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놋그릇 원앙에 내리는 비 / 전현진 > 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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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116) 놋그릇 원앙에 내리는 비 / 전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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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9,138회 작성일 2020-07-24 10:39

본문

<수필산책 116 >
 
놋그릇 원앙에 내리는 비
 
전현진 / 제4회 적도문학상-성인(수필 부문) 최우수상/㈜인니한국대사상 수상자
 
 
기도 시간을 알리는 확성기 소리에 뒤척이던 몸을 일으켰다. 지난밤, 다래끼 난 눈이 껄끄러워 잠을 통 못 잤다. 며칠간의 이삿짐 정리로 몸은 물먹은 솜뭉치 같은데, 요란한 빗소리가 이불까지 파고들어 기어이 잠을 내쫓았다. 비는 나만 괴롭히는 게 아닌지, 어느 차에선가는 경고음이 소스라치게 울어댔다. 낯선 타국의 비 오는 밤은 내 마음을 흔들어 불안과 두려움, 겁남과 걱정을 끄집어냈다. 남편의 발령은 갑작스러웠고, 발령지는 낯설었으며, 코로나 사태로 입국 절차마저 까다로웠다. 한국의 살림살이를 정리하고, 이삿짐을 바닷길로 먼저 보내고, 강화된 비자 심사로 추가된 서류를 연이어 제출하는 중에도, 이곳에 건너온 후에도, 피로는 가실 줄 몰랐다. 반나절 만에 한겨울에서 한여름이 되어선지, 그간의 긴장이 풀려서인지, 아니면 여행이 아니라는 것 때문인지 마음은 이리저리 널을 뛰었다. 피곤한데 잠은 못 자고 속도 시끄러운데, 그러거나 말거나 아랑곳없이 떠들어대는 빗소리가 얄미웠다. 나의 아침은 게으름뱅이처럼 더디게 왔다.
 
 
몸을 일으킨 김에 부엌으로 나와보니, 뻠반뚜가 설거지해둔 그릇들의 물기가 다 말라 있었다. 건조된 그릇들을 찬장에 넣다가 수저통에 섞여 있는 그녀의 숟가락에서 손이 멈췄다. 실수로 한 데 놓인 것 같긴 한데 어쩐지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한국 숟가락보다 길이가 짧고 얇아서 무딘 칼날 같은 그녀의 숟가락은 낡고 값싸 보였다. 나는 슬그머니 저쪽으로 숟가락을 밀어놓았다. 다시 찬장을 정리하는데 이번에는 얼룩덜룩해진 놋그릇 수저받침대에서 눈이 멈췄다. 언제 이렇게 색을 잃었을까? 이삿짐에 섞여 긴 바닷길을 거쳐 오는 동안 바래진 것인지, 한국에서부터 바랬었던 것인지 모를 놋그릇 원앙 두 마리가 빛을 잃고 포개져있다. 순간, 그 위에 내가 겹쳐졌다. 나는 여기 오느라 지친 것일까, 이전부터 녹슬고 있던 것일까?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이렇게 눈물이 나는 것은 분명 다래끼 때문이리라. 내가 이렇게 울 리가 없다. 원앙을 방울방울 다 적신 후에야 번쩍 정신이 들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서랍장 안쪽에서 놋그릇 수세미를 꺼내어 결을 따라 문지르기 시작했다. 시꺼멓게 떨어지는 가루 속에서 뽀얀 금빛이 올라왔다. 그 자태가 반가워 팔 아픈 줄 모르고 계속 닦고 또 닦았다. 드디어 제 모습을 찾고 색을 뽐내었다. 그래, 원래 이런 모습이었지! 그렇지! 놋끼리 닿는 소리에 잠이 깼는지 작은 아이가 눈을 끔뻑이며 나왔다. 모기에 유난히 민감한 아이는 도착한 지 얼마되지 않아 관자놀이를 물렸다. 그 바람에 한쪽 눈이 퉁퉁 부어 연신 비벼대는 중이었다. 이럴까 싶어 미리 약을 구하던 내게 현지 적응이 필요할 것이라던 소아청소년과 의사의 말이 떠올랐다. 서운하고 무책임하게 들렸던 말, ‘현지 적응’. 무언가 더 확실한 처방을 내려주길 바랐던 나에게는 영 마땅치 않은 대답이었다. 그런데 어젯밤만 해도 뜨기 어렵게 부풀었던 눈이 아침이 되자 제 자리를 찾고 있었다. 병원에 가야 하나 하던 걱정이 저만치 물러났다. 아이는 나보다 빠르게 적응하고 있었다.
 
