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회 적도문학상 (성인부) 수필부문 가작 수상작 / 김선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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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작성일 2018-06-28 11:25 조회 6,123 댓글 0본문
제 2회 적도문학상 (성인부) 수필부문 가작 수상작
소확행 김여사
(소소한 일을 확실하게 행동으로 하는 김 여사)
김선숙
어느 날 아침 출근 준비 시간이 갑자기 버거워졌다. 부은 듯 까칠한 얼굴에 습관적 으로 회칠에 가까운 화장을 한다. 예전 같지 않다. 정장이라도 하는 날에는 스타킹을 신어야 한다. 다리도 부었는지 스타킹을 끌어 올려 당기다보면 팽팽한 스타킹에 급한 손톱이 스치고 순간 올이라도 나가면 신경질적으로 벗어 던지기를 여러 번. 이런 혼자 짜증에 갑자기 온 몸에 열이 올라 그나마 겨우 마무리한 화장이 여기저기 번지고 뭉친 거울 속 내 얼굴이 낯설어 스스로 고개를 떨군다. 그러고도 마주하지 못했던 내 얼굴이 잊혀지지 않아 확인 차 회사 화장실을 거듭 드나들고 책상 속 작은 거울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그런 일들이 몇 번 반복된 후 30년을 다닌 직장을 하루 아침에 그만 두었다. 한 번도 승진에서 밀린 적이 없었고, 앞날을 창창하게 보장 받던 자리를 미련 없이 떨쳐버렸는데 홀가분하기가 매미 날개 걸친 것 같았고, 회사를 위해 날 밤 새우던 열정은 온데간데 없이 막 출산을 마친 갓 스물 엄마 마냥 몸이 가뿐하였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 가장 잘 한 일 중 하나이다.
그리고 동네의 잉여인간 김 여사로 조용히 돌아왔다.
그간 미뤄 두었던 일에 집착하였다. 머리를 샛노란 색으로 염색을 하자 아래층 사시는 할머니가 멋지다고 추켜 세우지만 그 진의가 무엇인지도 눈치 챘다. 시어머니의 눈총도 두렵지 않았다. 수 개월간 그렇게 머리카락을 괴롭히며 색깔도 여러 번 바꾸면서 나만의 새로운 세상을 만끽하던 중, 그 새로운 세상을 조금씩 기록하는 일에도 재미를 붙였다.
그런데 난관에 봉착했다. 평생을 하루도 빠짐없이 사용했던 한글이 낯설기 시작했다. 어떻게 사용하여 글을 쓰는지도, 맞춤법도 띄어쓰기도 내 나라 글이 아니었다. 머리카락 색을 바꾸는 용기도 소중한 한 행보였지만 머릿속도 채워야겠다는 생각에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지만 왜 그리 어려운지, 내가 과연 한국인이 맞는지, 내가 한국에 관하여 무엇을 알고 있는지 나의 무식함에 여러 번 놀랐다.
학부로 다시 편입을 하였고, 그렇게 한국어 교원 자격증이 생겼고, 이제 그 자격증의 쓰임에 대한 정보도 얻게 되었다.
해외 자원봉사 지원을 하였는데, 일사천리로 단 번에 합격을 하였다. 내가 원했던 3지망까지의 국가는 아니었다. 미처 정보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불시착하게 되었다. 그나마 비자 지연으로 대기 기간이 있어 최소한의 준비를 할 수 있었다. 내가 봉사하는 기관은 이슬람대학이라 나의 파견에 가족들은 엄청 불안해 하였다. IS와 연결하여 ‘이슬람’이 들어가면 다 위험하거나 급진적인 성향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안보적 불안정성에 대한 외국인들의 인식과 견줄 바가 아니었다. 어 쨌든 이 기회는 나의 버킷리스트 두 개를 동시에 실행에 옮길 수 있게 해주었다. 한국어 교원 자격을 갖게 된 것과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었다.
이 나라는 모든 종교에 매우 관대하다. 골수 가톨릭 가정에서 자란 나를 열렬히 환영하여 주었다. 종교가 없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종교가 이슬람이 아니라고 차별하거나 반감을 갖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나의 자카르타 생활은 시작되었고, 한국어를 지독히 좋아하고 한국을 엄청 사랑하는 학생들을 만나게 되었다. 나의 학생들의 한국 사랑과 한국문화에 관한 지식은 상상을 초월한다. 또한 내가 이들에게 빠져들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그들에겐 외국어인 한국어를 혼자 힘으로 공부하고 터득했다는 것과, 공지사항 한 개 보고 찾아와 한국어 교실 문을 두드렸다는 것이다. 16주간의 길고 힘든 강의를 견뎌내며 내가 제시한 여러 가지 규칙을 지키고 어려운 한국어 숙제와 한국어 시험을 고스란히 감내하고 수료증을 받아가는 그들이 어찌 대견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 학생들은 인도네시아에서 한국어를 자생적으로 받아들인 제 1세대이자 가장 한국어에 길게 노출될 첫 주자들이라 정말 소중하고 중요한 자산이다.
