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신작로와 잃어버린 시그널 / 김준규 > 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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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47) 신작로와 잃어버린 시그널 / 김준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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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6,806회 작성일 2019-03-19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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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산책 47 >

          신작로와 잃어버린 시그널            
 
김준규 / 시인, 한국문협 인니지부 운영위원
 

그 시절의 신작로는 양쪽에 콩밭과 감자밭이 펼쳐져 있고 초록바다가 모세의 기적처럼 갈라진 누런 흙과 자갈길이 뻗어가다가 소나무 숲을 한참 지나 산등선이 가위처럼 겹쳐지는 소실점과 맞닿아 있었다. 비탈 위에 위태롭게 끌려오던 혼미한 시대, 우유빛 안개에 가려진 암울한 미래의 갈피에서 답보된 시간은 지루하게 흘러가고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 또래 친구들이 만화책을 즐겨 읽곤 할 때 나는 엉뚱하게도 문학서적을 들고 신작로를 거닐며 유년시절을 보냈다.

아침햇살을 받고 차창으로 반짝이는 시골버스의 괴기스러운 엔진 소리에 열리는 하루의 빗장, 재잘거리는 갈래머리 참새들과 읍내 장에 내다 팔 자질구레한 농산품을 머리에 이고 몰려드는 아낙네들의 아우성에 새벽 잠을 깬 신작로는 그렇듯 달무리가 되어 마을의 기쁜 일과 궂은 일을 길다란 가슴으로 끌어안고 있었다. 이른 봄부터 늦은 가을까지 길가에 꽃을 피워 사랑을 배양하고, 나이가 들어 쇄락한 이들이 죽어 꽃상여를 타고 먼 길을 갈 때는 숙연하게 길을 열어 주기도 했다. 
 
가난이 원죄처럼 따라붙던 시절, 길가의 바짝 마른 풀잎도 애처롭게 덜컹거리며 낡은 버스가 지나간 뒤 을씨년스러운 먼지 바람이 허접한 옷 소매의 틈새에 끼어들면 시나브로 서럽고 배고픔 앞에 자존심은 사치의 유물이었던 때도 있었다. 녹색의 혈기를 뿜어내던 나뭇잎들의 화려한 군무가 시작되고 한 바탕 장마로 홍역을 치르던 신작로는 군데군데 물이 고인 웅덩이가 생겨났다.
 
 
버스가 훌치고 간 길가에 흙탕 물을 뒤집어 쓴 코스모스의 비애가 상처로 아물 때, 물 웅덩이는 서서히 마르고 대나무의 마디처럼 굳어진 땅에 가냘픈 꽃잎들은 다투어 피기 시작한다. 누군가 심고 가꾸지 않아도 꽃은 혼자 나고 피었다가 떠날 때를 알고 있는듯 푸른 하늘은 구름을 벗고 내려와 거울처럼 기다리고 귓불에 다가와 부는 바람은 지난 여름의 아픔을 잊게 했을 것이다.
 
삶의 퍼즐을 실어 나르는 신작로는 혈맥처럼 늘 열려 있었다. 바람은 사계절을 데려와 물감을 풀어내듯 산과 들을 물 들이고 발 달린 들 짐승들이 올라와 어슬렁거리며 지나가는가 하면 날개 달린 새 들도 가끔은 비행선처럼 내려 앉는다. 바다 위에 내려진 갈라파고스 섬처럼 어머니와 단둘이 지내던 풀이 무성한 외딴집의 적막함, 원시인이 막대기로 그어 논 영역처럼 흙으로 대충 쌓아 올린 울타리는 두 칸 자리 오두막을 삥 둘러싸고 이영으로 덥힌 지붕은 세월의 무게로 켜켜이 쌓여 정체된 시간을 짓누르고 있었다. 가끔은 하늘에서 고막을 울리는 문명의 굉음이 정적을 깨고 물감처럼 파란 하늘엔 은빛 제트기가 흰 꼬리를 달고 잡히지 않는 꿈처럼 멀리 사라지곤 했다. 사이클을 찾지 못한 트랜지스타 라디오의 주파수인양 뒷간에서 날아온 똥 파리는 마루 끝에 앉아 윙윙대고 손바닥을 싹싹 비비며 읍조리는 굴욕의 늪, 그렇듯 무기력과 고독의 시간들은 우리를 비켜가지 않았다. 

마당 끝에 얼굴을 갸우뚱하고 울긋불긋 피어나 짧은 일생을 마치고 떠나갈 백일홍의 눈빛이 숨 막히는 외로움을 아랑곳 할 수 있었을까?  젊음으로 날고 싶은 마음은 무참히 대답 없는 먼 우주의 미아가 되어 날아가고, 가을이 저물어 가던 어느 날, 하루를 삭히느라 기진한 태양이 마지막 숨을 고를 때 막차의 차창에 반사되는 석양빛이 신작로의 저녁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버스 한 대가 집 앞을 지나가고 차창에서 누군가 손을 흔드는 모습이 까마득히 눈 안에 들어온다. 긴 소매의 하얀 교복을 입은 소녀였다. 어느 행성에서 날아온 신호였던가, 신호가 돌연 끊기지는 않을까? 호기심 속의 소녀는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그녀는 나를 향해 손을 흔들며 아름다운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누구였을까? 윗동네 어딘가에 살고 있거나 분명 그녀는 나를 알고 있을테지만 재빨리 지나가는 버스의 속도감은 순간의 교감을 칼로 베듯 갈라 놓았고, 가슴을 콩닥거리게 했던 공허한 시간들은 어설픈 영상을 꾸며내며 꿈같은 안개 속을 헤엄쳐 다녔다. 팽창의 끝을 향하여 질주하던 열기는 냉기류의 입김을 감당하지 못하고 용암처럼 서서히 수축하고 있을 때 초록바다는 어느새 황금 물결로 출렁이며 듬성듬성 추수하여 쌓아 놓은 벼 단과 콩 더미가 길가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맑은 햇빛에 반짝이던 들국화는 신작로가 인접한 오솔길에 몽글몽글 피어났다. 무수히 쏟아지는 은하수, 허공을 끌어안고 까실한 눈을 비비며 외로운 밤을 토담이던 창가에 국화꽃은 알지 못하는 소녀의 화사한 얼굴을 닮아 있었다.
 
그렇게 가을은 아린 기억만 남기고 낙엽과 함께 포개어져 잊혀져 갔다.  먼 길을 가야하는 철새는 날개죽지의 엘보 근육에 힘을 비축하려는지 한 톨의 떨어진 곡식을 찾아 추수가 끝난 들녘에 분주히 날아들고 구름처럼 시간의 함성이 머물던 신작로에 계절은 어김없이 순환하고 있었다.

그 날도 그녀가 늘 타고 가던 버스는 바람처럼 집 앞을 지나갔고 아쉬운 눈으로 한참을 버스의 뒷 모습만 바라보았다. 손을 흔들어 주던 그 소녀는 어디로 갔을까?
간밤에 무수히 피어난 국화 속에 꼭꼭 숨어 버린 걸까? 허공을 떠돌던 그 시절, 그리움의 시그널은 또 다른 랑데부를 위해 어디론가 끝없는 미로의 여행을 떠날 것이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나는 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이사하게 되었고 열병처럼 짧았던 그 시절, 나의 문학과 사랑은 텅 빈 그 가을의 신작로에 철새가 떨군 깃털처럼 잃어버린 시그널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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