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31) 소확행(小確幸) / 우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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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산책 31 >
소확행(小確幸)
우병기 / 한국문협 인도네시아 지부 회원
한국의 유명 대학 철학과 교수가 한 TV 프로그램에 나와서 젊은 청년들을 상대로 ‘삶은 원래 힘든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라고 이야기를 했다. 그 철학과 교수는 헬리콥터로 한 방에 곧장 산 정상에 도착하는 것보다는 힘들고 시간이 걸려도 한 걸음 한 걸음 험준한 계곡을 거쳐 산 정상에 올라야, 정상에 도착했을 때 성취감에 대한 희열이 더 커진다는 증거를 제시했다. 그의 강의는 “우리의 삶도 계곡을 거쳐 산 정상에 오르는 것과 같은 삶을 살아야 의미가 있다.”며 마무리되었다. 대부분의 젊은 방청객들은 박수를 보냈지만, 그 철학과 교수의 주장에 그리 동의를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만의 느낌일 수 있겠지만, 중년인 나에게도 그 철학자의 주장은 공허한 메아리로 들려올 뿐이다. 솔직히 말해 헬리콥터를 타고 정상에 오를 수 있다면, 굳이 힘들게 등산을 해서 정상에 오르는 길을 택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편한 삶을 누리는 것은 모든 이의 인지상정일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삶은 선택받은 소수에게만 헬리콥터를 보내 준다. 그 철학과 교수의 말대로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험준한 계곡을 거쳐 정상으로 가야만 한다.
그렇다면 어차피 건너야 하는 험준한 계곡을 우리는 어떻게 건너야 할까? 나는 그 해답이 ‘소확행’에 있다고 생각한다.
소확행(小確幸)은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작지만 확실하게 실현 가능한 행복 또는 그러한 행복을 추구하는 삶의 경향을 뜻하는 신조어다. 원래 소학행이란 말은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수필 <랑겔한스섬의 오후>에서 쓰인 말로,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을 때,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정리된 속옷을 볼 때 느끼는 행복과 같이 “바쁜 일상에서 느끼는 작은 즐거움”을 뜻한다고 한다. 즉,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의 두문자어(頭文字語)이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마시는 시원한 물 한 컵에서 하루의 첫 소확행을 느낀다. 아침 식사 때, 구수한 된장국을 먼 이국땅에서 맛볼 수 있다는 것에 두 번째 소확행을 느낀다. 어제는 훈훈한 아침 식단으로 출근 시간이 늦어졌다. 지각을 할 것 같았는데, 평소보다 차량 흐름이 좋아 교통체증도 없고, 교통 신호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사무실에 정시에 출근했다. 오전 회의 안건으로 올라온 사안들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평소보다 일찍 회의가 끝났다. 올리는 결재마다 무사통과였다. 오전 내 계속 이어지는 소확행으로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점심에는 전무님께서 고생한다면서 직원들에게 시원한 냉면을 사주셨다. 자투리 점심시간을 이용해 잠시 맛보는 꿀맛 같은 낮잠도 나의 소확행 중의 하나이다. 나른한 오후, 커피 한잔이 생각날 때쯤, 직장동료가 시원한 냉커피를 건넸다. 야근 없이 정시 퇴근을 했는데 길은 어찌나 시원하게 뚫리는지.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아내가 저녁으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묵은지 돼지갈비 김치찜을 준비해 놓았다. 나는 냉장고 깊숙이 아껴서 보관해 두었던 소주를 꺼내어 반주 삼아 아내와 사이좋게 한잔했다. 아들 녀석이 시험성적표를 받아 왔는데, 반에서 1등이란다. 저녁 식사 후 아들과 오랜만에 땀을 흘리면서 즐겁게 농구 한게임을 했다. 따듯한 물에 샤워 후 뽀송뽀송한 침대에 누워 내일도 누릴 이 소소한 행복을 생각하며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다.
오랜만에 자카르타 근교에 사는 동갑내기 친구들과 저녁을 같이 했다. 내가 소확행에 대해 이야기하자, 너도나도 한마디씩 거든다. 한 친구 녀석은 만취 상태로 집에 귀가해서 다음날 마누라가 바가지를 긁을 줄 알았는데, 잔소리 한마디 듣지 않고 신혼 때나 먹어보던 황탯국을 끓여 주었단다. 힘내라며 용돈까지 주고. 약간 불안한 기분도 들었으나 기분 좋은 하루를 보냈다고 했다.
또 다른 친구는 차가 많이 막혀 교통체증으로 지각을 했는데, 다행히 사장님이 더 늦게 와서 매서운 눈초리를 피할 수 있었단다. 다른 친구 녀석은 나른한 오후에 무슨 직원 교육이냐며 궁시렁거렸는데, 소등하고 보는 동영상 강의라 푹 자고 나왔다며 해맑게 웃었다. 이 운 좋은 친구는 지난주 일요일에 무척 피곤해서 회교 사원 기도 소리 없이 늦잠을 자고 싶었는데, 거짓말처럼 조용한 아침을 보냈단다. 이유를 알아보니, 번개에 맞은 회교 사원의 스피커가 고장 나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오후에 골프장에 가서 18홀을 다 마치고 막 클럽하우스에 들어왔는데,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는 바람에 경기를 다 못 끝낸 다른 팀들은 끝내 18홀을 밟을 수 없었다고 한다. 골프장에서 시내로 돌아오는 길에 마치 주차장처럼 차량이 길게 늘어선 반대편 차선을 보며 그 나름의 소확행을 느꼈다면서 낄낄거렸다. 혼자 자카르타에서 자취하는 친구는 집안일을 도와주던 도우미가 결혼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간 후, 마음에 드는 대타를 구하지 못해 한동안 불편했는데 마침 그 도우미의 애인이 결혼을 앞두고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나는 바람에 다시 일하고 싶다며 돌아왔다는 가슴 아픈 사연을 즐겁게 전했다.
또 다른 친구는 약속장소로 오며, 짝수날인 줄 모르고 뒷 번호가 홀수로 끝나는 차를 타고 왔는데, 단속하는 경찰을 만나지 않아 돈이 굳었다며 흔쾌히 술값을 냈다. 그날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자기가 주장하는 것들이 진정한 소확행이 아니겠냐고 떠들어 댔다. 나는 비록 친구들에게 공자님 같은 소리를 한다고 핀잔은 들었으나, 너희 같은 친구들하고 먼 타국 땅에서 가끔 모여서 소주 한 잔 걸치며 떠들 수 있는 것이 나의 가장 큰 소확행이라는 진심을 전했다.
각자 느끼는 소확행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그것은 일상에서 우리를 기다린다. 행운의 네잎클로버처럼. 풀밭에 피어있는 꽃을 볼 여유가 있는 사람은 험준한 계곡을 지나 정상에 올라도 피곤함을 덜 느끼지 않을까?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은 흔하지만 깨닫는 사람에게는 소소한 행복, 소확행을 찾는 혜안을 깨우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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