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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209)업햄의 편지 /하승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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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7,492회 작성일 2022-05-06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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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209>
 
업햄의 편지
 
하승창/한국문협 인니지부 회원
 
내 이름은 업햄, 계급은 상병이지만 행정 특기병과로 입대한지라 사실은 이제 막 훈련소를 수료한신참이라네.나는 바로 며칠 전에이 낯설고 머나먼노르망디에 왔지.각종 서류를 작성하고 번역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레인저 부대의 지휘관이 나를 부르더라구. ‘라이언’ 이라는 일병을 찾으러 가는데 같이 가자는 거야. 하늘이 노래지더군, 게다가 목적지는 적군이 우글거리고 있는 미지의 땅이라니! 하지만 임무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 군인 아닌가? 결국 나는 총보다 익숙한 타자기를 내버려둔 채 몽당연필 하나만 주머니에 꽂고 길을 떠나게 되었지. 비행기에서 내려 차를 타고 달리는 동안 보이는 것은 그저 숲과 들판 뿐이더군,암담했지.중부 자바에 오기는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스마랑은 커녕 족자카르타도 아직 가보지 못한 내가 아닌가? 백팩에 트렁크 하나를 끌고 근무지에 도착했을 때의 느낌이란…딱 10년 전 인도네시아 땅을 처음 밟았을 때가 생각나 웃음이 나오더군. 왜냐하면 그때도 백팩 하나에 트렁크만 들고 왔었으니까. 사실 겁도 났다네. 말이 좋아 관리자일 뿐 내가 여기에서 돌아가는 일에 대해 아는 것이 뭐가 있겠나?그저 처음부터 배운다는 자세로 노력하자고 마음을 먹었지만 급박하게 돌아가는 생산 현장의 한가운데 몸을 들이고 보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더군.
 
 
“업햄! 업햄! 빌어먹을 탄약 갖다 달라고!”
내가 맡은 임무 중의 하나는 탄약을 공급하는 것이라네. 싸움에 익숙한 전우들이 적에게 기관총을 갈기는 동안 나는 이곳저곳에 배치된 그들의 매복 진지에 신속하게 탄약을 전달해야 하는 거지. 나름 각오는 단단히 하고 있었지만 새카맣게 몰려오는 적들을 보니 눈앞이 캄캄해지더군. 실전을 경험하기는 커녕 총 한 번 제대로 쏘아보지 못한 내가 아닌가? 총탄이 핑핑 귓전을 스치고탱크가 퍼붓는 포탄이 작열하는, 마치 한 폭의 지옥도와 같은 전투의 현장, 고백하건대, 나는 이런 전투를 치러 본 적이 없다네.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굉음과 함성과 비명소리에 그만 다리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한 적도 많았지.
 
“업햄! 업햄! 빌어먹을 자재 갖다 달라고!”
나는기계 소음과 열기로 가득한 생산 현장과 사무실을 쉴 새 없이 오고간다네. 잘 다려진 바띡 대신 땀에 절은 셔츠를 입고, 반짝거리는 구두 대신 흙 묻은 운동화를 신은 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거야. 자재 공급에 문제가 생기면 생산에 차질이 생기니까 납품처에 메시지를 던지고 전화를 걸어 독촉해야 하는 거지. 정신이 없더군, 인해전술로 밀려드는 주문에 게릴라처럼 치고들어오는 추가 물량까지 소화하려면 자재만 챙겨서는 안 돼. 정밀한 생산 계획을 짜서 재고를 정확히 관리해야 납품 일정을 제대로 맞출 수가 있으니 말이야. 이쪽에서 납품이 제때 이루어지지 않으면 고객사 측에서도 납기를 맞출 수가 없으니 본사 영업팀과 고객사에서는 매일같이 나에게 요청을 하는 거지.
 
“업햄! 업햄! 빌어먹을 납기 맞춰 달라고!”
꽤 힘들었어.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 곳에서 두 달 동안 낯선 동료들과 함께 먹고 자며 전투를 치러야 했지. 하지만 이것은 이제 시작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네. 우여곡절 끝에 결국 몰려온 적을 격퇴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것으로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지 않나? 이 전쟁이 언제 끝나게 될 지내가 언제까지 여기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지는 모르지만 이제 그런 것들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네. 오랜 경험을 쌓은 베테랑 전우들이 이렇게 말해주더군. 일단 전쟁에 참가한 이상 다만 이 하루를 어떻게 살아남을지만 생각하고 오직 눈 앞에 보이는 적에만 집중을 하라고 말이야.가족이 그리울 때면 사진을 꺼내 본다네. 그나마 요즘은 영상 통화를 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 타지에서 외로이 고생했던 선배들에 비하면 정말 감사한 일이지. 참,그리고 반가운 소식이 있네. 곧 휴가를 받아서 일주일 남짓 가족들과 지낼 수 있을거야. 가족과 함께 있는 동안은 그들에게 최선을 다하고 휴가가 끝나면 다시 현장에 복귀해서 동료들에게 최선을 다할걸세. 그렇게 지내다보면 언젠가 이 전쟁도 끝나는 날이 오겠지? 그때까지는 나도 오직 하루에 충실하게 살며 실력을 키울 수 있도록 꾸준히 노력할거야. 그리고 버티어 내야지. 가족에게 이런 말을 듣지 않으려면 말이야.
 
“업햄! 업햄! 빌어먹을 돈 보내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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