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 수첩 속 그 이름 / 하연수 > 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본문 바로가기

팝업레이어 알림

팝업레이어 알림이 없습니다.
사이트 내 전체검색

ae7a633ecc5aba50dda8fe8871ff253a_1671380259_2972.jpg

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198) 수첩 속 그 이름 / 하연수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3,204회 작성일 2022-02-18 10:37

본문

<수필산책 198>
 
수첩 속 그 이름
 
하연수 / 수필가 (한국문협 인니지부 감사)
 
수명을 다한 소중한 수첩을 들고 낙엽을 태우는 불 앞에 섰다. 수첩 속에서 가장 오래 일 순위 자리를 지키고 있던 사람이 생각난다. 신발재봉 최고 전문가가 되는 꿈을 가지고 있던 P주임이다. 신발산업이 해외로 모두 떠나고 실업자로 있던 P주임에게 해외공장 근무를 제안했다. 그날 그는 해외에서 자신의 꿈을 다시 펼쳐보고 싶다고 했다. 며칠 후 갑자기 가장인 자신이 어머니를 두고 해외근무지로 떠날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했다. P의 대답은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도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성인이 된 두 동생들이 어머니와 같이 살고 있는데도 해외 근무가 어렵다고 했다. 오랜 세월 가장이라는 무게를 벗는다는 것이 너무 두려운 모양이다.
 
P주임은 해외영업부로 가는 복도에서 가끔 마주치는 직원들 중 한 사람이었다. 이층 재봉현장 바로 앞인 그곳에서 사람을 마주치면 서로 목례만 하고 지나쳤다. 유독 한 직원이 나이든 상급자를 만나면 인사를 하고 벽 쪽에 비켜서서 상대방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사람이 많이 다니고, 바쁜 신발공장에서 그런 예를 갖추는 행동은 좀 불편했다.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면 ‘예’ 라고 대답하며 다음에 마주하면 여전히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재봉과장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그가 바로 P반장이고, 청정지역 남도에서 온 사람이라고 했다. 청정지역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 내가 멍한 표정을 했다. 남도라는 말은 신발공장 인력 담당자끼리 통하는 말로 광양에서 해남까지 지역을 말한다. 이 지역은 부산 신발인력의 절반을 공급하는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명절 전부터 회사 앞에서 귀성객을 실어 나르는 버스 창에 붙어있는 목적지가 대부분 광양에서 해남 행이었다. 삼 공장 재봉과장도 인력 수급을 위해서 남도에 가서 머무는 날이 많았다. 특히 졸업 시즌이 오면 재봉과장은 K고무 예비입사 서류를 들고 그 지역 중,고등학교를 찾아간다고 했다. 졸업반 학생들을 모아놓고 입사 원하는 학생들에게 신청을 미리 받아 놓는다고 했다. P주임도 그렇게 해서 K고무에 온 남도 중학교 학생 중 한사람이었다.
 
청정지역에서 부산으로 온 동료들 대부분은 시간이 지날수록 남도 전통예절을 잃어가지만 P는 그 지역 예의범절을 지키고 있는 속 깊은 사나이였다. P의 주임 진급은 삼 공장 내에서도 부정적 말들이 많았다. 특히 경력, 학력 등에서 유리한 선임반장들을 뛰어넘은 초급반장 주임진급이라 더욱 그랬다. 나이와 경험 많은 선임반장들의 저항을 불러온다는 우려의 목소리였다. 심사에 참여했던 생산부장은 개혁 실천습관이 선대회장의 자리를 이어받은 젊은 부회장의 경영방침인 개혁실천이 반영되었다고 했다.
 
K고무에는 이론에는 밝으나 행동과 실천은 잘하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많고, 이것은 K고무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고 젊은 부회장이 질타했다. K고무에서 실세로 자리 잡고 있는 명문학교 출신들에 대한 기선 제압의도가 숨겨진 말이었다. 재봉현장을 찾은 부회장은 P반장의 행동이 가물치처럼 활발하다고 했고, 생산부장은 P반장이 행동력 있고, 개선개혁 실천습관이 뛰어난 직원이라고 했다. 물론 부회장의 이런 관심이 P의 진급에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개선개혁 실천습관은 재봉보조 시절부터 형성되어 왔고, 실제로 많은 결과물을 만들어 냈다고 했다.
 
