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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우리 동네 골목 / 우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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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작성일 2018-07-19 15:54 조회 9,29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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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산책 12 >
 
우리 동네 골목
 
우병기 / 한국문협인니지부 회원
 
 
아들 녀석 학교문제, 주변 공해문제 등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하여 이사를 하기로 했다. 자카르타에서 이사를 한다는 것은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기에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퇴근 후 아내와 같이 이삿짐 업체에 견적을 내고자 살림살이를 풀어 보았다. 제법 이삿짐이 많았다. 아내는 늘 나한테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다고 투덜거리곤 했는데, 오늘은 웬 짐이 이렇게 많지 하면서 전혀 다른 이유로 투덜댔다. 그동안 이곳에 살면서 사 모은 물건들이 이렇게 많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5년이라는 시간이 짧은 시간은 아닐 것이다. 그동안 아들 녀석도 많이 컸으니......
 
그 녀석이 자라기 위해 필요했던 물건도 많았을 것이다. 아내는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간다고 하니 좋아하는 눈치였다. 나는 사무실이 가까워서 출. 퇴근 시간도 적게 걸리고, 무엇보다도 가끔 아들 녀석과 함께 아내 몰래 즐겨 먹던 우리들만의 사떼(꼬치구이) 맛집이 있는 이 동네를 떠난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결국 이사 날은 왔고 우리가족은 지금 살고 있는 이 동네로 이사를 왔다. 집안 구조가 바뀌니 한동안 잠이 오질 않았다. 전에 살던 집에 비해 천장도 낮은 것 같고, 무엇보다 익숙했던 정사각형 넓은 구조의 거실과 확연히 비교되는 길쭉하면서 좁은 거실이 가장 마음에 안 들었다. 나는 TV를 보거나, 책을 읽는다던가 하는 모든 것을 거실에서 해결했던 사람이라 밝고 넓은 공간을 선호하는 편인데, 좁고 길쭉한 새집 거실은 마치 어두침침한 동굴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답답한 느낌을 주었다. 더욱이 거실 맞은편에 버티고 있는 이슬람 사원의 스피커가 우리 집 거실과 나란히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미 이슬람 사원에서 흘러나오는 아잔(기도) 소리에는 많이 익숙해진 상태지만, 겨우 몇십 미터 떨어진 거실 맞은편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그동안 내가 듣던 소리와는 차원이 달랐다. 이 동네는 내가 좋아할 수 없는 동네가 될 것 같았다.
 
 
 
며칠 후 나는 이집의 좋은 점을 하나 발견했다. 빗소리와 천둥소리가 생각보다 적게 들린다는 것이다. 이전 집에 비해 확연하게 방음이 잘되는 것 같았다. 맞은편 이슬람 사원에서 들리는 아잔 소리도 창문을 닫으면 크게 신경이 쓰일 정도로 들리지는 않았다.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가 밤새도록 퍼부은 다음날, 정말 날씨 하나로 기분 좋아지는 화창한 일요일 아침이었다. 나는 문득 동네 한 바퀴를 돌고 싶어져서 아내에게는 이발을 하고 오겠다며 슬며시 혼자 집밖을 나와 걷기 시작했다. 조금 걷다 보니, 하수도인지 냇물인지 모를 개울 하나가 집 앞을 지나 흐르고 있었다.
 
야자열매 껍질과 바나나 껍질, 비닐봉다리 등이 둥실둥실 떠내려갔다. 냄새가 안 나는걸 보니 하수도는 아니고 강으로 들어가는 작은 개울 줄기의 하나 인 듯 했다. 골목을 돌아서자 제법 큰 골목이 나왔다. 동네 아이들이 시끌벅적 무리를 지어서 이리 저리로 뛰어 다니고 있었다.
 
 
골목 한 구석에서 나시고랭(볶음밥) 아저씨가 나시고랭을 만들기 시작했다. 불에 약이 오를 때로 오른 달궈진 팬에 기름을 넣는다. 그리고는 능숙한 솜씨로 조각난 닭고기를 볶기 시작한다. 한 손으로는 계란 하나를 깨서 볶아지고 있는 닭고기에 넣는다. 그리고는 각종 양념을 투하하기 시작했다. 구수한 나시고랭 냄새가 골목으로 퍼져 나간다. 나 같은 구경꾼들이 하나둘 나시고랭 아저씨 주의로 모이기 시작한다. 잘 쪄낸 밥을 팬 속에 넣을 때쯤 또 하나의 주문이 들어온다. 나시고랭 아저씨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능숙하게 팬과 주걱이 움직인다. 고소한 냄새와 소리가 침샘을 자극한다. 한참을 볶아진 끝에 결국 나시고랭은 고이 종이 봉지에 싸여 주문한 손님에게 넘겨진다. 아침밥 먹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또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시고랭 아저씨를 지나쳐 넓은 골목길로 들어섰다.
 
