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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142) 막걸리 한잔 / 김준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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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7,274회 작성일 2021-01-21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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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산책 142 >
 
막걸리 한잔

 김준규 / 시인 (한국문협 인니지부 운영위원)
 

요즘 티비에서는 트로트 열풍이 한창이다. 그중에서 ‘막걸리 한잔’ 이라는 노래가 많은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지난 가을엔 산행 차 강원도에 놀러 갔다가 영탁이라는 상표의 막걸리를 마시게 되었는데 새로 등장한 트로트 가수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발 빠른 상술이 막걸리의 한자어인 탁주(濁酒)에서 ‘탁’ 자를 소재로 출시한 상품이었다. 막걸리라는 술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 주정 방식으로  찹쌀과 누룩을 적당한 비율로 섞어 뜨뜻한 온돌방에 담요 등으로 감싸두고 일정기간이 지나면 발효와 숙성 과정을 거치면서 완성되는 술이다. 안방의 아랫목에 신주처럼 모셔놓은 술 단지의 술이 거의 익어갈 무렵 방 안엔 그윽한 술 향기가 퍼진다. 맑은 물과 함께 쌀알이 동동 뜨는 술 단지의 맨 위 부분을 맑은술, 혹은 동동주라 하고 동동주를 퍼내고 남은 부분을 고루 섞어 체로 거르면 걸쭉한 막걸리가 된다.
 
 
막걸리는 가격이 저렴하고 마시기도 순하여  많은 계층의 서민들과 여성들에게도 사랑을 받고 있다.  어찌 보면 정 많은 한국인의 문화와 정서에도 잘 어울리는 듯하다. 누리끼리 하게 탁한 색상은 옛 조상들이 즐겨 입던 의복인 광목천의 빛깔과 흡사하고 시큼 떨떠름하며 은근히 톡 쏘는듯한 맛은 독하지도 싱겁지도 않지만 자극적이지 않고 서양의 와인처럼 은은하게 취하여 깊은 맛을 낸다. 주조 방법 또한 복잡하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우리 조상들은 외세의 간섭으로 나라가 위급하고 가난으로 힘들던 시절, 쉽게 술을 담아 서로를 위로하며 즐겨 마시던 술이었던 것 같다.
 
옛날에는 어느 동네를 막론하고 대개 주막이 하나씩 있었다. 손님을 맞이하거나 친구를 만나면 "막걸리 한잔 하세" 라고 하며 자연스럽게 모이는 장소였다. 요즘으로 치면 카페 같은 곳이라 할까? 마을에 혼인 잔치가 있거나 어떤 행사가 있는 날이면 막걸리는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이웃끼리  서로 만나면  반갑고 즐거워서 한잔, 친구와 만나면 회포를 풀면서 한잔, 세상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괴로워서 한잔, 화가 날 때도 한잔, 가정사에 슬픈 일이 생겨도 한잔, 시장해서 한잔, 이레저레 막걸리는 서민들의 애환과 함께 호흡하는 술이기도 했다.

내가 막걸리를 처음 마신 것은 초등학교 5학년 시절이었다. 어른들의 막걸리 심부름을  할 때였다. 막걸리 한 되를  사 가지고 오면서 호기심이 발동한 것이다. 어른들은 왜 술을 마시면 얼굴이 붉어지며 벙어리처럼 말이 없던 사람도 술술 말을 잘하고 싱글벙글 미소를 짓는 것일까? 그뿐인가 목청껏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때로는 혀가 꼬이기 시작하다 다짜고짜 멱살 잡고 싸우는 사람도 보았다. 정말 신기했다. "요것이 무엇이 길래" 나는 뾰족한 주전자 끝을 입에 대고 한 모금 마신 것이 그 시작이었다. 그 후로 막걸리 심부름을 하면서 한 모금 두 모금 몰래 훔쳐 먹을 때마다 묘한 재미도 있었고 ‘싸아’ 하고 뱃속을 타고내리는 야릇한 기분도 맛 보았다. 어린 마음에 들킬까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용케도 혼이 난 경험이 없는걸 보면  도둑 술도 요령껏 적당히 해야 한다는 나름의 판단이었던 것 같다. 
 
 
막걸리는 농사를 짓는 농민들에게는 더할 수 없이 소중한 음료이자 간식이기도 하였다. 농사일로 무더운 여름 들판에서 땀을 흘리던 농부는 힘겨운 허리를 펴고 멀리 미루나무가 서 있는 논두렁에서 붉은 치마에 앞치마를 두른 아낙네가 새참을 이고 반갑게 다가오기를 기다린다. 보통은 맛 점 전후에 막걸리와 찐 고구마 등을 일꾼들에게 제공한다. 일에 지치고 목이 탈 때 푸른 들판에서 마시는 막걸리 한잔의 시원함을어찌 다 말로 표현할까? 한편 막걸리 인심은 후하기도 하였다. 쟁기를 지고 가는 이웃 논의  아저씨를 보면 "어이? 한잔 혀" 하고 손짓을 하고 신작로를 걸어가는 나그네가 있으면 불러 한잔 술로 인정을 베풀기도 한다. 내가 어렸을 때는 이미 밀주(密酒)라 하여 가정에서 술  빚는 것을 금지하였다.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살림을  쳐부수는가 하면 낫을 들고 난동을 부리는 사람도 있었다. 무분별한 남용으로 사회 혼란이 야기되자 정부는 정식 허가난 양조장 술을 권장하였다.
 
 
그래도 일부 농가에서는 비밀리에 술을 빚기도 하였는데 어느 날 나의 할머니는 안방에 있던 술 단지를 부랴부랴 잿간으로 들고 가 파묻는 것을 보았다. 할머니는 입 다물라는 뜻으로 눈을 ‘꿈뻑’ 하기도 했지만 나는 할머니가 보내는 신호의 의미를 너무 잘 안다. 가끔 순경 모자를 쓴 사람이 술 조사 나왔다며 쇠꼬챙이로 짚 누리와 벼 창고를 꾹꾹 찌르며 다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근대화로 경제가 발전하고 높은 생활수준으로 맥주와 소주 양주 등의 고급 술이 봇물처럼 보급되면서 한동안 막걸리가 푸대접을 받은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근래에는 다시 맛도 다양하고 세련된 포장으로 젊은이들에게 사랑 받는 술이 되고 있다. 우리 조상들이 즐겨 마시던 막걸리 한잔의 은은한 향기가 다시 살아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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