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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206) 하얀 얼굴 시대 /하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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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2,475회 작성일 2022-04-15 09:59

본문

<수필산책 206>
 
하얀 얼굴 시대
 
하연수 / 수필가 (한국문협 인니지부 감사)
 
 
이제는 젊은 남자들도 하얗게 얼굴화장을 하고 다니는 시대라고 한다. 하얀 얼굴화장 유행은 한국에서 K팝 바람을 타고 전 세계로 퍼져 나가고 있다. 턱수염을 정리하고 하얗게 얼굴화장을 한 서양의 젊은이들도 많이 보인다. 친구는 창백해 보일 정도로 하얀 화장을 하고 다니는 아들의 얼굴을 보면 화가 치민다고 했다. 이런 남편을 보고 친구의 아내는 현재의 시대를 따라가고 있는 아들은 지극히 정상이라고 두둔한단다. 도도해 보이듯 차가운 여성의 하얀 얼굴이 도시적 세련미라는 말들이 이제는 젊은 남성들에게도 통하는 세상임을 받아들여야할 때가 온 것 같다.
 
 
몇 년 전 퇴사를 한 여직원이 회사에 찾아와서 옛 동료들과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직원들은 모처럼 찾아 온 동료에게 세련된 옷과 하얀 얼굴이 잘 어울린다고 입에 발린 칭찬을 잊지 않는다. 내 눈에는 하얀 화장으로 창백해진 지금의 얼굴보다는 건강미가 넘치던 예전의 갈색 얼굴이 더 좋아 보인다. 독설을 잘하는 전무는 예전 그녀의 얼굴은 매끄럽고 윤이 나는 살락 씨였는데, 지금의 얼굴은 밀랍인형처럼 보인다고 했다. 직설적인 전무의 말버릇은 바람직하지 못하지만 무엇을 말하는지는 그 뜻은 이해가 되었다.
 
그녀의 화장한 얼굴이 발리 우붓 가는 길가 커피 집 매니저 ‘사라스와띠’의 화장하지 않은 옅은 갈색 얼굴과 대조가 된다. 또 한 사람 있다. 중학교 시절 별명이 쌀뜨물이었던 내 친구다. 그 친구는 자신의 하얀 얼굴을 무척 싫어했다. 그 이유는 동네 후배 여학생으로부터 쌀뜨물이라는 농담 한마디 때문이었다. 한의원집 아들이라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멜라닌 색소 형성 어쩌고 하면서 나름대로 갈색 피부 형성에 도움 되는 식물 자료를 찾고 연구를 했다. 검증도 받지 않은 나무의 풀뿌리들 아버지 몰래 삶고 달여 그 물을 마시고는 효과 확인을 하려고 수시로 거울 앞에 섰다. 그러다 중독이 되어 며칠 결석하는 날도 있었다. 갈색 피부를 갈망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피부가 흰 서양에 더 많이 있는지도 모른다.
 
예전 출장길에 독일 뮌헨으로 오기 전 중부 영국의 신발연구소에서 닷새를 보냈다. 햇볕이 없는 닷새는 내게 긴 시간이었고, 그 곳에서의 내 몸은 연구소 주변 습기를 모조리 빨아들이는 스펀지였다. 신발전시회가 열리는 뮌헨은 좀 나아질까 기대를 가지고 그 도시에 도착했다. 짐을 풀고 호텔 밖을 보았다. 오후 세시의 우중충한 호텔 뒤 좁은 골목바닥으로 빗줄기들이 경쟁하듯 바닥으로 내려가고 있고, 라이트를 켠 차들이 불이 들어온 상점들 사이로 지나다닌다. 곰팡이들이나 좋아할 듯 보이는 그 습기 가득한 풍경은 중부영국이나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삼일 째 되는 날 오후, 하늘로 부터 에너지를 빼앗긴 빈약한 햇빛 쪼가리들이 구름사이로 내려 왔다. 입을 크게 벌리고 깊은 호흡으로 햇빛을 들이켜 마셨다. 텅 비어있던 가슴 속이 생기로 가득했다. 호텔에서 멀지 않은 곳 건물 옥상 위에 반나체로 엎드려 있거나 책을 보며 누워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가을 햇빛 한 줄기라도 건져보려는 햇빛 줍는 가난한 사람들이다. 독일 사람들은 갈색 피부의 소망으로 기회만 되면 옥상 위로 올라가서 햇빛을 구걸한다 했다. 햇빛이 드는 날 이런 모습은 서양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일상이란다.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은 햇빛 부자의 나라다. 시골 구석구석 어디를 가도 햇빛이 남아돌아가는 부자 나라다. 햇빛이 싫어 큰 모자를 쓰거나 보자기로 얼굴을 가리기도 한다. 햇빛이 부자인 우리나라 사람들이 보기에 서양의 햇빛 줍는 가난한 사람들의 처지가 눈물겹다.
 
햇빛 가난한 나라 사람들은 갈색 피부를 좋아하는 것 같고, 우리나라처럼 햇빛 부자 나라 사람들은 하얀 피부를 좋아하는 것 같다. 인도네시아 잔칫집 주변에는 갈색 피부에 하얀 가루를 바르고 색조화장을 하고 다니는 여인들이 많이 보인다. 이 나라에 살고 있는 중국계 인도네시아 사람들도 별반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우리 회사에서 일했던 여직원은 얼굴색이 다른 중국계 사람들보다 좀더 짙은 중국계 인도네시아 사람이다. 그렇다보니 같은 중국계 사람들로부터도 차별을 받는 것 같아 보여 안타까웠다. 회사 내 중국계 인도네시아 직원들은 그녀를 히타치(HITACHI)라고 했다. 이 나라 말로 히땀 따삐 치나, 얼굴색이 현지인처럼 짙기는 하지만 뿌리는 중국인이라는 의미다. 화교사회에서 화교들끼리 통하는 은어라고 한다. 비록 갈색 피부라서 현지인 같아 보이지만 뿌리가 중국계라고 하니 최소한 화교 사회에 발을 붙이게는 해 주겠다. 뭐 이런 의미라고 했다.
 
사람들은 제각기 특성을 가진 피부를 타고 태어난다. 도도하고 차가운 하얀 피부도 있고, 멋진 갈색 피부도 있다. 하얀 피부 위에다 짙은 색조 화장을 하면 품위가 없어지고, 멋진 갈색 피부 위에다 하얀 분을 바르면 타고난 갈색 피부의 아름다움을 망쳐 놓는다. 모두가 지혜롭지 못한 화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검은 새가 하얀 눈을 맞으면 검은 새도 아니고 흰 새도 아니다. 검은 새는 투명한 윤기로 더 검게 빛날 때 가장 검은 새답고 품위가 있어 보인다. 옅은 갈색 피부를 가진 ‘사라스와띠’에게 가장 어울리는 화장은 화장을 하지 않은 갈색 피부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든다. 어찌되었든 요즘 시대는 하연 얼굴이 대세인건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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