 
몇몇 동네 사람들이 나를 보고 어색한 인사를 했다. 나도 어색하게 인사를 한다. 아직 이 동네가 익숙하지 않다. 이 동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어쩌면 익숙해지지 않을 수도 있다. 몇 발자국 걸어서 큰 도로 쪽으로 와보니, 동네 청년들이 오토바이 수리점 앞에 옹기종기 모여서 TV를 보고 있었다. 권투시합 중계를 보는 모양이다. 요즘 한국 TV 에서는 잘 안하는 권투 경기 중계이지만 인도네시아에서는 제법 인기 있는 스포츠가 권투라 밤이건 낮이건 여러 TV채널에서 제법 중계를 자주 볼 수 있다. 아마도 최근까지 인도네시아 챔피언으로 오래 동안 사랑을 받고 있는 크리스 존(Chris John)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되었다. 오토바이 수리가게 건너편에 멋들어지게 무지개 색으로 휘황찬란하게 광고판을 걸어놓은 이발소가 보였다. 내가 좋아하는 Noah 밴드의 <di saatkaupergi>가 흘러나왔다. 갑자기 여기서 이발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발소 안으로 들어섰다. 누가 주인이고, 누가 손님인지 모를 현지인 서너 명이 앉아서 노닥거리다가 느닷없이 그들만의 공간에 들이닥친 외국인 아저씨를 일제히 멍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Boleh potong lambut?”(이발 할 수 있을까요?)
라고 나는 겸연쩍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을 꺼냈다. 그 무리들 중에서 가장 나이 들어 보이는 염소 턱수염을 한 사람이 불쑥 앞으로 다가와서는 자리를 안내했다. 그리고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내게 물었다.
 
“Bisa bicara bahasa Indonesia?"(인도네시아 말 할 줄 알아요?)
“Iya"(네)
 
나는 짧게 대답을 했다. 분명히 인도네시아말로 이발하고 싶다고 말했는데.....,
의자에 앉으면서 너무 짧지 않게 잘라 달라고 정중하게 요청을 했다. 그가 웃으며 대답했다.
 
“Siap Boss!"(넵! 알겠습니다. 보스!)
 
 
한국인이 운영하는 이발소보다 다소 시간이 걸렸지만, 생각보다 솜씨가 좋은 이발사다. 25,000루피아에 이 정도면 대성공인 셈이다. 기분이 갑자기 좋아지기 시작했다. 아직 덜 마른 머리도 말릴 겸 이발소 앞 의자에 앉았다. 여전히 아이들이 골목 여기저기서 무리를 지어서 뛰어놀고 있었다. 나시고랭 아저씨는 어느새 넓은 골목으로 진출하였다. 그는 연신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열심히 나시고랭을 볶아대고 있었다. 주위에는 아이들이 여전히 군침을 흘리며 나시고랭이 볶아지는 과정을 구경하고 있었다.
 
할머니 한분이 내 옆에 와서 앉았다. 그리고는 막무가내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자기 이름은 데위 아유(Dewi Ayu)이고, 순다 사람이고 나이는 대략 칠순 정도라고 했다. 그리고는 네덜란드군이 물러나고 일본군이 들어왔고, 게릴라들이 일본군과 싸웠다고 하셨다. 일본군은 몇 년 못가서 일본으로 도망을 갔고, 다시 네덜란드 군인들이 들어왔다고 하셨다. 네덜란드 군인 돌아오자 게릴라들도 다시 돌아와서 네덜란드 군인들과 전쟁을 했고, 그 전쟁에서 승리해서 인도네시아 공화국인 탄생되었다는 이야기를 한참 하셨다. 어느 정도 이야기가 마무리 되어가자 기침을 한번 하더니, 라이터를 나에게 들이대면서 담배 있냐고 물으셨다. 내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눈을 껌뻑 껌뻑 거리더니, 그러면 담배 한 개비만 달라고 하신다. 나는 할머니께 잠깐만 여기서 기다리라고 하고는 앞에 있는 구멍가게에 가서 삼포르나 담배 한 갑을 사서 드렸다. 할머니는 담배 한 개비를 빼시고는 입술을 모았다. 그리고는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남은 담뱃갑을 나에게 다시 돌려 주었다. 나는 다 피시라고 가져가도 좋다고 했더니, 처음 보는 외국인한테 염치없이 다 받을 수 없다고 하면서 두 개비만 가지고 담배 연기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할머니 떠난 자리에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남녀 무리 대 여섯 명이 구멍가게에서 나오면서 내 눈치를 요리조리 보더니 내 옆자리에 몰려와 앉았다. 그리고는 장난을 치고 떠들기 시작했다. 점점 엄청나게 요란스러운 몸짓과 거침없는 소리를 내며 떠들다가는 다시 내 눈치를 슬금슬금 보더니 자리에서 떠나갔다. 그리곤 조금 전까지 할머니가 떠난 자리에 놓여있던 담뱃갑도 사라졌다.
 
