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40) 여름산사에 두고 온 보름달 / 이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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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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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산책 40 >
여름산사에 두고 온 보름달
이은주 / 수필가 (한국문협 인니지부 부회장)
늦은 시간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회사 마당 위로 보름달이 그윽하게 내 얼굴을 비추고 있다. 구부린 어깨를 힘껏 제쳐 보름달을 올려보려니, 어느새 발밑으로 내려와 보폭이 다른 발걸음에 하마터면 보름달 궁둥이에 부딪칠 뻔 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뜨거운 열대의 적도 하늘의 매력에 흠뻑 빠진 나의 유일한 취미는 언제 어디서나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이다. 지금쯤 고향의 밤하늘에도 보름달이 뜨고 있을까? 사립문 마당에 있는 붉은 항아리 속으로 아직도 달빛은 퍼붓고 있을까?
나는 보름달을 싫어한다. 초승달, 낮달, 반달 중에 유독 보름달이 싫은 이유는 동그라미 그득한 뭔가가 나를 압도하기 때문이다. 보름달은 내게 늘 마음을 비우라는 말을 하는 거 같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생각을 버린다는 것이다. 생각이 없는 마음, 즉 무심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에 선과 악이 함께 존재하듯 무심과 유심은 늘 그림자처럼 붙어있다. 내 마음을 나도 잘 모른다. 둥글었다가 세모가 되었다가 가끔은 네모가 될 때도 있다. 나의 마음은 각이 진 네모로 바뀌어 가는데 보름달은 자꾸 둥글어지라고 한다. 사람들과의 복잡한 관계 속에 황폐해진 생각들로 지쳐가며 방황하던 지난 라마단 휴일을 맞던 여름, 문득 내게 다가온 보름달을 잊을 수가 없다.
신문 한 귀퉁이에서 본 ‘나를 찾으세요! 라는 템플스테이 문구가 나를 부산의 통도사로 이끌었다. 통도사길가에 서서 두런두런하는 소나무들의 수다 소리, 장난감 병정들을 일렬로 세워놓은 듯한 나무들, 스산한 한기를 뿌리는 차가운 안개와 함께 슬며시 불어오는 바람은 좌표를 잃어버린 나의 마음을 다듬어 주려고 슬금슬금 나를 스치며 지나간다. 통도사에 도착하니 많은 사람들로 어느새 주변은 북적거린다. 저마다 속세에서 얻은 마음의 짐을 잔뜩 가지고 왔나보다.
스님은 그 마음을 아는 듯 “자, 이제부터 속세의 짐을 다 내려놓으세요!” 그렇게 귀띔을 해주신다. 수련하는 동안은 속세에서 가져온 물건을 사용할 수 없으며, 화장도 할 수 없다는 스님의 말에 나는 얼른 아이크림을 호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요즘 부쩍 늘어나는 눈가의 주름 때문에 고민하는 나에게 친구가 사 준 눈 전용 화장품이다.
점심 식사 후 명상 수업을 시작하였다. 조용한 명상 시간 내내 졸음은 쏟아지고 수업 도중 슬그머니 꾀도 생겼다.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세속의 시간표 속에 몸을 흔들어대는 나에게 스님은 벌칙으로 108배를 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108배를 할 수 없었다. 절 마당 가득 달빛이 거느리는 고요 속에 빠져 도저히 절을 할 수가 없었다.
살며시 스님의 눈을 피해서 절 마당으로 나왔다. 어느새 검은 하늘이 내 머리 위에 내려와 앉는다. 난시 속에 퍼져 더욱 둥글어 보인 보름달이 나무에 걸터앉아 노승의 목탁 소리를 흉내 낸다. 정말 달빛 속에 내 마음을 다 드러내 놓을 수 있을까?
혼탁하고 지친 내 마음을 달빛 속에 헹구어 내고 싶다. 단 한 번도 이렇게 가까이 보름달을 본 적이 없다. 얼굴이 하얗고 둥글어서 나의 별명은 언제나 보름달이었다.
친구들의 놀림이 싫어 보름달이 뜨는 날이면 집에 일찍 들어가 버렸다. 거울을 보며 달걀형의 얼굴이 되길 기도했다. 보름달만 아니라면 삼각, 사각의 얼굴이라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보살님! 여기서 뭐하십니까?” 스님에 물음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무엇이 보살님 마음을 조급하게 하십니까? 얼굴에 주름입니까? 수업 내내 얼굴에 크림 바르느라 정신이 없으시더니 마음속 주름은 보이지 않으십니까? 보름달 속에 보살님 얼굴을 비춰보십시오. 얼굴에 주름이 문제입니까? 마음 속 겹겹이 낀 주름을 보십시오.”
그런 혹독한 말씀을 남기고 바람처럼 휑하니 사라진 스님의 교훈은 잠시 나의 얼굴을 붉게 달구었다.
김동리 작가는 보름달같이 꽉 차고 온전히 둥근 눈동자를 소유한 사람을 좋아하고, 그 눈동자가 눈 한가운데 그득하게 자리 잡고 있는 사람이 좋다고 하였다.
나도 누군가를 바라볼 때 아무런 편견도 없이 정면을 지그시 바라보며 저 보름달처럼 고요하고 따뜻한 눈빛으로 세상을 바라 볼 수 있을까. 그런 저런 생각으로 가득차서 다시 법당으로 들어오니 모두들 열심히 절을 하고 있었다. “무심, 무심” 외치는 내 마음에는 둥근 달만 떠올랐다. 그런데 어느덧 하심으로 절을 하면 할수록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제는 조금은 따뜻한 마음으로 세상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도 누군가를 바라볼 때 아무런 편견도 없이 정면을 지그시 바라보며 저 보름달처럼 고요하고 따뜻한 눈빛으로 세상을 바라 볼 수 있을까. 그런 저런 생각으로 가득차서 다시 법당으로 들어오니 모두들 열심히 절을 하고 있었다. “무심, 무심” 외치는 내 마음에는 둥근 달만 떠올랐다. 그런데 어느덧 하심으로 절을 하면 할수록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제는 조금은 따뜻한 마음으로 세상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수련을 마치고 돌아서 나오는 나를 스님이 부르셨다.
“혹시 놓고 가시는 물건 없으십니까?” 빠짐없이 짐을 챙긴 가방을 들여다보는 내게,
“어젯밤 보름달은 안 가져가십니까? 오늘 보살님 얼굴은 어제의 보름달 보다 환하고 밝아서 좋네요.” 하신다.
합장한 손에 힘이 들어갔다. 보름달을 쥐고만 싶었던 나의 마음이 어느새 보름달 속에 들어앉았다. 산사에 놓고 가는 것이 아니라 보름달이 나를 데리고 가는 것이다. 보름달 빛은 삶의 길눈이 어두운 나의 길도 밝혀 주리라 약속한다.
산사에서 울려 퍼지는 동종은 자기가 감당할 만큼의 소리를 낸다. 나는 내 울림만큼의 공명으로 낮지만 쉬지 않고 아주 낮게 울리는 동종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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