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자유와 평화의 꿈을 실현한 사람들 / 서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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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작성일 2018-10-11 16:56 조회 7,230 댓글 0본문
< 수필산책 24 >
자유와 평화의 꿈을 실현한 사람들
서미숙 / 한국문협 인니지부 회장 (수필가, 시인)
얼마 전 시청자들의 아쉬움 속에 대단원의 막을 내린 TVN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을 아주 감동 깊게 보았다. 구한말 시대를 배경으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라를 지키다 불꽃처럼 살다 간 사람들의 이야기다. 떠나와 살고 있는 환경 탓일까? 두고 온 기억들에 대한 향수 때문일까? 나는 이 드라마를 보며 너무나 가슴이 절절했다. 젊은 시절 한국에 살 때와는 달리 고국을 향한 뜨거운 마음은 더욱 커지는 것만 같다. 오랜 세월 타국에서 살다 보니 무엇보다 국가관이 뚜렷해져 저절로 애국자가 되는 느낌이다. 지난 8월 잠시 한국에 머물고 있었는데 서울의 거리 곳곳에는 다가올 8.15 광복절을 기념하기 위한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모처럼 한국에서 맞이하는 광복절이기에 마음이 향하는 곳으로 뜻깊은 발걸음을 해보기로 했다.
오래전부터 한번 가보고 싶었던 곳, 서울 서대문에 위치한 독립공원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찾았다. 독립과 민주화운동의 현장이기도 한 이곳은 자유와 평화의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수많은 애국지사가 고초를 겪었던 곳이다. 마침 애국지사들의 항일투쟁과 독립을 기념하는 독립 민주 축제가 한창이었다.
개화운동의 선구자이며 독립운동가인 송재 서재필 선생에 의해 세워진 독립문이 우뚝 서있다. 최근 한류의 바람을 타고 세계적으로 도약하는 우리나라의 위대함을 상징하듯 단단한 벽돌의 독립문이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독립문 안으로 들어가 쭉 올라가면 빨간 벽돌로 길게 뻗어있는 서대문 형무소 건물이 보인다. 지금은 전체가 역사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붉은색의 그다지 높지 않은 건물들이 여러 개로 나뉘어 자리하고 있었는데 초록의 나무들로 가려진 건물들은 유난히 담벼락이 높았다. 일제 강점기에 핍박받던 형무소였다는 것을 실감하게 하였다.
서대문 형무소의 제일 큰 건물인 중앙사는 옥사 전체를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하여 다른 건물의 옥사와 연결되어 있었다. 1923년에 지어진 건물이고 형무소였다는 선입견 때문인지 스산한 바람이 스쳐 지나간다. 이곳 서대문 형무소는 일제강점기까지는 주로 독립 운동가들이, 해방 이후에는 민주화 운동가들이 수감되어 모진 고문과 고통을 겪었던 곳이다. 광복절인 오늘은 독립 민주 축제에 참가하기 위하여 모인 학생들과 부모, 그리고 학교단위로 온 단체 학생들이 많았다. 순국선열의 나라사랑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서 열심히 보고 들으며 메모를 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중앙사 전시관에는 애국지사들의 옥중생활을 알 수 있는 일기와 편지 등이 소개되었다.
<상록수>를 쓴 소설가 심훈의 일기가 눈에 띄었다. 서대문 형무소의 높은 문은 개선문과도 같다고 표현했다. 그만큼 담담했던 심훈도 한 달간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곳이다.
‘벽돌담은 화로 속처럼 달고 방 속에는 오물통이 끓는데, 빈대며 벼룩이 다투어가며 살의 진물을 살살 뜯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애국지사들의 눈빛은 샛별처럼 빛났다고 쓰여 있다.
그분들의 고귀한 희생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지금처럼 평화롭고 자유로운 시대를 살아갈 수 있었을까? 그동안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조차도 진정으로 마음을 담지 못했음이 새삼 부끄러웠다. 일제강점기에 경성 ‘감옥’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유명을 달리한 이 곳, 서대문형무소의 거대한 옥사 앞에서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일제가 이곳에 근대식 감옥을 세우게 된 계기는 그 당시 서대문이 정치와 교통의 중심지로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억압과 공포의 상징인 감옥을 통해 식민지인 조선이 일본에 대한 복종을 강요했는지도 모른다. 일제의 침략에 맞서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애국지사들이 지속적으로 늘어나자 일제는 1912년 서대문 감옥에서 1923년 서대문형무소로 명칭을 바꾸어 그 규모를 확장했다. 그러고도 모자라 일제는 우리나라 각 지역의 주요 거점 도시 곳곳에 감옥을 설치하여 우리 민족에게 공포심을 조장하였다. 아마도 나라 전체가 감옥화 되기를 그들은 바랐던 것은 아니었을까. 순간적으로 마음 깊은 곳에서 울분이 치솟았다.