 
 
나는 구멍가게로 다시 들어갔다. 그리고는 메그넘 클래식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서 물고는 집으로 향했다. 나시고랭의 유혹을 견디어 내면서 나시고랭 아저씨를 지나쳤다. 먹고는 싶었지만 길거리에서 파는 불량식품 먹지 말라는 아내의 잔소리를 이겨낼 자신이 없어서 미련 없이 포기를 했다.
조그만 아이들이 떼 지어 내 옆을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는 나를 향해 소리쳤다.
 
“Mister. Hati-hati!”(미스터, 조심하세요!)
“Apa?"(뭘)
 
그때 우리 집 방향 쪽에서 천천히 걸어 오고 있는 키 작고 삐쩍 마른 청년이 눈에 들어 왔다. 걷는 모습이 정상인 같지 않았다.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비틀 거리며 천천히 내가 있는 방향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먹던 아이스크림을 아래로 내렸다. 그가 내 앞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는 뚫어져라 내 아이스크림을 쳐다보았다.
 
“Ini mau?"(이거 먹을래?)
 
나는 미소를 지으며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그 청년은 씩 웃더니, 손을 내밀었다. 아이스크림이 아깝다던가, 내가 먹던 건데 더러울 텐데 하는 생각보다는 안 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우선적으로 머리를 스쳤다. 그는 아이스크림을 받아 들고는 그가 왔던 방향으로 다시 천천히 비틀비틀 돌아갔다.
 
“Siapa dia?"(저 사람은 누구야?)
 
나는 돌아서서 내 뒤에서 이 모든 사항을 지켜보던 아이들을 향해 물었다. 그중에서 제일 당돌해 보이는 사내 녀석이 말하기를 저 사람은 몇 달 전에 Kuntil anak(처녀귀신)을 만나고 난 다음부터 저 상태가 되었다고 했다. 오늘 Mister는 운이 좋은 거라고도 했다. 보통은 남자를 보면 뽀뽀를 하려고 달려든다고 했다. 다행히 오늘 저 청년은 아이스크림이 더 땡겨서 Mister 입술에 피해를 안 준 것이라고 그 당돌한 녀석이 말하자, 주위의 모든 아이들이 왁자지껄 한바탕 웃어댔다. 그리고는 쏜살같이 떼를 지어서 그 청년이 사라진 방향으로 다시 뛰어들 갔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만지고 있었다.
 
그가 향한 방향과 집 방향이 같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집으로 걸어갔다. 다행히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그 청년을 다시 만나지는 않았다. 집에 도착하여 집 초인종을 누르자 안에서 아내의 시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발하러 간다고 나간 사람이 뭐하다 이제 오는 거야!” 하면서 문이 열렸다.
 
나는 잽싸게 검은 봉다리를 들어서 아내에게 보여 주었다.
“메그넘. 클래식 먹을래? 초콜릿 먹을래?”
아내는 “초콜릿“ 하면서 봉다리를 잡아챘다.
“그거 내 입술과 바꿀 뻔한 아이스크림이야. 맛나게 드셔.”
 
아내는 “뭔 소리야” 하면서 아들 녀석 이름을 크게 부르면서 아빠가 사 온 아이스크림 먹으라 하고 아들 녀석 방문을 크게 한번 치고는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들 녀석은 쪼르로 달려 나오면서 아이스크림 하나를 잽싸게 집어 들고는 다시 나왔던 방안으로 쌩하고 들어가 버렸다.
 
“준우야! 나와서 같이 먹자!” 나는 닫혀버린 아들 방문을 향해 외쳤다.
“아니야 아빠. 나 지금 되게 바빠. 미안해.”
 
나는 몇 일전에 친구 녀석에게 강제로 빼앗은 토라자 커피를 한잔 만들어 마셨다. 그리고는 거실 소파에 누워 <호랑이 남자>라는 인도네시아 작가가 쓴 책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어떻게 그 찰나의 순간에 아이스크림이 든 봉다리를 뒤로 숨길 생각을 했을까? 몇 번을 다시 생각해도 정말 빠르고 멋진 판단력이었다.
 
거실 창 밖 이슬람 사원에서 정오의 아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커튼 사이로 밝은 빛이 들어와 우리 집 거실을 밝게 비쳐 주었다. 아내가 준비하는 맛있는 점심식사 냄새가 나시고랭의 고소한 냄새를 내 머릿속에서 지우고 있었다. 새로 이사온 동네에 대한 알 수 없는 야릇한 끌림에 동요되었던 어느 휴일 날, 나에게 인도네시아 삶의 또 한 부분을 채워 줄 이 동네 생활도 나름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 우병기 /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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