P의 진급은 충분한 자격을 갖춘 진급임이 틀림없어 보였다. 해외영업 부장과 일본 수출용 신제품 회의를 마치고 재봉현장을 둘러보던 날이 P주임이 일하는 모습을 직접 보게 된 첫날이었다. 해외영업부에서 나와 이 층 복도로 나오니 초겨울비가 건물 사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K고무 해외영업 부장이 문을 밀고 들어서고 내가 뒤따라 들어갔다. 순간 내가 마치 사이비 종교 집단 장소에 온 것 같은 전율이 흘렀다.
 
옅은 하늘 색 옷을 입은 재봉공들이 재봉기와 하나 되어 움직이고 있었고, 재봉라인 사이로 사람들이 바쁘게 오고가지만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오직 짜르르 부드럽게 흐르는 재봉기 소리뿐이었다. 수 백 대 재봉기들이 만들어내는 소리는 양철지붕에 내리는 빗소리 같기도 했고, 넉 잠들기 전 누에들의 뽕잎 먹는 소리 같기도 했다. 어느 재봉공장에서도 볼 수 없었던 신기한 모습이었다. 멀리서 품질관리 계장이 발소리를 낮추며 급히 와서 인사를 했다. 재봉과장 부재에 미안해하며 현장관리가 문제없느냐고 품질계장에게 물었다. 현장관리는 P주임이 한다고 했다. 부장은 일본 시장용 신제품 시험생산 진행 브리핑을 재봉과장 대신 P주임이 하라고 했다.
 
관리실 창 너머 안을 보니 하얀 보드 주변에 현장 조, 반장들이 모여 있다. 하얗게 반짝이는 보드가 보이고, 그 앞에 열 명도 더 되어 보이는 조, 반장들이 P주임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재봉현장에서 산전수전을 경험했을 베테랑 조, 반장들이 P주임에게 집중할 수 있을까 궁금해 졌다. 부회장뿐 아니라 누구도 이 모습을 보면 궁금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 수 없는 묘한 긴장감이 재봉현장으로 전달되는 듯 느껴졌다.
 
 
품질관리계장이 관리실 안으로 안내했다. 긴 나무 테이블 위에 재봉공정 순서에 따라 재단 물과 공정별 갑피부분들이 놓여있다. 여직원하나가 따뜻한 커피를 가져왔고, 우리는 그 테이블에 앉아서 달달한 커피를 마시며 P주임을 기다렸다. 잠시 후 P주임이 우리 테이블로 와서 공손하게 인사했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작은 땀방울이 맺혀있다. 복도에서 만났을 때 공손한 그 모습은 보이지 않고 전문가의 모습이 보였다. 신제품 분임토의를 마무리 하고 오겠다며 급히 뛰어갔다. 재봉과장에게 들은 이야기도 있고 해서 일에 대한 외고집이 오히려 P주임을 더 돋보이게 했다.
 
재봉과장 말에 의하면 P는 주임이 되기 훨씬 전부터 현장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다고 했다. 가난으로 상급학교 진학을 못했던 P의 동료들은 K고무 야간 과정에 등록해서 공부를 했다 한다. 남도 시골 중학교를 마치고 온 P도 당연히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동료들이 공부를 할 때 P는 현장에 남아 재봉기술을 더 익혔고, 작업 개선 방법 등을 연구했다.
 
P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재봉과장의 적극적 지원이 있어서 가능했다. 가난한 고향 가족들에게 돈을 보내야하기에 일자리를 잃지 말아야 하고. 월급을 주는 곳에서 꼭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 P의 생각임을 재봉과장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일 뿐만 아니라 남들이 싫어하는 일, 하지 못하는 일까지 찾아서 하는 습관은 대졸 신입사원들과 경쟁하는 주임 진급을 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재봉과장은 P를 생존의 날갯짓을 끊임없이 하는 ‘을숙도 고니’ 라고 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수십 년 동안 보물처럼 간직해 온 내 소중했던 수첩을 꺼내보았다. 청회색 표지에 신발 전문가 구인 역사의 때가 베여서 그런지 반질반질 윤기까지 난다. 그 소중한 수첩을 잡은 손을 불길 속으로 넣고 가만히 바라보았다. 수첩을 놓은 내 손이 허공 밖으로 나왔다. 섭외 일 순위였던 소중한 인재로 내 기억 속에 오래 남아있던 그 이름은 어느새 화염을 타고 훨훨 허공으로 흩어져 날고 있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Copyright © PT. Inko Sinar Media.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