인도네시아에 한국의 문화가 처음 소개된 것은 드라마 ‘대장금’이었고 이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한국의 궁중 음식들은 당시 어린 초등학생들의 입맛을 사로잡았었나보 다. ‘꽃보다 남자’ 속의 이민호를 짝사랑하여 일찍이 그는 인도네시아의 한류 초대 레 젼드가 되었고, 그가 광고하는 커피브랜드만을 마시는 것으로 그에게 경의를 표하는 내가 사랑하는 학생들이다.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한국 드라마 ‘도깨비’에 관하여 질문을 하면 나는 집에 돌아와 그 스토리를 따라잡기 위해 한국 텔레비전에 매달려야 했다. 한국과의 시차 두 시간 때문에 한국에서 드라마가 끝나는 시간까지 기다리다 보면 수면시간이 부족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의 학생들의 쉼없는 한국 드라마 사랑에 부응하려면 극복해야할 나의 기쁜 숙제였다. 가뜩이나 좋아하지 않는 드라마 시청을 여기 인도네시아에서 원 없이 하고 있는 내가 가끔은 우습기도 했다. 직장을 그만 두면서 내가 했던 결심을 위반하는 행동이었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겠다고 결심했었는데, 학생들의 한국드라마에 대한 의욕에 번번이 이 조항을 무너뜨리곤 한다. 다시 결심하면 되니까 지금은 잠시 해제의 기간이다. 하기 싫은 일도 때로는 할 필요가 있다고.
그나마 드라마는 내가 극복하기 쉬운 장르였다. K-POP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나 의 학생들 때문에 나는 밤마다 U-Tube에서 온갖 걸, 보이 그룹을 검색해야 했고, 순간순간 그들의 예상치 못한 질문에 제대로 답할지 걱정하느라 밤잠을 설치곤 했다. 이것은 한국어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가 갖는 정체성에서 나타나는 세대차도 함께 극복해야 하는 어려움이다. 이 부분은 늘 학생들에게 미안함을 안고 있다. 조금 더 직장을 빨리 그만 두었어야 했다. 그리고 이곳에 좀 더 빨리 달려왔어야 했다.
한국어 수업보다는 한국문화 수업에 흥이 넘치는 학생들을 보며 한국어 수업과 한국문화 수업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나름의 타협과 설득으로 학생들과의 생활을 즐겁게 하였다. 10년 전의 소녀시대는 ‘Girls Generation’으로 해외 공연을 하였지만 방단소년단은 한글이름 ‘BTS’로 활동하는 것을 보면 한글의 세계무대로의 확장성에 놀라고 국외에서 한글과 한국에 대한 그 관심과 이해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인도네시아의 젊은이들도 일조하고 있다.
국외에 사는 동안 현지어를 열심히 하겠다는 각오는 비단 나만의 경우는 아니다. 다 비슷한 생각들을 하고 있겠지만 김 여사의 꿈은 더 장대했다. 빨리 인니어를 터득하여 현지 텔레비전 방송국에 출연하겠다는 황망한 꿈이었다. 그러나 매일 밤마다 한국드라마 시청의무를 학생들로부터 부여받은 것은 물론 보이그룹의 인원 수 확인에서부터 멤버들의 이름 외우기까지, 학생들의 한국어 실력과 나의 현지어 실력은 정비례 하고 있었다. 현지 텔레비전 채널들은 진작에 팽개쳐졌다. 물론 허황된 나의 꿈이 실현되기는 힘들거라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포기할 수 있을지 예상하지 못했고, 적절한 변명까지 달아 나의 게으름에 스스로 면죄부를 받았다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학기의 운영이 한국의 대학과 거의 비슷하게 운영되는 이곳에도 여름, 겨울 두 번, 두 달간 씩 방학이 주어진다. 나는 방학이 되면 살짝 우울증이 생긴다. 물론 인도네시아 여러 여행지를 돌아다니며 휴가도 즐기고 문화체험도 하지만 나의 한국어 반 학생들을 잠시간 못 만나는 것이 약간 슬프기도 하기 때문이다. 워낙 사회관계망 서비스가 발달된 현재에 사는 우리들이라 늘 사진을 앞세워 방학 중에도 근황을 주고받지만 그래도 얼굴을 맞대고 있지 않을 때 그리움이 커지나보다. 어차피 방학은 한국어 쓰기 능력 향상 시간이다. 내 문자에 반드시 답을 해야 하는 법칙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다수 내 학생들은 코멘트를 달아준다. 가끔은 보고 싶다고도 하고, 사랑한다고도 하며 맞춤법 틀린 문자를 보내오지만 모든 게 다 귀엽고 예쁘다.