무단통치의 식민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으로 시작된 3.1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서울에서 시작하여 전국으로 펴졌고 해외까지도 이어졌다고 한다. 처음에는 태극기를 흔들며 외치는 비폭력 만세운동이었지만, 일제가 무력으로 진압을 하였기에 무기를 들고 치열하게 맞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이때 수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어 그때의 서대문형무소의 수감인원은 3천 명에 육박하였다고 하니 거족적인 민족운동의 생생한 현장이 아닐 수 없다. 이를 계기로 1919년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하게 되었고 중국에서는 5.4 운동, 인도의 비폭력 독립운동 및 이집트. 터키 등지의 민족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나도 만약 그 시절에 존재해 지금처럼 해외에 살았더라면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미스터 선샤인의 주인공인 김태리까지는 아니더라도 글의 힘을 빌려 조국을 위해 미력한 힘이라도 보탰을 텐데... 하는 허망한 생각마저 든다. 그래서인지 일제는 민족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1938년부터 한국어를 쓰지 못하게 하였다. <조선어학회>라는 애국단체는 한글 보급을 통해 민족의식을 잃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중 조선어학회 회원인 정태진 선생이 일제에 발각되어 조선어학회는 강도 높은 탄압을 받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최현배, 이극로 등 33명이 서대문형무소에서 모진 고문과 옥고를 치르게 되었고 결국 함흥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그분들의 희생으로 우리는 지금 이렇게 한글을 마음껏 쓸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려온다.
서대문 형무소 보안과 건물 지하에는 주로 독립 운동가들을 취조하던 곳으로 취조 과정에 심한 고문이 이루어졌다. 지독한 고문과 인권탄압이 벌어지던 곳, 그때의 건물을 돌아보았다.
수감자들은 이곳을 지하고문실 또는 지옥의 계호계라고 불렀다고 하니 다시 한번 일본 제국주의의 잔인함에 치가 떨렸다. 1923년에 지어진 사형장은 1987년 서울구치소가 이전할 때까지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민주화 운동가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곳이다.
사형장에는 비록 죽음을 앞두었지만 당당한 애국지사들의 외침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의 모티브가 되었던 그분들의 아픔과 독립을 향한 강한의지를 되돌아보게 한다. 자유와 평화의 꿈을 뒤로 한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수많은 독립운동가들...
아직도 그 슬픔을 알고 있을 것 같은 통곡의 미루나무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사형장 담장 안팎에는 두 그루의 미루나무가 있는데 둘 다 사형장을 짓던 시기에 함께 심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담장 안쪽의 미루나무는 애국지사들의 한이 서려서 잘 자라지 못했다는 비화가 전해진다. 담장 밖의 미루나무는 조국의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야 했던 애국지사들의 원통한 눈물이 배어있다고 해서 일명 <통곡의 미루나무>라고도 불리운다.
그 설움과 한을 어찌 자연인 나무인들 외면할 수 있었으랴.
특히 이곳 서대문형무소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곳은 여옥사(여자 옥사)라는 곳인데 1992년 서대문 독립공원 조성 당시 옥사 터가 발굴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일제는 늘어나는 여성 독립 운동가를 수감하기 위하여 1918년 무렵 여옥사를 지었다. 이곳에는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유관순 열사가 투옥되어 1920년 9월에 옥사, 순국하였던 곳이다.
여성 애국지사들의 독립의 꿈과 한이 서린 곳이라고 생각하니 발길이 떨어지질 않는다.
같은 여성으로서 그들이 견디었던 고통에 가슴이 아팠다. 우리나라를 잘 지켜주어서 진심으로 고맙고 감사하다고 어느새 물기어린 내 눈이 말하고 있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해외에서도 독립된 모국을 갖고 잘살고 있는 것은 모두가 이분들의 희생 때문이라고...
자유와 평화의 꿈을 뒤로한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한 순국선열들의 얼과 혼을 기리는 추모비 앞에 섰다. 손병희, 한용운, 유관순 등 모두 합쳐 195명의 순국선열들의 추모탑이 청명한 하늘과 마주하고 있었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디엔가 우물이 숨어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 조국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의 모티브가 되었던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아낌없이 몸을 던져 청춘을 희생했던 순결한 영혼이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내가 한국에서 살고 있는 아파트가 바로 독립문과 마주해 있어서 그분들의 얼이 가까이 있다는 것은 크나큰 기쁨이고 영광이다. 그런 상념에 젖어 쓸쓸히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분들의 업적으로 더욱 빛나는 달빛이 거리 곳곳을 환하게 비춰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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