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서정문학 신인상 수상작] 초상, 제주 /김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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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 제주
김동환
1.
섬 동백이 쓰리도록 붉은 이유는
무자년* 바람이 건천乾川에 흐름이라.
태왁*을 어깨에 인 늙은 해녀
고향으로 고향으로 몸을 뻗어보지만,
긴 세월 지켜선 한라의 삼백 오름은
끝내 굽은 허리를 놓아주지 않고.
진바다 향해 터트린 눈물 같은 꽃잎
건천에 달리는 테우*는 구슬프게 만선이라.
2.
만선의 깃발을 잃어버린 여정에는 나침반이 필요하다.
강제로 공양하듯 세 손가락 공장에 던져두고
소주잔에 눈물을 보시하던 아비는
심장박동기의 흰 선으로 숨 가쁘게 점멸되다
그대로 직선이 되어 강가에 쏟아져 내렸다
펜을 잡는 것이 좋았다지만 남겨놓은 기록도 없이.
어미는 칠칠일이 지나도 내려가지 못하는
무명의 머리핀이 무거웠는지 서러웠는지
더는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보지 않았다.
유난히도 배고팠던 그해 겨울
홀로 칼바람을 견뎌내던 소년은
살도 뼈도 발라내진 비어버린 밥주머니 하나 들고
적도의 구름 따라 간다했다
빨갱이라 불렸던 사내와 입꼬리가 닮아서
떠나야만 산다고 가장 뜨거운 곳으로.
풍어를 위한 미끼는 붉게 버무린 소태로 충분하다.
3.
소년의 키 만큼은 예전 아비보다 커져 어른이라 불렸고
곁에 누운 아이는 '안녕'이란 말을 모른 채
누군가를 닮은 손가락을 꼼짓거리며
피부 검은 제 엄마의 가슴에 젖감질을 하는
건기의 적도는 낯설도록 황홀하다
통화 속 건조하게 전해진 무자년 유공자有功者라는 단어처럼
호흡기를 뗀 바람이 우기의 적도로 향한다
어미의 머리에 있던 아비의 흔적은
다른 이름으로 아내의 머리 위로 기어오르고
빗줄기의 황홀한 곽란에 정신을 잃을 무렵
모르게 새 나오는 신음 사이로 들려오는 익숙한 숨소리
흔들리는 입꼬리는 이름을 삼키며 태평양으로 번진다.
*무자년 1947년, 제주 4.3 사건이 벌어진 해.
*태왁: 해녀가 자맥질을 할 때 가슴에 받쳐 몸을 뜨게 하는 뒤웅박.
*테우: 제주 전통 통나무 배.
▲ 김동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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