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위험한 쾌락, 아마누사(Amanusa)에서의 추억 > 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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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27) 위험한 쾌락, 아마누사(Amanusa)에서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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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6,581회 작성일 2018-11-01 00:23

본문

<수필산책 27 >

위험한 쾌락, 아마누사(Amanusa)에서의 추억
 
하연수 / 한국문협 인니지부 감사
 
 
 
지금은 아주 오래 전의 이야기가 되어버린 발리 아마누사(Amanusa)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며 타임머신을 타고 추억 속의 그날로 돌아가 본다.

나는 커피 잔을 들고 발리 아마누사(Amanusa)호텔 방 창가 탁자에 가서 앉았다. 내가 인도네시아로 오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바쁜 날, 받아 본 편지를 귀국을 앞두고 다시 찾아 읽었다. 중동에서 돌아온 친구가 해외 생활을 먼저 한 선배로서 내게 보내온 편지였다.
 
“친구야 튼튼한 몸, 머리, 그리고 도전 정신이 우리의 자산이다. 우리는 이 자산을 가지고 의무적으로 일을 해 주고 그 대가로 돈을 받는 외인부대 용병들임을 잊지 말아라. 돈을 대가로 받는 이상 일을 해 주어야 함은 우리 용병들이 꼭 지켜야 할 덕목이다. 의무 이상으로 일을 하고 대가를 받는 훌륭한 용병이 되자. 용병들에게 가장 큰 적은 바로 저녁 노을의 유혹이다. 우리는 이것들을 이겨내야 한다. 잊지 말아라. 친구야! 나는 졸업 후 첫 직장이 중동 사막에 있었다. 그런데 노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직장에서 약속한 4년을 채우지 못하고 불명예스럽게 3년 만에 돌아오게 되었다. 처음엔 내가 용병인줄 몰랐다. 그러나 돌아오고 난 뒤 나는 용병임을 알게 되었고 용병으로서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내가 받은 선문답 같은 친구의 편지는 그냥 해외로 떠난 나에게 용기 내라고 해 주는 위로의 말 정도로 여기고 지나 갔었다. 그때는 나도 내가 용병임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돌아 갈 날을 앞두고 내가 용병임을 느끼게 되었다. 
 
“과연 내가 용병으로서 의무 그 이상을 해내고 돌아가는 것일까?”
 
인도네시아 초기 정착의 숨가쁜 1년이 지나고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서 아름다운 저녁 노을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노을 속에는 고국에 두고 온 가족들의 모습이 보이고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아, 이것이 친구가 말했던 그 노을의 유혹이구나.' 그럴 때마다 일을 만들어서라도 가혹할 정도로 나를 더 몰아 부쳤던 지난 2년의 세월이다.  한국에서 직장 생활하면서 기껏 1시간 반도 안 되는 일본과 한국을 그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오고 갔던 내가 비행기를 두 번 타고 반 나절 가까이 가야하는 자카르타로 가기 위해 김포에서 대한항공 비행기에 올랐다. 홍콩에서 내려 인도네시아 국영 가루다 항공기로 갈아타고 밤 10시경 수카르노 하따( Sukarno Hatta ) 공항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은 암스트롱이 달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이나 다름 없다고 마음속으로 외쳤다. 그렇게 나와 인도네시아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들뜬 마음으로 용감하게 비행기 문을 나서는 순간 뜨거운 증기가 내 얼굴에 와 닿았다. 그 뜨겁고 습한 가마솥 열기에 압도 당하며 입국 심사대로 행했다. 
 
오래 된 목조 건물 통로에는 썩은 나무들의 칙칙한 냄새로 가득했고 곧 바퀴벌레가 스멀스멀 내 몸으로 와서 붙을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뭐, 후진국 오래된 공항 건물 이해해야지.' 주문을 외우며 입국 심사대로부터 이어져 온 긴 줄 끝으로 가서 붙어 섰다. 도대체 진도가 나가지 않아서 다시 봐도 그 자리에 있는 듯 했고 언제 입국 심사대 앞에 까지 도달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높은 자리에 앉아서 내려다 보며 여권 사진을 아주 꼼꼼히 살펴보는 출입국 직원 눈은 범죄 피의자 심문하는 수사관 눈빛 바로 그것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입국 자격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이 관문을 겨우 통과해서 수하물 찾는 곳으로 가는 입국자들을 따라가며 통관을 도와주겠다고 달라붙는 화물 포터들, 여름 날쇠파리들처럼 끈질기게 달라붙었고 그 뒤로 세관원들이 저승 사자처럼 버티고 있었다. 
 
