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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187) 고향이 무엇이길래 /김준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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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4,348회 작성일 2021-12-03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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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187>
 
고향이 무엇이길래          
 
김준규 / 시인 (한국문협 인니지부 운영위원)
 

어린 시절 고향의 모습은 꿈을 키워주던 어머니의 품속 같다. 가난에 찌든 초가집 주변의 어지럽게 흩어진 지푸라기와 농기구들이 추억의 전부는 아니리라. 지붕과 울타리 사이 밤이슬에 촉촉한 거미줄은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잡초와 어우러져 올망졸망 쪼그만 얼굴을 내미는 패랭이는 추운 겨울을 잘도 참아내며 이듬해 봄이면 어김없이 찾아와 붉은 꽃을 선사한다.  외양간과 연결된 사랑채의 두 쪽짜리 대문은 움직일 때 매다 삐그덕 삐그덕 괴음을 내고 동이 트는 새벽이면 가족들은 논밭으로 가축들은 먹이를 찾아 나서는 생존의 통로였다.
 
야트막한 울타리와 바가지를 엎어 놓은 듯 아늑한 오두막은 대낮인데도 그을림으로 침침한 부엌과 두 개의 작은 방, 그리고 군데군데 찢긴 창호지 문짝, 시간에 긁혀 패인 송판 마루는 늘 삐뚜름하게 놓여 있었다. 전기 불도 없이 희미한 석유 등잔 밑에 엎드려 몽당연필에 침 바르며 공부할 때는 가난하지만 가난의 깊이를 알지 못하던 순진한 시절이었다.
 
 
 
외양간 근처에 어둠이 깔리면 금방이라도 도깨비가 걸어 나올 듯이 밤은 때로 무섭기도 하지만 고개를 쳐들면 반짝이는 별무리가 캄캄한 밤을 지켜준다. 작은 우주처럼 아늑한 가족의 울타리 저편에는 어떤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까, 하루 중 밥 세끼의 연명이 목숨처럼 소중했던 때, 바깥세상은 형상을 알 수 없어 신비하고 두렵기만 하였다. 이상과 꿈은 때로 꿈틀대는 현실이 되어 우리들을 놀라게 한다. 민감한 호기심이 끊임없이 발동하는 사춘기는 일을 터트리기 일쑤였는데 어느 날 온 동네가 떠들썩하니 난리였다. 몇 명의 아이들이 보따리를 싸들고 도시로 도망갔다는 소문이 파다하고 그 일행 중에 나의 작은 형도 포함 되어 있었다.
 
그 시절엔 가출한 아이가 생기면 알아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대개는 몇 푼의 훔쳐간 돈을 다 탕진하고 나면 스스로 돌아오는 일이 허다했다. 대문 뒤에 숨어 훌쩍훌쩍 울며 두려움에 떠는 작은 형의 모습은 초췌해 보였다. 신비할 것 같은 또 다른 세상이 그리워 가출했던 작은 형은 바깥세상의 냉혹한 인심에 절망하고 다시 비좁은 울타리로 돌아온 것이다.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뛰어 넘어 도시로 달아난 아이들 중에는 번쩍이는 금시계에 멋진 양복을 차려입고 주물공장 사장이 되어 돌아온 아이도 있었고 어떤 여자 아이는 서울에서 가사도우미로 몇 년을 살다 피부색이 하얗게 되어 돌아온 아이도 있었다.
 
안일한 사고에 답습된 사회는 고인 물처럼 활력을 잃을 것이다. 젊은 혈기의 끊임없는 이동과 분열은 학벌이나 지연이 없이도 개인에게  성공의 기회를 제공하고 크게는 사회 형성의 기반을 다지는데 큰 힘이 되던 시절이었다.
 
5.16. 군사혁명 이후, 사회는 구태의연한 가난의 때를 벗고 잘 살아 보자는  새마을운동이 한창 전개되던 때가 있었다. 태양 빛과 눈비로부터 서민들의 둥지를 보호해주며 수 천 년을 지탱 해오던 초가지붕을 허물고 해마다 교체가 필요 없는 신식 스레트나 양철지붕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러나 따뜻한 꿈을 키워주던 고향의 품속은 가혹한 가난의 굴레 앞에 무기력 할 뿐 이었다. 사람들은 하나 둘, 고향의 보금자리를 마음속에 간직 한 채 서울이라는 신기루 같은 대도시로 봇물처럼 몰려가고 있었다.
 
"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신세" 일본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가난과 치욕의 세월을 사는 동안 우리나라의 많은 대중가요의 내용이 고향을 그리워하고 못 잊어하는 애달픈 사연을 노래하고 있다. 먹이를 찾아 먼 길을 떠난 어린 새가 생명을 키워낸 둥지를  잊을 리 없다. 가난을 원 죄처럼 짊어진 채 돈을 벌려고 고향을 떠나 타지에 살면서도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긴 고향은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하고 정겹다.
 
 
일 년 중에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가장 큰 행사는 명절을 맞이하여 꿈에도 그리운 고향을 찾아가는 일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고향에 대한 애착이 유별난 것 같다. 운송수단이 요즘 같지 않던 시절에는 장거리 이동을 위해서는 디젤 기관차가 유일한 교통수단 이었다. 추석이나 설 명절 때가 되면 이른바 ‘귀성전쟁’이라는 사회적 대이동은 필연적이고 국민소득이 높은 수준에 이르고 교통수단이 다 변화된 오늘날에도 이러한 현상은 크게 변하지 않은 듯하다.
 
고향이 무엇이길래!? 우리는 목숨 걸고 찾아가야 하는 곳인가. 1960년 1월 26일 구정 설을 쉬러 고향을 가기 위해 서울역으로 모여들던 귀성객 중 31명이 압사하는 대참사가 발생하였다. 무엇이 그토록 절박 했을까, 객지에서 노심초사 고향으로 가는 티켓 한 장을 거머쥐기까지 일 년이라는 긴 시간을 열악한 공장의 노동자로 혹은 잡역의 식모살이로 설움을 참아내며 살아온 사람들, 설레는 귀성열차를 눈앞에 두고 유난히 시린 섣달 그믐날 밤, 가련한 영혼들은 간만에 터져버릴 풍선을 타고 서울역 높은 계단을 단숨에 뛰어넘어 눈물바다가 기다리는 고향으로 훨훨 날아갔으리라.
 
한 가위가 다가오는 그날도 우리의 어머니는 음식 짓던 손을 행주치마에  씻으며 동구 밖 멀리에서 웃음 지으며 달려올 보고 싶던  자식의 귀향을 학수고대 하고 있었을 것이다. 1974년 9월 28일 용산역에서 일어난 또 하나의 압사 사건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추석 명절의 대 비극이었다. 즐거운 명절을 맞이하기도 전에 온 나라가 대성통곡 하는 두 번째 참사가 벌어진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고향을 잊지 못한다. 오늘날의 풍요로운 경제 성장과 번영은 험난한 그 시대를 잘 지켜낸 우리 형제자매들의 헛되지 않은 꿈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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