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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46) 어머니의 꽃, 군자란 / 김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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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6,807회 작성일 2019-03-13 15:18

본문

< 수필산책 46 >
 
어머니의 꽃, 군자란
 
김재구 /한국문협 인니지부 사무국장
 
 
 
꽃도 주인의 마음을 알아줄 수 있을까? 간혹 똑똑한 강아지들은 주인과 헤어져 수 만리 떨어져 있어도 주인을 잊지 못해 주인 집을 찾아왔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꽃도 주인을 사랑하고 주인과 마음을 같이 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더욱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 어머님이 키우시던 꽃이 어머님의 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꽃피울 때가 아님에도 꽃을 피웠던 때가 있었던 것이다. 서울 노원구 하계동에 사시는 어머니는 조그만 아파트에 혼자 살고 계신다. 베란다에는 여러 식물들이 자라는데 군자란을 유독 예뻐하고 사랑하신다. 군자란은 특이하게도 적도같은 인도네시아처럼 뜨거운 열대 지방에서는 살 수가 없는 식물이다. 오직 겨울의 강추위를 이기고 고통을 겪어야 3월 즈음 봄비를 맞으며 노란 오렌지 빛깔의 꽃을 피우는 식물이다. 한국같이 매서운 추위가 있는 곳에서 오히려 잘 자라는 식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어쩌면 군자란과 우리 어머니는 비슷한 운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어머니는 군자란을 보면서 혹시 자신의 삶을 반영하고 위로받고 계셨는지 모르겠다.
 
 
 
어머니는 한국의 슬픈 근대사를 다 겪으신 분이다. 1939년 일제 강점기 때 하루꼬(춘자)라는 이름으로 경남 마산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마산댁이다. 한국인이 한국 이름을 쓸 수 없었던 슬픈 시대를 살아오셨고, 1945년 해방이 되던 해 일본 사람들이 한국인들을 다 잡아 죽인다는 소문에 외할머니 등에 업혀 일본 사람들을 피해 다니며 공포의 시기를 겪기도 하셨다. 그 당시 한반도는 남북한으로 갈라지고 서로 대립하며 암울했던 시대다. 특히 남한은 좌익과 우익의 대립과 자유당 때의 부정부패 등으로 사람 살기 편하지 않았던 때, 어머니는 가난한 시골이 싫었고 막연히 서울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고 하신다. 같은 마을에서 시계방을 하는 사람의 프로포즈를 거절하고 서울에서 인쇄소를 한다는 아버지와 선을 봐서 결혼하고 설레는 맘으로 왕십리로 시집을 오게 되었다. 하지만 사실 그 때부터 어머니는 더 큰 인생의 고생 길을 걷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약주와 친구들을 좋아하시고 낭만적인 인생을 살았기에 경제 관념이 없으셨다. 버는 돈을 집으로 가져오지 않고 친구들과 모두 탕진해 버리고 직장생활에도 적응을 잘 못하셨다.
 
4.19 학생 의거가 일어나던 즈음 어머니는 나의 형을 낳으셨고, 그리고 5.16 군사 정변이 나던 즈음에는 누나를 낳았는데 그 당시 아버지는 장난감 공장을 시작하셨다가 동업자가 공금을 모두 들고 야반 도주하는 바람에 거리로 나 앉게 되었다. 그 때 나를 임신하셨다고 하셨는데 어머니는 너무 배가 먹고 싶었지만 돈은 없어 친한 친구에게 사정을 해서 배를 딱 하나를 얻어 먹었는데 그 맛을 지금도 있지 못한다고 하신다. 그리고1967년 여름 유명한 강재구 소령이 부하들을 구하려 떨어진 수류탄에 몸을 날리던 그 해 10월에 내가 태어나 졸지에 나는 재구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가난이 주는 힘겨운 삶으로 인해 내 나이 7세 때 우린 왕십리 산동네 1004번지로 이사를 해 둥지를 틀고 살게 되었다. 비록 대문은 없고 방문을 열면 파란 하늘이 그대로 보여서 여름엔 아주 시원했는데 겨울엔 몹시도 춥게 살았다. 특별히 먹는 것도 많이 부족하고 연탄도 부족해 심리적인 추위는 더 했던 것 같다. 그 때 내가 무릎을 다쳤는데 병원 갈 돈이 없어서 무릎을 완전히 못 쓰게 되어 초등학교때 많은 시간을 학교도 못 가고 날려 버렸다.어머니는 그 때 생각만 하면 아직도 눈물을 그치시지 못한다.
내 나이가 16세 되던 때 아버지는 짐을 싸서 행선지도 말씀 않고 세상이 싫다고 어디론가 떠나셨다. 어머니는 오히려 더욱 이를 악물고 우리 삼형제를 홀로 기르셨다. 다행히 1996년에 대한민국에 의료보험이 보편화 되었고 나는 경희의료원에서 오른쪽 무릎에 인공 관절을 해 넣어 제대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998년 결혼을 하고 선교단체의 후원과 어머니가 모아 놓으신 돈으로 미국 유학의 길을 가게 되었다. 공항까지 나온 어머니와 안녕을 나눈 후 나는 거의 16년이 지나도록 어머니의 얼굴을 직접 뵐 수가 없었다. 
 