어쨌던 이 험난한 관문을 다 통과한 후 자유의 공기를 기대하며 통로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담배 연기 가득한 공기 속에 갑자기 나타난 것은 검은 쇠 창살이었다, 마치 내가 유치장에 갇힌 듯, 이 철창은 공항 안 세상과 바깥 세상으로 갈라 놓고 있었다. 회사에서 보낸 사람이 분명 여기서 기다린다고 했는데 보이지 않았다. 우리에 갇혀 돌고 있는 명견, 도베르만처럼 숨을 헐떡이며 왼쪽, 오른쪽 돌며 푯말 이름을 찾아 다녔다. 사람 찾는 현지인들이 키보다 높은 검은 쇠창살에 첩첩이 붙어 빨아대는 담배불과 그 연기들은 이곳이 바로 화염지옥 같은 상황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도전을 해야 한다고 큰 소리치며 안정적인 직장과 좋은 급여를 뿌리치고 오고자 했던 곳의 모습이란 말인가? ' 진퇴양난의 난감함 속에서 왔던 길을 몇 번이나 되돌아보고 한 숨 짓고 있는데 칙칙한 손이 창살 사이로 나와 내 손을 잡고 흔든다.
 
“핼로, 아아르 유( Are you) 미스테르(Mister) 리?''
“노,노,  미스테르 리, 네버“ 소리지르며 그 남자의 칙칙한 손에서 재빨리 빼낸 내 손을 옷에다 몇 번이나 닦고 또 냄새를 맡아 본 후 겨우 안심했다. 지금은 현지인들과 손을 여러 번 잡아도, 포옹을 해도 아무렇지 않지만 그때는 모든 게 낯설었다. 

“빨리 잊어야 해, 주사위는 이미 던져져 있었다. 상품개발 회의 차 삼 개월마다 다녀오곤 했던 간사이 신공항의 깨끗하고 편리하고 친절함은 먼 세상의 일이다. '내가 선택한 일이다. 빨리 잊어버려야 내가 이 땅에서 살 수 있다.' 중얼거리며 내 이름 세 글자 표지판을 찾아 돌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아, 과장님, 하 과장님!” 어디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여기, 여기요!” 나를 부르는 소리의 방향도 모른 체 구세주를 만난 마음에 대답부터 했다. 철창 밖 수많은 사람들 뒤에서 얼굴이 흰 남자가 펄쩍펄쩍 뛰어오르며 내 이름이 적힌 종이를 흔들었다. 남자는 공항으로 오는 차가 밀려 늦었다고 여러 번 미안하다고 했다. 그 아수라장에서 구해주는 반가움에 지금까지 이 화염지옥에서 분노했던 마음들이 한 번에 썰물처럼 싹 사라졌다. 

이제 인도네시아 생활 2년이 지나고 며칠 후 돌아가야 한다. 돌이켜 보면 지난 2년 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열정적으로 일했던 날들이었다. 그 끔찍했던 공항 도착 후 그날 밤까지 모든 순간들이 아름답게 생각되는 순간이 왔다. 

나는 이 땅에 다시 올 수 있을까? 오랜 세월 신발 전문가로 대우받으며 살아왔지만 이제 그 신발산업이 한국에서 전성기를 보내고 인도네시아, 중국 등 저임금 국가로 이전하고 있다. 그럼 내가 서야 할 곳은 어디인가? 내가 돌아가면 옛날 나이키 일본(Nike Japan) 시장 팀장 자리를 주겠다는 최후의 보루는 있다. 그러나 신발 산업이 한국을 떠난 후에는 어떻게? 한국에서 얼마나 더 할 수 있을까? 이곳으로 다시 오느냐 아니면 한국에서 다른 일을 찾게 될까? 신발 일이라면 내가 자신 있는 분야이지만 다른 업종으로 가면 나는 이제 들어온 신입 사원들과 경쟁하며 말단에서 일을 배워야 한다. 
내 머리 속에 좋았던 과거와 암울한 미래가 뒤섞여 돌아갔다.
 
