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특별기고 -만남은 맛남 /장호병 > 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본문 바로가기

팝업레이어 알림

팝업레이어 알림이 없습니다.
사이트 내 전체검색

ae7a633ecc5aba50dda8fe8871ff253a_1671380259_2972.jpg

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25) 특별기고 -만남은 맛남 /장호병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6,533회 작성일 2018-10-17 10:52

본문

<수필산책 25 / 특별 기고>
 
만남은 맛남
 
장호병 /수필가 (한국 수필가협회 이사장)
 
 
수 년 전 시각장애학생들의 미술전시회에 간 적이 있다. 찰흙으로 빚은 흉상에서 하나같이 정상보다 크게 튀어나온 눈이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시각장애아들에게도 ‘세상으로 나아가고, 세상을 받아들이는 관문’이 눈이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들에게 육신의 눈은 다만 있어야 할 자리를 표시하는 퇴화의 흔적이자 결핍의 상징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이 맹아학교의 이웃 농아학교에 친구가 오래 전 근무한 적이 있어 지도교사인 수녀님과 말문이 자연스레 트였다. 두 학교가 전국장애인체육대회에 선수를 내보낼 때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선수단의 규모가 크지 않아 그 해는 버스 한 대를 이용하여 양 학교 선수가 참가하였단다. 대회를 마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인솔교사끼리 만났다. 
 
맹아학교 아이들은, “우리는 이 아름다운 세상의 소리를 두 귀로 들을 수가 있고 또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말로 표현할 수 있어 행복합니다. 농아학교 아이들은 듣지도말하지도 못하니 너무나 불쌍해요.”하며 선생님 앞에서 슬픈 표정을 지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버스 안에서 재잘대던 아이들은 모두 자기학교 시각장애학생들이었다.
 
화가들의 경우, 뜬 눈으로 대상을 관찰하고 감은 눈으로는 내면을 성찰하여 그림으로 나타낸다고 한다. 맹아들에겐 감긴 눈이 있어 오히려 정상인의 눈으로 읽지 못하는 부분까지 읽어내는 성숙한 면을 보여주었는지도 모른다. 남의 목 가시보다 제 손톱 밑 가시가 더 아프게 느껴지는 게 인지상정이다. 남을 헤아리기엔 자신들이 가진 장애가 적지 않음에도 그들은 농아들이 불쌍하다고 입을 모았다.
 
 
맹아들도 사람이기에 닫힌 문 앞에서, 앞을 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농아들을 부러워한 나머지 시기의 대상으로 삼거나 자신을 비관할 수도 있었다. 아니면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그들을 하찮은 부류로 무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반목과 따돌림이 횡행하는 이 시끄러운 세상에서 제대로 보는 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바가 적지 않다.

맹아들은 농아들의 청각불능에 자신들의 처지를 투영하였으리라. 그리고는 측은지심을 느꼈을 것이다. 농아들이 그 온전한 시각 하나를 자랑한다 할지라도, 맹아들은 콧방귀를 뀌거나 애써 외면하지는 않을 것이다. 맹아의 입장에서는 의당 자랑할 만한 일로 받아들여진다. 또 듣고 말할 수 있는 자신들의 자랑거리에 주목할지도 모른다. 

나와 다른 남에게서 ‘나’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리고 이 세상에 던져진 고독한 존재들끼리 측은지심을 느낄 수 있다면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면서 함께 살아갈 수 있으리라. 또 내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별종들에게서는 언젠가 나의 빗나간 모습일 수도 있으려니, 비난하거나 탓하기보다는 타산지석의 경계로 삼아야 할 것이다.
농아학교 아이들 역시, “우리는 이 아름다운 세상을 두 눈으로 즐길 수가 있는데, 맹아학교 아이들은 앞을 볼 수 없으니 불쌍해요.”라고 말했다.

조물주는 왜 나를 직접 만날 수 없도록 했을까? 남을 통해서만이 나가 어떤 존재인지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은 나 못지않게 남도 존중해야 된다는 의미이다. 너를 만날 때 나의 또 다른 ‘나’가 증인으로 동석하고 있다는 사실을 평소 깜박 잊게 한 것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준 것이리라. 매사에 ‘나’의 동석을 의식한다면 녹음기 앞에서, CCTV 앞에서처럼 우리는 얼마나 부자연스러워하겠나. 가벼운 거짓말은 물론 아무리 화가 나도 막말처럼 심한 표현을 못할 것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만남의 연속이다. 눈을 뜨면서부터 감을 때까지 수많은 만남에 꼭꼭 등장하건만, 정작 잊고 있는 것 바로 ‘나’자신과의 만남이다. 눈을 두 개나 가지고 있어도 나는 나 자신을 볼 수가 없다. 나 속의 또 다른 나를 포함한 타자를 통해서만이 ‘나’를 만날 수 있다. 누구를 만나든 나의 글속에는 늘 ‘나’가 함께 한다. 그래서 문학을 통한 만남은 맛남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 장호병 /수필가 : 수필집 <웃는 연습><하프 플라워><실키의 어느 하루><너인 듯한 나>와
          이론서 <글, 맛있게 쓰기>, 평론집 <로고스@카오스>, 영문 에세이집 <Half Flower>가 있다. 
          대구수필문학상과 대구문학상을 수상하였고 현재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 계간 문장 주간을 맡고 있으며,
          대구교육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Copyright © PT. Inko Sinar Media.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