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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50) 앵두꽃 피는 밤 / 이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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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9,307회 작성일 2019-04-10 10:46

본문

<수필산책 50 >
 
앵두꽃 피는 밤

이영미 : 수필가 / 한국문협 인니지부 회원
   
 
4월이 되자 흰색과 석죽색의 꽃이 피었다. 
한 번 흐드러지게 피었으니 이지러질 시간 
봄비를 기다린다. 
그달의 달력이 넘어갈 즈음 봄비에 낙화하는 고화(枯花) 
한순간의 만타(萬朶)를 위해 잎도 열매도 숨죽이던 날들 지나면 알알이 붉은 열매
6월을 불태운다.

이웃집에서 체리 한 상자를 보내왔다. 마침 기름기 많은 저녁을 먹었던 터라 기쁜 마음으로 상자를 열었다. 그 순간, 나는 온 동네를 쏘다니며 앵두 서리를 하던 조그만 소녀로 돌아간다. 땡볕에 까마귀처럼 새까맣게 타서 커다란 눈과 히죽거리는 치아만 보이던 여자아이는 30여 년 전의 내 모습이다. 서른 살 이후, 15년을 한국도 아닌 동남아에서 살아가는 나는 고향 생각에 눈물을 흘릴 만큼 감성적이지 않다. 오히려 좋고 나쁨을 판별하여 판정하는 ‘감정인’이다. 이런 내가 체리를 보자 마음이 약해지다니... 이게 다 앵두 때문이다.
 
내 고향은 벚꽃 대신 복사꽃과 앵두꽃이 피는 산골이었다. 장독대마다 앵두나무를 즐비하게 심어놔서 꽃이 피면 마을 전체가 지붕 위에 화환을 쓴 것처럼 보였다. 
벚꽃처럼 앵두꽃도 4월 벚꽃놀이 시즌에 핀다. 오히려 앵두꽃이 벚꽃보다 더 화려하다. 하지만 가지를 옆으로 쫙 펼치고 “날 좀 보러 와요. 이래도 안 볼래요?” 유혹하는 벚꽃과 달리 앵두나무는 가지가 세로로 뻗는다. 마치 꽃가지 한두 개를 꺾어서 꽂아놓은 듯 무구한 맵시를 지녔다. 그래서 꽃구경에서는 벚꽃에 밀린다. 앵두는 이파리를 피울 힘도 아껴서 가장 아름답게 개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꽃이 진 뒤에는 열매와 잎이 한꺼번에 핀다. 분홍분홍한 꽃이 진 뒤, 잎 새와 붉은 열매가 함께 피어나는 장면은 상당한 볼거리다. 
 
 
앵두나무가 열매를 맺은 것을 보라. 조그만 이파리가 그보다 더 조그만 열매를 감싸는 형상이다. 잎새를 들춰보면 빨간 앵두 알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신기하게도 어린 나는 이 단순한 규칙을 알고 있었다. 닿기 쉬운 것에만 손을 뻗는 얍삽한 머리는 없었나 보다. 그래서 어른들이 장이 서는 거리에 내다 팔 앵두를 따던 막대기질이 멈추면, 날다람쥐처럼 앵두나무에 올라갔다. 나뭇가지 안쪽에 숨어있던 앵두는 모두 내 차지였다. 그 당시 앵두는 우리 집 것과 이웃집 것을 가리지 않았다. 집집마다 붉은 정情이 열리던 시절이다. 작정하고 털어가려고 막대기만 휘두르지 않는다면 한두 줌 따가는 건 신경조차 쓰지 않던 시절이다. 덕분에 땅에서 가까운 곳에 매달린 앵두들은 죄다 털렸다.
 
붉은색은 풍경을 압도하는 힘이 있다. 6월이 되면 호기심 많은 사춘기 소녀의 입술처럼 붉은 앵두가 잎사귀 사이사이로 고개를 내민다. 그 모습이 퍽 어여쁘다. 
화장품 회사에서는 여성의 심리를 잘 파악했다. 앵두가 붉어지는 계절마다 ‘탐스러운 앵두처럼 탱탱하고 촉촉한 입술로 만들어주는’ 이란 수식어를 붙인 립스틱과 연분홍의 아이섀도, 볼 터치를 출시한다. 그렇지만 유명한 화장품 브랜드도 아직 천연의 앵두 색을 표현하지는 못했다. 자연은 인간의 눈이 따라갈 수 없는 심미안을 지녔다.
 
자고로 ‘오뚝한 콧날과 앵두 같은 입술’은 미인이 갖추어야 할 기본의 아름다움으로 인식되었다. 이 글을 읽는 독자가 남자라면 첫사랑을 떠올려 볼 시간이다. 그대의 첫사랑은 수줍게 웃으면 폭 파이는 볼우물과 앵두 같은 입술을 지녔지 않은가?
입술이 붉다는 것은 심장에서 피가 잘 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혈액순환 계통의 질병은 흔히 여성들이 겪는다. 즉, 앵두 같은 입술을 지닌 그녀는 고질적인 혈액순환 문제가 없어 활발한 성격에 잘 웃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앵두가 들어가는 표현 중에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운다는 뜻을 지닌 ‘앵두를 따다’가 있다. 속된 표현이지만 누군가가 우는 모습이 쉽게 그려진다. 어쩌면 앵두나무도 구슬같이 동글동글한 앵두를 내어주며 우는 것인지도. 또 잘못을 저지르고 어디론가 자취를 감춘 사람을 ‘앵두장수’라 불렀다. 말의 어원과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가 없어서 아쉽다. 
마지막으로 ‘처갓집 세배는 앵두꽃을 꺾어 갖고 간다’는 시대에 뒤떨어진 속담도 있다. 본가 일에 바빠 처갓집 행사는 마지못해 들른다는 뜻으로 요즘 시대에 이랬다가는 앵두나무 가지로 뺨 맞을 일이다.
 
 
이쯤에서 궁금증이 생긴다. 과연 체리와 앵두는 비슷한 종일까? 우리말로 ‘양앵두’라 불리는 체리는 유럽이 원산지며 영어로 cherry라 표기된다. 앵두의 영어 표기는 Korean cherry. 중국과 한국이 원산지인 앵두는 체리보다 작고 식감이 물렁하다. 평소 호불호를 내색하지 않는 동양인처럼 단맛이 덜하고 신맛은 좀 더 강한 편이다. 국정을 돌보느라 소화기 장애를 앓던 세종대왕이 즐겨 먹을 만큼 소화를 돕는 성분도 풍부하다. 
 
두 열매가 나무에 매달린 모습은 확연히 다르다. 바람이 지나가면 맑은 방울 소리가 울릴 것 같은 체리는 길쭉한 꼭지 끝에 늘어져 있는 반면에 앵두는 겁이 많은 아이처럼 나뭇가지를 꼭 끌어안고 있다. 사이좋게 바투 붙어있다. ‘수줍음’이란 앵두의 꽃말에 수긍이 간다. 이런 여리여리한 앵두가 몸속에 독성이 있는 씨를 품었다니, 세상의 오묘한 이치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추억은 우련하게 다가온다는데, 내 기억은 총천연색이다. 그렇게 선명할 수가 없다. 
 
손이 시릴 만큼 차고 맑은 계곡물에 기억을 씻기라도 한 걸까. 나도 모르게 잊지 않으려 옛 기억을 정신없이 붙잡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밤 나는 계집아이처럼 즐겁다. 
저 먼 땅 한 자락에서 흰색과 석죽색의 앵두꽃이 피어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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