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8) 초록서점의 추억 / 이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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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산책 8 >
초록서점의 추억
이 은 주 /수필가 (한국문협 인니지부 부회장)
서점이 없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있었는데 순식간에 대형 오락실로 바뀌어져 있었다.
장사가 안 된다고 새 서점 주인이 걱정하더니 끝내 문을 닫고 말았다. 초록서점이라 쓰인 작은 간판이 인상적이었다. 집주위는 술집과 음식점으로 가득 찼고 그 틈 사이로 어울리지 않게 서점이 있었다.그 서점을 처음 알게 된 건 내가 중학교 때였다. 독후감 숙제가 있어 며칠을 고민하다 서점으로 갔다. 열 평 남짓한 조그만 그 서점은 책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고, 서점에 어울리지 않게 여기저기 화분이 놓여 있었다. 어떤 책을 볼까 망설이는 내게 서점 주인은 ‘부활’이라는 책을 권했다. 다소 부담스러울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꼭 한번은 읽어야 한다는 얘기를 하셨다.
나는 첫 장부터 빨려들고 말았다. 꼬박 밤을 새워가며 책을 다 읽고 난 후 벅찬 감동으로 가슴을 쉽게 식히지 못했다. 만화책 밖에 몰랐던 나에게 책의 감동은 진한 여운을 남겼다. 교내 독후감 대회에서 그 책으로 상을 받게 되었다. 교지에 실린 글과 상장을 들고 서점으로 달려갔다.
서점 주인은 내가 상을 받아 온 것을 그분의 딸이 상을 받은 것처럼 마냥 기뻐해 주었다.그 일을 계기로 난 서점주인과 가까워졌고 방과 후, 늘 서점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 후 그곳은 내방처럼 편안한 곳이 되었다. 카프카의 변신을 읽고 며칠째 벌레가 되는 꿈을 꾸느라 잠을 설쳤고, 어린왕자의 목소리에 빠져 대사를 외우느라 밤을 밝혔다. 그곳의 책들은 한 소녀가 꿈의 열차를 타고 책을 배경삼아 여행을 떠나는 재미에 푹 빠지게 했다. 그때의 내 꿈은 서점 주인이 되는 것이었다.
서점 주인인 그분은 나이가 들어 힘이 들면 이 서점을 내가 맡아 달라고 하셨다. 이렇게 많은 책을 가진 서점 주인 이 부러웠기에 흔쾌히 승낙했다. 그 후 나를 위해 따로 책코너를 마련해 주신 덕에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책을 통해 사랑을 배웠고 미움을 다스리는 법과 행복의 척도가 어디쯤인지도 알게 되었다. 그때 읽은 선인들의 말씀이 내 삶의 지표가 된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서점 주인은 장미를 좋아했다. 그것도 깨어질 듯 맑은 노란 장미를. 가끔 용돈을 아껴 장미를 사드리면 야윈 볼에 웃음이 가득했다. 유난히 검은 얼굴에 안긴 노란 장미가 더욱 노랗게 보이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우리 집은 도심 중심가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대단지 아파트 앞의 서점의 크기는 대단했다. 하루 종일 다녀도 제목조차 다 못 볼 정도의 방대한 분량의 책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마치 울창한 수목들에 에워싸인 듯 서늘한 느낌을 받았다. 또 다른 만남을 위해 대형 서점을 분주히 들락거렸다. 그러다보니 어느덧 초록서점은 자연스레 발길이 뜸해졌다.그렇게 일 년이 지나갔다.
토지가 읽고 싶어 초록서점에 들른 나에게 그분은 내가 어디 병이라도 난 줄 알고 걱정을 하셨다고 했다. 한쪽 구석에 마련된 내 자 리는 여전히 노란 장미와 함께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밀린 책들 다 읽으려면 바쁘겠다는 말씀에 가슴이 뜨끔했다. 그 책들은 이미 대형 서점에서 다 본 것들이라 아무 말도 못했다. 토지 책을 살려고 하니 권수가 빠져 있었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 한 번에 끝을 맺는 내 성격을 아는 그분은 미안해하면서 내일 꼭 갖다 놓으마 하셨다.
아쉬운 마음으로 서점을 나섰다. 그렇게 커 보이던 서점이 이젠 답답해 보였다. 그분도 이런 나의 마음을 아는 듯 내일 꼭 오너라 했지만 나는 다시 대형 서점을 찾기 시작했다.
책들도 다양하게 있고 가격 할인까지 되며 독서토론회도 열려 내가 좋아하는 작가도 만날 수 있는 대형 서점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하지만 내 책장에 늘어나는 책을 볼 때마다 아저씨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 노란 장미를 안고 달려가고 싶었지만 차일피일 미루고 말았다.
지난 겨울 평소 좋아하던 작가를 만났다. 초록서점 주인도 좋아하던 작가라 새 책이 나오면 서로 먼저 읽으려고 신경전을 했던 작가를 만나고 오던 날, 노란 장미를 한 묶음 사들고 서점 문이 닫힐 시간에 머뭇거리며 초록 서점으로 갔다. 구조가 많이 바뀌어져 있었다. 내 코너가 있던 곳엔 학생 참고서가 놓여 있었고 화분과 노란 장미는 보이지 않았다. 낯선 물건들만 5 년 만에 들어서는 나를 맞아 주었다. 무슨 책을 찾으세요? 젊은 청년이 내게 다가왔다.
이십 년 전 그분이 내게 묻던 말과 똑같았다. 얼굴마저 비슷하게 닮아 잠시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 했다. 떨리는 목소리로 “주인이 바뀌었나요?”묻는 나에게 청년은 잊고 있었던 그 동안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놀랍게도 그분은 일 년 전에 돌아가셨단다. 이 서점을 정리하라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돌아가시는 그 날까지 서점 일을 하셨다고 한다. 조카에게 서점을 맡아 달라는 그분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지금 서점을 운영 하지만 어려움이 크다고 했다.
이런 조그만 서점이 대형 서점과 맞붙어 가당 키나 하나요. 일 년이 지났는데도 손님이 없어 큰일이에요. 그래서 문을 닫아야겠다고 한다.
나의 손에 들려진 노란 장미를 보며 혹시 아저씨에게 토지 책을 부탁한 아가씨냐고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어려운 문제를 맞히기라도 한 듯 청년은 기뻐하며 내게 말했다. 이 출판사가 문을 닫았잖아요. 책 권수 맞추기가 힘들다고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팔지 못하게 했어요. 어떤 아가씨가 꼭 찾으러 온다고요. 그분의 손길이 묻어있는 16권의 책을 받은 손이 떨렸다. 더 이상 그분을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밀려드는 그리움으로 변해 내 마음을 눌렀다. 늘 이 녀석이 올 때가 됐는데 시집이라도 갔나? 하시며 책의 먼지를 닦으셨다는 그 분, 꺼져가는 혼을 태우며 지키려 했던 그분의 서점, 어린아이임에도 불구하고 당찬 모습으로 토지를 지키려던 책 속의 서희!
두 사람의 모습이 과거의 시간 속에 서서히 겹쳐진다. 토지의 책속에 초록서점과 주인 아저씨의 그리움으로 지친 듯 걸어 다니는 내가 보인다. 나의 마른 토지에 내가 심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그분과 초록서점을 만나 행복했던 웃음소리가 오락실의 기계음에 튕겨져 나온다. 지하실에서 막 꺼내온 책 마냥 눅눅해진 마음은 이 거리의 이방인처럼 낯설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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