내가 이 나라에 진정 봉사를 왔는지에 관하여 의구심이 들 때가 종종 있다. 마음의 빚이 많기 때문이다. 나의 학생들을 통해 우리나라의 현 주소를 확인한다. 한국어와 한국문화가 어디까지 와 있는지, 그 열기가 어느 정도인지 눈으로 가슴으로 느낀다. 스승의 날에는 한국어 노래를 들려준다. 어버이날에는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아준다. 눈만 마주치면 사진찍자고 한다. 내 학생들뿐만이 아니라 대다수 교직원들과 대학교 학생들이 그런다. 가끔은 내가 조금만 더 젊었을 때 왔어야 했다고 후회한다. 직장을 너무 늦게 그만 둔 것을 또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렇게 더운 날, 집 얻을 때 같이 동행해 주고, 집세를 깎아 달라고 나대신 떼를 써 준 그들, 내가 그랍 기사들에게 부당한 일을 당했다고 말하면 그 회사에 전화해서 따져주고, 흑기사, 백기사, 다 자처하여 나를 돌봐주는 학생들. 이 학생들이 지금 내게 봉사를 하고 있다. 아무 대가도 없이 어떤 바람도 없이 그저 한국이 좋아서, 한글이 좋고 한국문화와 사랑에 빠져서, 나이 든 김 여사에게 무한한 사랑을 쏟아 붓는다.
새로 학기가 시작될 때마다 몰려드는 한국어반 지원자들을 다 수용하지 못하고 돌려보내며 또 다른 경쟁 속으로 몰아넣을 때 많이 힘들다. 그들은 그저 한국어가 좋고, 한국문화가 좋아서 기회를 얻고자 했을 뿐인데, 그 기회를 다 주지 못하는 우리 나라가, 내가 조금은 원망스럽다. 미안 합니다 여러분. 집에서 한국어 열심히 하라고 독려하는 것 밖에 방법이 없을 때 나의 미력이 느껴진다. 뭔가를 줄 수 있을 거라 확신하고 도착했던 이 땅에서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다. 어린 학생들에게서 오히려 순수한 도움이 무엇인지 전수받는 기회를 얻었고, 대한민국을 향한 그들의 깊은 관심에 편승하여 사랑도 두둑이 받았다. 봉사는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것이지 한 쪽에서 일방 지원하는 것은 아니라고 확신한다. 나와 우리 학생 들이 같이 성장하는 모습에 서로 반했다고 고백을 한다.
회사를 그만 두면서 많은 호칭을 부여받았었다. 동네에 남아는 아줌마 동남아 김 여사일 때도 있었다. 자동차라도 잘못 파킹시키면 레젼드 김 여사로 손가락질 당하기도 하였다. 내가 한 일은 귀결이 김 여사로 끝났다. 천덕꾸러기 김 여사였다. 봉사 활동을 떠날 때도 남편을 제외한 모든 주변 친인척과 지인들이 ‘가족에게 먼저 봉사해야지 어딜 가느냐?’ 폭탄 김 여사였다. 이곳에 도착해서 만나는 한국 분들도 비슷한 반응이다. 무대책 김 여사, 학생들에게는 멋진 김 여사로 나의 외치는 끝없이 변화와 변신을 하였다. 그들의 평가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 수긍하는 인정 김 여사가 되었다 세상은 자신의 눈으로만 바라볼 수 있으니까요.
오늘 밤 같이 성장하는 우리 서로 건배할까요? 건배사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위하여!!!’
입니다
*** 수상소감
젊은 시절에는 이름으로 호명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직급’명이나 회사에서의 위치를 나타내는 호칭으로 불렸다. 그 마저도 내려놓으니 덜컥 ‘김 여사’가 되었다.
개인 신상에 관한 군더더기를 빼버린 느낌이라 홀가분하지만 잉여인간인 된 듯한 ‘무안함’도 걸쳐져 있다. 동네에 남아도는 김 여사들을 굳이 구분을 하기 위해 그 앞에는 늘 다양한 형용사가 붙는다. 이 또한 살짝 긁어내리는 듯한 것들이다. 뭔가 어설픈 행동을 했을 때, 외모적인, 성격적인 특성을 꼬집어 붙이기 일쑤다. 나는 듣기만 하지 정작 부르지는 않는다. 그나마 나의 소심한 반항이지만 여전히 내 이름은 ‘김 여사’다. 어느덧 귀도 순해졌다.
소확행 김 여사의 무지한 행보가 또 업보가 될까 두렵지만 그간 ‘읽기’를 얼마나 소홀히 했는지 알게 해 준 기회였다.
가냘픈 호흡에 정성껏 산소를 투입해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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