를 업거나 목마에 태웠다. 다 큰 여자애를 업거나 목마에 태우고 대문을 나서는 사람은 고모부밖에 없었다. 언니는 내려놓으라고 고모부의 귀를 잡아당기거나 우는 척을 했다. 내가 보기에 언니가 진짜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언니의 왼쪽 눈 밑에도 눈물점이 있었지만, 언니가 우는 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할머니가 틀릴 수도 있었다. 할머니는 호랑이 따위가 나오는 이야기는 잘 알았지만, 공주나 왕자, 용이 나오는 이야기는 잘 몰랐다. 고모부가 언니를 울지 않게 지키는 용일지도 몰랐다.


언니의 코는 바르게 섰고, 입술은 튤립처럼 붉었다. 용이든 왕자든 누구라도 공주님 같은 언니를 지켜줄 것이었다.


친척들이 모이면 어른들께 인사를 하고, 매번 같은 질문을 하는 고모부를 피해 언니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언니랑 놀다 보면 어느새 고모부가 근처에 와 있었다.

고모부는 내가 다른 곳으로 달아나지 못하게 가까이 앉아서 말문을 열었다.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나는 차라리 귀를 막고 싶었지만, 그런 행동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참았다.


“둘 다요.”


“한 명만!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늘 똑같은 질문을 하는 집안 어른을 막아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둘 중 한 명을 고를 수 없었다. 아빠라고 말하면 엄마가 서운해할 테고, 엄마라고 하면 아빠가 속상해할지 모른다.


“그래도 둘 다요.”

“아니, 한 명만 얘기해봐. 나만 알고 있을게.”

도대체 왜 대답이 필요했던 것일까? 나는 눈물점이 없는데도 거의 매번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고모부는 친가 쪽 사람이니까 아빠라고 말하면 좋아할까?


“아빠요.”

“엄마는? 싫어?”

“아니요, 좋아요. 엄마가 좋아요.”

“아까는 아빠라며?”

“아빠도 좋고, 엄마도 좋아요.”

“아닌 것 같은데?”


잔인한 질문에 빠져 허우적대는 나를 아무도 구해주지 않았다. 그저 아이를 귀여워하는 어른의 장난이라고 여겼다. 어른이 아이가 예뻐서 하는 관심의 표현이었고, 친근함의 표시였다. 허용할 수 있는 일,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모든 기준은 어른들이 정했다.


어떤 답을 해도 정답이 아니었다. 나는 아빠도, 엄마도, 둘 다도 결국 오답이라는 눈빛에 질려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시련을 헤쳐 나가기에 그때 나는 아직 어렸다. 고모부가 왕자님이 아닌 것은 아주 확실했다. 왕자님은커녕 독이 든 사과를 먹이는 못된 마녀였다. 심장이 딱딱하게 질려버렸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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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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