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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북 리뷰] 「화씨 451」, 의미의 발생 / 황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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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417회 작성일 2024-06-15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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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

「화씨 451」, 의미의 발생


황영은(한국문협 인니지부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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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 브래드비리의 소설 「화씨451」. 불의 온도를 가리키는 말인 것 같았다. 대략적인 줄거리를 보면 책이 사라진 시대 속에서 고뇌하는 이들, 책과 함께 했던 지난 시대를 다시금 복구해 내려는 그들의 어떤 시도를 그려내는 내용이다. 책이란 마음의 양식이며 내면의 변화를 끌어낸다는 것. 그 의미와 가치가 상실된 시대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삶이란 어떤 것일까. 그런 현실을 타개해 보려는 이들의 심리적 변화를 따라가 보는 것 또한 이 소설의 묘미다.


주인공 몬태그는 방화수다. 책을 불태우는 것. 그가 사는 도시의 질서를 유지하는 방식이다. 그는 클라리세 라는 한 소녀를 만나고 책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된다. 책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는 이들은 그에게 하나의 충격으로 다가온다. 이것은 몬태그가 책을 읽게 되는 계기로 작용하는데 그는 결국 이 삭막한 도시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그가 살던 세상이 파괴되는 모습을 지켜본다. 


책에는 책을 옹호하는 파버 교수가 등장한다. 그는 몬태그에게 시를 읊어주면서 말한다. 자신은 지금 사물 자체를 얘기하고 있는 게 아니라 사물의 의미를 얘기하고 있으며 그 의미에 대해 말하고 있는 지금 살아있음을 느낀다고. 


우리는 얼마나 자극에 쉽게 반응하며 사물의 피상에 감동하고 원초적이고 말초적인 기쁨을 예찬하던가. 몇백 페이지에 달하는 책과 2시간 남짓한 영화의 러닝타임을 단 10분 내외로 요약해 주는 유튜버들의 공덕은 또 얼마나 찬양하던가. 설명의 시간을 최대한 단축하면서도 재미와 흥미의 요소들을 짜임새 있게 구성한 '짤'들이 얼마나 인기를 끄는지 우리는 안다. 우리 시대가 그것을 원하니까. 시대가, 대중이 원하는 대로 문화는 견인된다. 시대가 원하는 대로 대중이 끌려온 것인지, 대중이 원하는 대로 시대가 변화한 것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대중들의 의식 수준이 문화의 질을 결정한다는 것. 


책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귀찮아했다고. 현실을 반영한 수많은 문장과 거기에서 파생된 다채로운 의미들과 은유를 버거워했다고. 수많은 생각과 고뇌와 탐구라는 굴레에서 해방시켜 줄 요약본과 TV와 라디오 같은 감각적인 매체와 어떤 열광과 광기를 기반으로 구성되는 집단의 움직임이 사회를 잠식한 세상. 


현대 사회의 모습과 흡사하지 않나? 생맥주를 앞에 두고 프라이드 치킨의 다리를 뜯으면서 '가치'와 '의미'에 대해 논하는 풍경은 점점 귀해지고 그를 대신해 연예인의 쇼핑 패턴이나 그가 사는 동네, 집, 주식과 투자와 자본의 흐름, 거기서 내가 취할 수 있는 이득의 가능성을 중심에 둔 대화는 갈수록 흔해진다. 불가피하게 그런 대화에 참여해야 할 때, 장단을 맞추고 나를 속이는 웃음을 짓고 누군가를 향한 험담과 비난에 동참해야 할 때, 거기에서 저도 모르게 희열과 안도를 느낄 때, 그 안도가 사실은 비난의 초점이 나를 비껴간 것에서 비롯된 것임을 자각할 때 나는 파버 교수와 달리 죽어감을 느끼고 의미와 가치를 찾아 헤매는 데 삶을 투신해야 마땅할 나의 본질이 훼손됨을 느낀다.


논쟁 없는 결론, 반론 없는 명령, 갈등 없는 수긍, 대립 없는 합의에 대해 생각해 본다. 비슷한 생각을 하고 비슷한 결론에 도달하고 비슷한 시선을 지니는 것. 거기에서 비롯되는 평화라는 것에 대해서. 


