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25) 특별기고 -만남은 맛남 /장호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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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25 / 특별 기고>
만남은 맛남
장호병 /수필가 (한국 수필가협회 이사장)
수 년 전 시각장애학생들의 미술전시회에 간 적이 있다. 찰흙으로 빚은 흉상에서 하나같이 정상보다 크게 튀어나온 눈이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시각장애아들에게도 ‘세상으로 나아가고, 세상을 받아들이는 관문’이 눈이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들에게 육신의 눈은 다만 있어야 할 자리를 표시하는 퇴화의 흔적이자 결핍의 상징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이 맹아학교의 이웃 농아학교에 친구가 오래 전 근무한 적이 있어 지도교사인 수녀님과 말문이 자연스레 트였다. 두 학교가 전국장애인체육대회에 선수를 내보낼 때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선수단의 규모가 크지 않아 그 해는 버스 한 대를 이용하여 양 학교 선수가 참가하였단다. 대회를 마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인솔교사끼리 만났다.
맹아학교 아이들은, “우리는 이 아름다운 세상의 소리를 두 귀로 들을 수가 있고 또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말로 표현할 수 있어 행복합니다. 농아학교 아이들은 듣지도말하지도 못하니 너무나 불쌍해요.”하며 선생님 앞에서 슬픈 표정을 지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버스 안에서 재잘대던 아이들은 모두 자기학교 시각장애학생들이었다.
화가들의 경우, 뜬 눈으로 대상을 관찰하고 감은 눈으로는 내면을 성찰하여 그림으로 나타낸다고 한다. 맹아들에겐 감긴 눈이 있어 오히려 정상인의 눈으로 읽지 못하는 부분까지 읽어내는 성숙한 면을 보여주었는지도 모른다. 남의 목 가시보다 제 손톱 밑 가시가 더 아프게 느껴지는 게 인지상정이다. 남을 헤아리기엔 자신들이 가진 장애가 적지 않음에도 그들은 농아들이 불쌍하다고 입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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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아들도 사람이기에 닫힌 문 앞에서, 앞을 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농아들을 부러워한 나머지 시기의 대상으로 삼거나 자신을 비관할 수도 있었다. 아니면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그들을 하찮은 부류로 무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반목과 따돌림이 횡행하는 이 시끄러운 세상에서 제대로 보는 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바가 적지 않다.
맹아들은 농아들의 청각불능에 자신들의 처지를 투영하였으리라. 그리고는 측은지심을 느꼈을 것이다. 농아들이 그 온전한 시각 하나를 자랑한다 할지라도, 맹아들은 콧방귀를 뀌거나 애써 외면하지는 않을 것이다. 맹아의 입장에서는 의당 자랑할 만한 일로 받아들여진다. 또 듣고 말할 수 있는 자신들의 자랑거리에 주목할지도 모른다.
나와 다른 남에게서 ‘나’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리고 이 세상에 던져진 고독한 존재들끼리 측은지심을 느낄 수 있다면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면서 함께 살아갈 수 있으리라. 또 내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별종들에게서는 언젠가 나의 빗나간 모습일 수도 있으려니, 비난하거나 탓하기보다는 타산지석의 경계로 삼아야 할 것이다.
농아학교 아이들 역시, “우리는 이 아름다운 세상을 두 눈으로 즐길 수가 있는데, 맹아학교 아이들은 앞을 볼 수 없으니 불쌍해요.”라고 말했다.
조물주는 왜 나를 직접 만날 수 없도록 했을까? 남을 통해서만이 나가 어떤 존재인지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은 나 못지않게 남도 존중해야 된다는 의미이다. 너를 만날 때 나의 또 다른 ‘나’가 증인으로 동석하고 있다는 사실을 평소 깜박 잊게 한 것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준 것이리라. 매사에 ‘나’의 동석을 의식한다면 녹음기 앞에서, CCTV 앞에서처럼 우리는 얼마나 부자연스러워하겠나. 가벼운 거짓말은 물론 아무리 화가 나도 막말처럼 심한 표현을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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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다는 것은 만남의 연속이다. 눈을 뜨면서부터 감을 때까지 수많은 만남에 꼭꼭 등장하건만, 정작 잊고 있는 것 바로 ‘나’자신과의 만남이다. 눈을 두 개나 가지고 있어도 나는 나 자신을 볼 수가 없다. 나 속의 또 다른 나를 포함한 타자를 통해서만이 ‘나’를 만날 수 있다. 누구를 만나든 나의 글속에는 늘 ‘나’가 함께 한다. 그래서 문학을 통한 만남은 맛남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 장호병 /수필가 : 수필집 <웃는 연습><하프 플라워><실키의 어느 하루><너인 듯한 나>와
이론서 <글, 맛있게 쓰기>, 평론집 <로고스@카오스>, 영문 에세이집 <Half Flower>가 있다.
대구수필문학상과 대구문학상을 수상하였고 현재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 계간 문장 주간을 맡고 있으며,
대구수필문학상과 대구문학상을 수상하였고 현재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 계간 문장 주간을 맡고 있으며,
대구교육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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