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14) 커피 한잔 / 이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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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산책 14 >
커피 한잔
이강현 / 문협 자문위원
소주 한잔, 와인 한잔, 커피 한잔, 삼삼오오 둘러앉아 인생을 논할 때, 때론 미치도록 고독할 때, 세상 모든 걸 다 가진 듯한 충만함이 느껴질 때, 삶이 서글퍼 혼자 울고 싶을 때, 이슬비가 촉촉히 마음을 적실 때, 햇살이 너무 따뜻할 때, 이런 순간에 우리를 곁에서 지켜주는 바로 그 한잔 들이다. 그럼 왜 한잔이었을까? 한잔으로 여러 잔이 시작된다는걸 우린 인지하고 있는 걸까?
이렇게 한잔으로 시작해야 하겠지. 그 한잔이 중독이 되기도 하고 중독을 애써 피해 가기도 하는, 그게 우리네 삶이 아닐까?
나는 소주와 와인을 내 나름대로 정복했다. 맛을 느끼고 표현할수 있었다. 남다른 미각을 가지고 있어 소주 한잔을 삼킬 때 그 쓰다면 쓰고 달다면 단맛에 묻어 있는 인생을 표현할 줄 알았다.
7, 8병을 마시며 내 몸이 받아주지 않을 때까지 마지막 소주 한잔과 전투를 한 적도 있었고 결국 그 한잔 더에 나가 떨어지기도 했었다. 갖가지 향을 품고 있는 신비로운 와인은 마시기 전에 음미하는 향기와, 첫 입술에 잔잔히 다가와 격정적으로 휘몰아 치다가 한 모금을 삼킨 뒤에 아쉬움과 허전함에 한세트, 그 세가지 맛을 내 나름대로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그 황홀한 맛에 취해 어떻게 표현할까? 눈을 감고 한잔 두잔, 마셔 보고 매번 그 변화 무상한 혀끝 감각을 기억해 보기도 하고 그것도 부족해 인터넷을 찾아 헤매며 내 나름대로의 와인의 지식과 맛을 탐구했었다.
하지만 딱 하나. 나는 커피는 마실 줄 몰랐다. 그 좋은 커피가 그렇게 많다는 인도네시아에 살면서도... 중학교 3학년 때 커피를 처음 마셔 봤다. 누가 그러는데 커피를 마시면 잠이 오질 않는다 했다. 고등학교 들어가는 연합고사를 만점을 맞고 싶었다. 혼자 계신 아버지께 효도하는 마음으로 지방 신문에 이름이 나고 싶었다. 공부도 꽤 잘 했으니 실현 불가능 하진 않았다. 다만 나는 천재는 아니어서 좋은 성적을 내려면 노력을 많이 해야 했고 공부하는 시간을 늘리기 위해 잠을 줄여야만 했다. 매일 밤 11시경에 커피를 큰 사발에 한잔 가득 마셨다. 효과가 있었는지 중학교 3학년 내내 두, 세시간씩 밖에 잠을 자지 않고 공부했고 하숙집 아줌마의 전기세가 걱정된다는 핀잔까지 들어가며...나에게 커피는 향기에 취해 맛을 음미하는 애정의 대상이 아니었고 일상에 필요한 하나의 수단이었을 뿐이었다. 정말 그랬었다.
결국 내가 필요로 하던 시간이 끝난 뒤에 난 커피와 이별을 했다. 연합고사가 끝났고 잠을 더 이상 억지로 쫓아야 할 일이 없어 자연스럽게 커피는 내 곁에서 멀어져 갔다. 아니 성인이 되어서도 커피는 이상하게 싫었다. 일단 거무스레한 색깔 자체가 옛날 사극에서 봤던 쓰디쓴 한약 한사발의 기억과 수면제에 반대되던 의약품으로 여겨지던 그 커피 한잔. 그 이후로도 난 어쩌다가 커피를 한모금 마시게 되면 이상하게 배가 아팠다. 사람들이 습관처럼 시켜 먹는 커피가 나에게는 화장실로 달려 가게 만드는 요상한 놈이었다. 왜 나에게 맞지 않는걸까? 이유를 모르겠고 또 그다지 그 이유를 알고 싶지도 않아 그냥 난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몇달 전 갑자기 그런 무심하고 의미 없던 커피란 놈이 갑자기 내 앞에 다가왔다.