2001년 미국 뉴욕에서 911테러가 일어날 때 나는 뉴욕 시의 퀸즈 지역에 살고 있었다. 테러범들이 비행기 동체로 월드트레이드센타를 들이 받아 불타서 무너지는 모습을 나는 강 하나 정도 거리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그 때 어머니는 내게 전화를 하셨다. “재구야 몸 성히 잘 있나? 안 죽었나? 집으로 고마 오거라 거기 미국은 살 곳이 못되는 기라” “어머니 괜찮습니다. 좀 더 있다 가겠습니다” 어머니는 내가 그 때 영문학 석사 과정을 아주 낮은 성적으로 졸업한 이유로 모든 지원한 영문학 박사과정에서 낙방을 하였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하지만 미국 당국은 911의 테러범들이 미국 유학을 와서 졸업하고 테러를 저질렀다는 것이 들통나 졸업을 하고 직업을 얻지 못한 모든 외국인 학생은 반 강제로 미국을 떠나야 했다. 그런데 나는 아직은 영문학에 대한 꿈이 있어서 집으로 도저히 돌아갈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미국에서 불법 체류자 신세가 되더라도 남기로 했다. 이 모든 것이 어머니에게는 너무나도 가슴이 아프고 괴로운 일이었다. 그 후 나는 정신없이 바쁜 삶을 살았다. 어머니에게 안부 인사를 드릴 시간과 여유도 없었다. 미국 정부에 탄원서를 내어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 하여 허락을 받아 냈고, 나는 결국 문학 공부는 포기하고 루이지애나 주립대학에서 언어학과 박사학위를 받게 된다. 그러나 문학이 아닌 언어학은 더 이상 계속할 만한 학문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2009년 당시 미국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경제 상황이 아주 좋지 않아 각 회사와 학교 마다 감원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외국인은 미국내 직장을 가지기가 너무 어려워졌다. 100여 군데를 지원해도 오라는 곳은 없었다. 오직 한 곳의 나라인 인도네시아의 기독교 국제학교에서 영어 잘하는 크리스찬 한국어 선생님을 찾는다고 해서 지원을 하게 되었다. 학교 측에서는 대환영이었다. 일단은 먹고는 살아야하겠다고 선뜻 직업을 가졌지만, 난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벌써 인도네시아에 산지도 8년이 넘어 간다. 그동안 인도네시아에서 평신도 선교사로 한국어 선생으로 열심히 살았다. 어느덧 인도네시아에 정착한 지도 여러 해가 지난 2012년 여름, 그 때 나는 모든 경제적인 형편이 풀리기 시작했다. 적도에서 봄을 맞이하는 느낌이었다. 그제서야 맘 속에만 있었던 꿈에도 그리던 어머니를 볼 날이 왔다. 어머니와 김포 공항에서 헤어진지 16년 만이다. 머나먼 나라에 살던 아들이 취직하여 고향에 돌아온다는 소식에 어머니도 밤잠을 설쳤다고 하셨다. 감격스럽게도 자카르타 공항에서 대한항공을 타고 아내와 아들과 함께 인천 공항에 내리던 날 나는 피가 끓는 기쁨을 누렸다.
 
그날, 어머니의 얼굴도 마치 군자란의 꽃처럼 환하게 피어오르셨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군자란은 보통 3월, 4월, 늦어도 5월에 봄비를 맞으며 피어야 할 꽃이다. 하지만 그 시기에는 전혀 꽃을 피울 생각이 없다가 나와 어머니가 상봉한 그해 7월에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 어머니의 꽃, 군자란은 여름에 봄 비처럼 나타난 막내 아들 때문에 기쁨으로 꽃이 되어버린 어머니의 마음을 아는 것 같았다. 어머니 아파트의 군자란은 장마도 끝나가는 그해 여름에 환한 주홍 빛깔의 꽃을 피우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기쁜 얼굴처럼 피어난 군자란이 정말 신기하기만 했다.
 
지금도 나는 어머니의 환한 얼굴이 오버랩 되어 신기함을 더했던 그해 여름에 핀 군자란이 바로 어제일처럼 행복을 불러온다. 정말 사람의 마음이 간절하면 자연인 꽃도 영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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