방화사들의 대장인 비티 서장은 이러한 획일성이 곧 행복에 도달하기 위한 필요악이라고 말한다. 누군가와, 또는 어떤 생각과 대립할 때, 고뇌에 빠지는 순간, 번민 속에서 생각들이 흩어지는 순간에 직면할 때 나는 분명 행복하지 않다. 행복의 기준이 무엇이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행복의 의미를 자신이 원하는 욕구와 욕망이 충족되어 만족과 기쁨을 느끼는 상태에 둔다면 분명 그렇다. 


하지만 삶이란 수없이 지기만 하다가 어쩌다가 이기는 것이지 않을까. 하루를 기준으로 삼아도 우리는 수없이 지는 순간 속에 놓여있거나 열등한 인간이 되지 않던가. 행복의 순간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우리 전체 인생을 조망해 볼 때 그런 순간은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행복의 범람 속에서 만족감과 충만함과 기쁨과 같은 그 모든 긍정의 감각이 흔한 것이 되어 버릴 때 삶은 아주 쉽게 시시하고 공허한 것이 되어 버린다. 우리의 삶이 그렇게 사소한 것이 되어선 안 되지 않을까. 


만족과 기쁨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에서 어떤 의미라는 것이 발생하고 행복이라는 것은 그 의미의 조각들 속에 아주 촘촘하고 은밀하게 스며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결국 행복이라는 것은 의미의 발생이 시초인 것이라고. 고뇌에 빠지고 번민으로 괴로워하는 와중에도, 그래서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순간에도 그 의미와 가치의 불씨가 살아있다면 낙담할 필요가 없다고. 우리의 행복은 그 가능성 속에 존재하는 것이니까. 


그러니 몬태그가 그의 아내 밀드레드에게 그들의 첫 만남의 풍경과 그 느낌에 대해 묻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는 또 무엇에 대해 물었던가. 텔레비전 속의 어릿광대와 '친척'들이 밀드레드 당신을 사랑하냐고, 아주 깊이 사랑하느냐고 물었다. 클라리세는 동일한 질문을 그에게 던지고 그가 아무하고도 사랑을 하고 있지 않다고 단언한다. 


이들이 사랑에 대해 묻는 이유는 뭘까? 사랑이야말로 의미를 기반으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결국 이들의 질문은 당신의 내면에 '의미'의 불씨가 여전히 존재하는지를 묻는 것이리라.

단 하나의 해답 앞에서 사람은 안정감을 느끼는 동시에 두려움을 느낀다. 우리 앞에 놓인 유일한 해답들은 복잡한 사유의 과정 없이 손쉽고 용이하게 도달할 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그 단 하나의 해답이 그 무엇보다도 난해해 손쉽게 손에 쥘 수 없는 것이라면. 그 정답의 실패가 내 삶의 존폐를 위협하는 것이라면. 유일한 정답이라는 건 우리 삶을 향한 위협이 될 수 있다. 유일한 해법의 실패가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서 우리는 자유롭지 않다. 여러 가능성과 다채로운 선택지가 우리를 번거롭게 하고 수많은 지연과 지체를 초래하더라도 그 망설임과 머뭇거림 속에서 우리의 삶은 더 깊어지고 조밀해진다. 그 때문에 세상은 무사하다. 


우연히 책 한 권을 손에 넣은 몬태그는 비티 서장에게 책을 뺏길 지도 모른다는 불안 속에서 어린 시절 체에 모래를 담던 기억을 떠올린다. 아무리 모래를 빨리 담아도 빼곡한 구멍 사이로 빠져나가버리던 모래알들. 책을 아주 빠른 속도로, 단 하나의 구절까지도 머릿 속에 담아낸다면 책을 빼앗긴대도 안전하지 않을까. 하지만 몬태그는 기억한다. 메마른 모래로는 절대로 채울 수 없었던 냉혹한 체의 논리를.


정답을 찾은 단 한 사람이 평온과 안도를 독식하기보다는 하나의 커다란 해답에서 파생된 여러 갈래의 대안들 속에서 안전함을 나눠 갖는 일. 그것이 바로 메마른 모래가 체의 구멍으로 빠져나가는 일을 막는 일이 아닐까. 하나의 정답이 가지를 뻗어나가며 다양성과 가능성의 갈래를 만들어 내는 일은 곧 우리 앞에 놓일 대안들이 무게를 지니는 일이다. 여러 퇴로를 마련하는 일은 고뇌와 번민이 필요한 일이니까. 


그것은 체의 촘촘한 구멍을 결코 빠져나갈 수 없도록 가볍고 메마른 모래를 묵직하게 만드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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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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