 
창밖의 새파란 하늘이 우거진 나무를 뚫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날씨가 밖으로 나오라고 성화였다. 아이들도 밖으로 나가자고 난리였다. 그래, 나도 밖으로 나가고 싶어졌다. 나가서 햇볕을 좀 쬐고 싶었다. 그러면 몸과 마음이 바짝 살균되어 걱정과 불안함, ‘싫어’를 웅얼거리는 마음보가 말끔 해질 것 같았다. 기운을 북돋을 때는 잘 먹는 게 제일이라 먹거리도 살 겸, 장바구니를 챙겨 길을 나서기로 했다.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알 수 있었다. 다 다른 말을 쓰는 사람들이었다.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그리고 인도네시아어. 낯설었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그저 나처럼 장을 보러 온 사람들이었다. 그들 곁에 서서 한참 들여다본 바왕붐베이와 바왕뿌띠는 익숙한 양파와 마늘이 맞았다.
손질된 닭 한 마리까지 사서 돌아오는 길 위에 하얀 구름을 앞세운 맑은 하늘이 총총히 마중 나와 있었다. 그리고 현관문에서 범반뚜가 웃으며 장바구니를 받아주었다. 쓰는 말은 달랐지만, 우리는 같은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다.
 
통으로 파는 한 마리를 못 찾고 사 온 토막 난 닭고기라 삼계탕 본연의 모습은 아니었다. 대추와 인삼도 없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푹 고아낸 닭고기를 잘게 찢고, 채소들을 다져 넣은 닭죽 냄새가 온 집안에 퍼졌다. 식사 시간을 피해 다른 방에 들어가 있던 쁨반뚜를 불렀다. 손짓, 발짓, 눈치껏 하는 단어 나열 수준의 대화로 한국 음식을 먹어 본 적이 있냐고, 삼계탕을 아냐고 물었다. 하루에 다섯 번 기도하고 외출할 때엔 히잡을 쓰는 이슬람교도인 그녀는 한국 음식과 한국말을 배우고 싶은데, 먹어본 적은 없다고 했다. 핸드폰으로 삼계탕을 검색해 보여주고, 닭과 양파, 마늘, 소금, 후추 등이 들어갔다는 설명을 하고 먹어보겠는지 물었다. 웃으며 끄덕이는 그녀에게, 삼계탕은 더운 여름에 기운을 북돋고자 먹는 음식이고, 으슬으슬 몸이 아플 때도 먹는다고 덧붙이고 나서, 미리 준비 해 두었던 닭죽 한 그릇을 쟁반에 내어주었다. 그리고 아침에 미뤄두었던 그녀의 숟가락 대신 꽃무늬가 그려진 수저 한 벌을 꺼내어 옆에 가지런히 놓았다.
 
 
한국 밖으로 나와 인도네시아로 왔다는 불안함, 나는 한국인, 너는 인도네시아인이라 나누고 구분하는 생각이 나를 좁은 틀로 밀어 넣고 울렸다. 울음이 번져 스스로 녹을 만들고 빛을 잃게 하고 있었다. 이편과 저편, 나누지 않았으면 괴롭지 않았을 마음이었다. 너와 나, 구분하지 않았으면 상하지 않았을 마음인데 굳이 금을 긋고 있었다. 하늘이 구멍 난 듯 쏟아지던 비는 사실 허해진 내 마음을 채워주려 내린 게 아니었을까. 녹슬어버린 겉모습을 닦아주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반짝이는 본연의 색을 찾으라고 그렇게 크게 울었던 건 아니었을까. 오늘 밤 내리는 굵은 빗줄기는 어제와 다르지 않은데, 내 마음이 변했는지 귓가에 자장가가 들려온다.
 
 
<수상 소감>
 
위로받고 싶었다. 아무도 없는 곳에 왔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다 좋은데답답하고 불안했다. 용기를 얻고 싶었다. 다 똑같다고 나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잘하고 있다고 칭찬하고 싶었다. 잘 하지 않아도 된다고 듣고 싶었다. 충분히 즐기라고 응원 받고 싶었다.말할 데가 없었다.
 
그래서 글을 썼다. 하고 싶은 말을 쓰고 또 썼다. 아무 의미 없는 글이었지만, 어떤 것보다 소중했다. 최대한 많이, 모조리, 한껏, 다 썼다. 종이가 까매졌다.이번 공모전은 출렁이던 내 마음을 달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아무렇게 끄적거린 말들을 모아 제시된 분량만큼 정리했다. 끝없는 나열이 아니라 나누고 버리는 작업이 필요했다. 한참 늦게 공모전을 알게 되어 시간이 아쉬웠다.
 
어디서 그런 배짱이 나왔는지 다듬어지지 않은 채로 뭉뚱그려진 이야기를 제출해버렸다. 나는 최선을 다했지만, 다시 보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그러나 덕분에 마음은 고요해졌다. 감정을 덜어내는 것이 내게는 필요했다. 그 틈으로 인도네시아와 내 삶에 대해 곱씹어볼 수 있었다. 생각할 기회를 얻은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인데, 수상 소식이 날아왔다. 겉도는 마음을 끌어 앉혀주는 것 같았다.
 
충분히 위로 받았고, 용기를 얻었다. 큰 선물을 받아 마냥 기뻤다. 칭찬 들어 기분이 좋다. 애썼다고 다독여주는 것 같았다. 격려에 힘이 났다. 기운이 났다.부족한 글을 읽어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 드린다. 글 쓸 마음을 열어 주신 두 선생님께도 감사드린다. 늘 응원해주시는 부모님과 가족들, 어떤 선택이든 열렬히 지지해주는 남편과 두 팔에 폭 안겨 잠드는 두 아들에게 사랑과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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