 
어제 도착한 발리 사누르 비치(Sanur Beach) 호텔 백사장에 다시 서 보았다. 호텔 오른편 모래 위 식당 주변에 영국 바이어 ‘이언 하드만(Ian Hadman), 젊은 피터 그리내쉬(Peter G )등이 나타나면 뚱뚱한 식당 매니저가 인도네시아 가물란 연주를 중단시키고 관타나 메라(Guantana Mera), 관타나모 여인이라는 쿠바의 아리랑을 크게 틀어 놓고는 여자 댄서처럼 몸을 흔들며 식당 밖으로 나오곤 했다. 젊은 피터가 부드럽게 춤을 추면 여기 저기 여인들이 와서 어울려 춤을 추었다. 이언이 나를 배려한답시고 모래밭 춤판으로 끌어낼 눈치를 보이면 나는 손뼉으로 박자 리듬을 맞추며 도망을 다녀야 했다. 서양인들 사이에 동양인이 어울려 춤을 춘다는 것이 썩 보기 좋지 않음을 알고 있는 나였다. 
 
“저 분위기에 빠져 주어야 하는 내 처지가 말이 아니지만 지금 나는 해외영업 책임자로 내 의무를 다 하고 있다.” 나의 이런 갈등 속에서도 카라비안 뮤직이 흐르는 그 축제 분위기는 항상 흥겨웠다. 해 질 무렵 아마누사(Amanusa) 호텔 방 앞으로 나오니 상쾌한 꽃 냄새로 가득했다. 하얀 꽃들과 망울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길쭉한 꽃대들이 꽃병에 꽂혀 있었다. 그 꽃병 앞으로 얼굴을 가까이 대보고 있는데 호텔 여직원이 뒤에서 미소 지으며 서 있었다. 
바로 가져다 놓은 꽃처럼 여직원의 미소가 상큼하고 좋았다. 
 
“아, 꽃 향기가 좋아요. 꽃 이름이 뭐지요.”
“스답말람( Sedap Malam )이라고 합니다. 젊은 여직원이 미소 짓는다.
“스답말람? 무슨 뜻이지요. ?”
“밤의 향기라는 뜻입니다. ”
“혹시 꽃 말도 있어요?”
“음, 꽃말이 위험한 쾌락? ”
 
 
여직원이 말해 놓고 좀 수줍은 듯 부끄러워했다. 꽃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느냐고 칭찬해 주었더니 꽃 관리가 자신의 일이라고 했다. 여직원에게 엄지를 척 올려주고 나왔다. 앞으로 돌출한 높은 성벽 누각 위에 올려 놓은 듯한 커피숍에 앉으니 마치 내가 중세 어느 왕국 성 누각에 앉아 있는 기분이 들었다.
 
“아, 오늘 나는 왕자다.”
 
늦은 오후 실바람 부는 발코니 커피숍에서 석양이 붉게 내리는 인도양을 바라본다. 노을의 유혹….지금 인도양위로 내리는 저 노을의 유혹에 눈물이 날 뻔했다. 
내가 지금 위험한 쾌락에….? 두려움과 걱정 속에서 즐거운 일에 빠지기도 하고,내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백수건달이 된 내가 최고급 호텔에 머물고 있다는 자체가 위험한 쾌락이 아닐까 생각된다. 백수가 된 이 순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이자 자유로운 순간이다. 위험한 이 순간을 가장 멋진 장소에서 보내며 두려움 속에서 즐기는 휴가! 스답말람( Sedap Malam) 꽃말처럼 나는 지금 ‘위험한 쾌락’에 빠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내 인생에 가장 거대한 자유 여행의 기회다. 위험한 쾌락의 백수, 내 평생 다시 오지 않을 아마누사(Amanusa)에서의 위험한 쾌락의 밤은 그렇게 깊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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