난 커피를 마시지 못하는 사람이었기에 인도네시아에 그 흔한 루왁커피를 한국에 있는 지인들에게 사다 나르기만 하고, 자카르타를 찾는 지인과 손님들에게 마치 노자돈 쥐어 주듯 정성스레 선물했지만 정작 난 루왁 커피가 어떤 맛인지도 모르고 살아왔기에 가끔은 생색내며 주는 이 루왁이 가짜는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었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무심하던 커피를 슬그머니 한잔 마셔봐야겠다 라는 생각이 드는 걸까? 입맛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민감해 자카르타에 있는 맛집이란 맛집은 줄줄 꿰고 있고 과일의 황제 두리안은 냄새만 맡아도 현지인보다 더 진품을 찾아내던 내가 인니에서 마지막으로 정복해야 하는 숙명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결국 커피에 대한 내 마음에 공소 시효를 스스로 끝내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결국 자카르타 한국 식당에서 후식으로 주는 다방식 냉커피를 망설이며 시켜 한모금 마셔 보았다. 씁쓰름하며 달짝지근한 맛이 뭐 나쁘진 않았다. 조금 있으면 배가 아플거야.ㅋㅋ 그렇다 어김없이 배가 아파온다. 며칠 지난후 다시 한번 그 이상한 커피를 다시 시켜 마셔 봤다. 오늘도 배가 아플까? 여전히 배가 아프다.... 한달 정도 간간히 그렇게 커피를 시켜 마셔 보았고 언제부터인가 설사를 하지도 않았고 배가 점점 아프지도 않았다. 뭐든지 적응해 가면 되는거겠지. 사람들이 얘기하길 커피에 들어 가는 크림이 좋지 않다고 한다. 순수하게 커피만 마시면 별 일 없을거라고, 그래서 이번에는 다방 커피가 아닌 일반 커피를 시켜 마셔 보았다. 이번에도 나쁘지 않았다. 향기롭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후론 식당 후식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다른 시간에 다른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커피를 시켜 마셨다. 이젠 정말 향기로운 것 같다.
커피를 한모금 입 안에 넣고 음미하며 굴리듯 미각을 자극한다. 어떤 커피는 약간 쓰고 맛이 없다. 어떤 커피는 약간 시큼 하기도 하다. 어떤 커피는 정말 형언하기 어려운 깊은 맛이 난다. 아! 이래서 사람들이 커피들을 연구하고 배우는구나! 소물리에나 바리스타나 다 전문가가 되어 그 무궁 무진한 세계를 탐구하려는 작업들을 하는 거구나.
아직은 스타벅스에 커피가 마시고 싶어 찾아 가지는 않는다. 다만 커피가 있는 곳에 내가 있을 땐 한잔씩 시켜 마셔 본다. 맛있다! 몇잔 마셔야 잠을 못자고 인체에 어떤 영향이 있는지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운명적으로 점점 커피 한잔이 다가오는 것 같다. 언제까지 일 줄 모르는 남은 인생에 또 하나의 동반자를 만난 느낌이다. 빨리 알고 싶지도 많이 알고 싶지도 않다. 그저 오랜 벗처럼 천천히 느끼고 음미하고 가까워지고 그냥 생활이 되고 싶다.
오늘도 자기 전에 그동안 선물 받아 집안에 쌓여 있던 가요, 토라자, 파푸아, 갖가지 루왁 등을 꺼내 놓고 볶은 지 3개월이 지났는지 따져 보지도 않고 한놈을 골라 막내에게 갈게 하고 애써 준비한 드립 기구에 내려서 한잔 또 마셔본다. 어제와 다른 또 한잔의 커피에 변화 무쌍한 새로운 인생을 담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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