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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30) 비움의 미학 / 서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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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7,584회 작성일 2018-11-22 11:03

본문

< 수필산책 30 >
 
비움의 미학
 
서미숙 / 수필가, 시인(한국문협 인니지부 회장)
 
 
하늘이 회색 빛으로 짙어지는 해질녘의 오후에 FM에 주파수를 맞추어 놓고 듣고있으면 마음이 평온해지고 나른한 행복감에 젖는다. 전파를 타고 전해져오는 감성을 적시는 멜로디가 가슴을 아리게 한다. 아름다운 음악은 마음을 정화시키는 마력이 있는 것 같다. 나긋나긋한 방송진행자의 이야기 중에 재미있는 한 구절이 유난히 가슴에 와 닿는다.
 
오래전,영국에서 미적 감각이 뛰어나기로 유명한 어느 공작이 재계에서 이름난 부호의 초대를 받고 그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 부호는 공작에게 찬사를 듣기위해 온 집안을 유럽의 고급가구와 장식들로 가득차게 치장을 했다. 거실과 침실 및 창문의 커튼, 조명 하나하나까지 신경을 써서 화려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드디어 공작이 부호의 집에 도착하여 집안곳곳을 이리저리 둘러보고도 고개만 끄덕일 뿐, 정작 찬사를 기다리는 부호에게는 그저 미소만 지을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식사 대접을 받고도 묵묵히 앉아있던 공작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집안이 너무나 화려하고 많은 것으로 채워져 있군요, 조금비어있는 여백의 공간도 있었더라면 더욱 아름다웠을 것입니다.”공작은 이 한마디를 남긴 채 감사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문득 방송 진행자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의 주변과 안팎을 돌아보면 비우고 정리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은 것 같다. 먼저 우리의 내면에 가득 채워져 있는 불필요한 생각들과 인성의 이끼 같은 것들은 과감히 내려놓아야 하는데 잘 되질 않는다. 소유하고 있는 물건도 마찬가지다.집안 곳곳을 차지하고 있는 가구와 가득 쌓여있는 가재도구들과 꼭 필요한 것인지도 알 수없는 집안 곳곳의 꾸러미들은 자꾸 늘어만 간다. 그러고도 또 무언가를 채우기 위하여 우리는 매일 사들이느라 시간을 소비한다.
 
어쩌면 우리는 살아오면서 지식이든 물건이든 어느 것 하나라도 더 얻고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입식 교육만 받아왔다는 생각을 해본다. 한 번도 내려놓고 비워내야 하는 교육법은 제대로 배워보지 못한 것 같다는 아쉬운 생각에 머문다. 그렇기에 우리는 비우는 법을 터득하려고 무수히 많은 종교에 의지하고 정신수양도 하며 애를 쓰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인생에서 내려놓아야 할 것들은 얼마나 많은가? 돈이나 물질, 권력 같은 사사로운 욕심부터 질투와 불만과 이기주의 등 모든 종류의 부정적인 생각은 다 내다 버려야하건만 그것을 깨닫기까지 평생을 소비하며 어쩌면 너무나 오랜 세월이 걸린다.
 
 
 
우리는 누구보다도 바쁘고 열정적인 삶을 살고 있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을 비우고 생각 내려놓는 법을 터득하기위하여 부단히 노력 중인지도 모른다.나 또한 마음을 담아놓은 세월의 찌꺼기들을 비우고 싶다는 생각에 시간만 나면 집안 곳곳에 쌓여있는 물건들을 버리고 또 버린다. 우리 모두는 어쩔 수없는 인간이기에 눈만 뜨면 생겨나는 탐욕은 잠시라도 방심의 틈을 주면 또 다시 무언가를 채우기 위해 노력한다. 의지대로 할수없는 욕심 때문에 사람들의 창고는 언제나 넘쳐나는지 모르겠다. 가령, 유명 백화점에서 세일 행사라도 있는 날이면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그 많은 사람들의 손에는 저마다 쇼핑백에 새로 산 물건들이 가득 들려있다.
집에 가져와보면 그다지 급한 것도 아닌 별로 필요한 것도 아니건만 여전히 새것에 새로운 물품에 연연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아직도 비우는 법을 익히지 못하고 날마다 새로운 내면의 탐심에 저항만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내 책상에는 언제부터인가 비우는 법을 새롭게 깨우쳐주는 법정스님의 <무소유>라는 책이 꽂혀 있어 시간만나면 꺼내어 읽는 중이다.
 
 
 
‘일상에서 소용되는 그 많은 물건들, 그것이 없어서는 안 될 정도로 꼭 필요한 것들일까?
살펴볼수록 없어도 좋은 것들이 적지 않다.’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자랑거리도 되지만
그만큼 세상사에 많이 얽혀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법정스님의<무소유>중에서도 나는 이 글귀를 무척 좋아한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내 삶의 지침서가 될 만큼 무소유의 삶은 늘 내 마음속 동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법정스님의 말씀 언저리에 도달하려면 아직도 까마득하다. 그만큼 세상 때를 벗지 못하고 있음을 통감한다. 또 하나, 의미는 다르겠지만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진심으로 존경스럽다. 신체적인 비움의 의식을 치르고 있는 것 같아 경이롭기까지 하다. 때로는 종교 의식으로 며칠간 금식을 하는 사람들도 종종 본다. 몸에 쌓여있는 노폐물을 다 체외로 내보내고 깨끗하게 내면을 비운 후의 경이로움, 그런 신체적 비움의 의식은 누구라도 한번쯤은 건강한 신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것 같다.
 
 
지금 지상에서는 계절이 바뀌고 있다. 이곳 인도네시아는 건기에서 우기로 옮겨 가느라 하늘에서는 때 아닌 번개와 천둥을 동반하고 비 폭풍을 쏟아내며 한바탕 홍역을 치르고 있다.
한국의 계절도 떠나가는 가을이 마지막 잎새를 휘날리며 쉽게 비워내지 못하고 다가오는 겨울을 무겁게 맞이하고 있다. 가을과 겨울의 문턱에서 11월의 오묘한 기운이 교차한다. 나는 한바탕 서울집의 옷장을 정리해본다. 가벼운 옷들은 옷장 깊숙이 집어넣고 따뜻한 옷들로 꺼내 놓았다.
구석구석에 포개어 있던 옷들도 다시 꺼내어 입을 것은 입고 입지 않을 것은 버리고 정리한다.
부엌의 싱크대 물건들도 모두 꺼내어 반드시 필요한 것과 필요치 않은 것들을 구별해 놓았다.
거실 탁자에 있는 이런 저런 월간지와 신문들도 앞으로는 한두 가지로 줄여볼 것이라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내 마음 안에 있는 깊이 뿌리내린 끝없는 채움의 열망을 올해가 가기 전에 차근차근 파헤쳐보고 정리해보려고 다짐한다. 비어있는 곳에는 청정한 아름다움이 있다. 그곳에는 무거운 짐도 없고 자유로움과 채우기 위한 기다림이 있기 때문이다. 여백이 있어서 편안히 숨을 쉴 수 있는 곳, 행복을 나누는 마음이 있는 곳, 비움의 행복이고 곧 여백이리라. 아직도 우리의 삶에는 많은 사람들이 욕심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법정스님이 남기신 심오한 비움의 미학인 무소유의 향(香)을 살아가는 동안 수시로 깨달을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비움의 미학으로 물들었던 어느 날의 오후는 그렇게 어둠이 내리고 한아름 별빛이 다가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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