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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228)내려놓음 (전편) /김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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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801회 작성일 2023-10-11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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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놓음 (전편) 


김형석(한국문협 인도네시아지부 회원)


2013년 12월 엄청 춥던 날 인천공항을 막 빠져나오니 차가운 공기가 머릿속까지 전달된다. 연말이라 그런지 공항 터미널 주변 여행객 옷차림이 내 눈에는 다들 살찐 곰처럼 보였다. 나는 7시간 전만 해도 인도네시아 뜨거운 열기 속에서 숨을 쉬고 있었다. 이렇게 뜨거운 날씨에 있다가 갑자기 겨울로 계절을 넘나들 땐 여태까지 차가운 공기가 에어컨도 필요 없이 느낄 수 있는 짜릿짜릿함이 너무 좋았다. 


하지만 이번 방문은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병원으로 가야 하는 온몸이 무력감에 힘겨운 상태였다. 나는 공항으로 마중 나온 차로 예약한 병원에 아내와 함께 곧바로 이동했다. 


한 달 전부터 몸무게가 급속히 줄고 물을 하마처럼 마시고 또 마셔도 갈증이 났다. 수시로 화장실에 가야 했고 수면을 제대로 할 수 없는 나날을 보내며 몸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생각에 서둘러 병원 진료를 받았었다. 예상한 대로 급성 당뇨라는 진단을 받고 약물 치료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데도 당 수치가 300에서 아래도 떨어지지 않고 증세는 점점 더 심해졌다. 


24시간 기계를 가동하는 제조업이라 공장은 매일 긴박하게 돌아가야 한다. 때로는 일요일도 특근해야 했고 납품이 지연돼 납품처로부터 불만을 듣다가 보니 스트레스가 누적되어 갔다. 그래도 어떻게든 해결하기 위해 외주 업체까지 가동하다 보니 쉴 틈이 없었다. 


난 일에서는 누구보다도 지기 싫은 승부욕이 강했다. 또한 컴퓨터 자수업을 신규로 투자하면서부터 긴장감 속에서 몸 생각 안 하고 살았다. 조금만 더 하면 된다는 생각에 다른 것은 보이질 않았다. 일벌레라고 말하면, 난 이렇게 말했다 ‘ 배부른 소리 하네’라고. 내가 인도네시아에서 살아남고 뭔가를 이루려면 이 정도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야 사업에 더 투자하고 가족도 위하며 집도 사고 공장도 살 수 있다고 난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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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1년까지 10년 넘게 공장을 임대로만 계속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에 공장을 매입하기로 마음먹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다고 말한다. 내 나름대로 인도네시아 현지인들 습성을 잘 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 습성을 염두하고 임대공장의 매입을 서서히 진행했다. 


그런데도 그 후 진행 브로커는 수시로 와서 이런저런 비용이 필요하다며 자기 금고에서 돈 꺼내 가듯 했다. 그렇다 보니 잘 진행될까 하는 의심이 스멀스멀 생겨났다. ‘이러다가 돈만 날리고 사기당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상황이 2년 이상 지속되다 보니 심적 부담이 점점 커가고 혼자서 끙끙 앓게 되었다. 전에 어머니께서 항상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고 하신 말씀이 귓가에 맴돌았다.


줄거리를 다시 앞으로 되돌아가 본다. 병원에 도착해 휠체어를 타고 바로 입원실로 향했다. 한 달 사이 20kg 이상 줄다 보니 멀쩡하게 서 있기가 어려웠다. 나는 이렇게 아내와 함께 병원 생활이 시작되었다. 나는 무엇보다도 합병증이 염려됐다. 내가 여기서 치료받고 건강하게 돌아갈 수 있을까? 일에 빠져 살다가 병원 침대에 누워만 있다 보니 스스로가 낙오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빨리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몸이 망가져 병원에 입원해서도 머릿속은 공장만 아른거렸다.

 

병원 창밖을 보니 바람 따라 흔들리는 마른 낙엽이 병들고 지친 내 모습과 닮아 보였다. 오래돼서 다 늘어진 스웨터와 거의 다 쓴 건전지로 빛이 약해진 손전등처럼 늘어지고 약해진 것이 내 몸과 맘 같지 않은가! 나는 4인 환자가 함께하는 병실의 창가 쪽에 있었다. 링거를 꽂고 있어 불편은 했지만 다른 환자보다는 움직임은 자유로웠다. 


입원해서 집중 치료를 받고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새벽에 가로등 불빛 너머로 눈발이 보였다. 눈을 본 게 몇 년 만인가!!! 시간이 지나면서 눈은 인도를 조금씩 하얗게 덮어 나갔다. 그리고 오후 늦게 종합 진단 검사 결과 나왔다. 다행히도 합병증은 발견되지 않아 1주일 정도만 더 입원 치료하면서 지켜보기로 했다. 눈발은 점점 더 진해지고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과 바쁘게 움직이는 차량을 창가에서 바라다보며 인도네시아에서 지내 온 그동안의 삶을 떠올려 보았다.


지난 20년은 일에 빠져 앞만 보며 난 쉼 없이 달려만 왔다. 나의 가정과 일터를 지키고 돌보며 사는 것이 의무고 당연한 책임이라 알고 어떤 어려움에서도 굴하지 않고 헤쳐 왔다. 어제 큰 매형이 병원에 다녀가면서 이런 말을 내게 건넸다. 건강 잃으면 돈이고 명예고 뭐고 다 소용없어 일이 아무리 중해도 이젠 몸 좀 돌보며 살아야 한다. 맞는 말이다! 더 벌어 더 쌓고 더 올라가려고만 했던 일들이 건강이란 두 글자 앞에는 무력하다는 것을 왜 나는 외면하고 살았을까. 뭐 나야 괜찮을 거야 했던 오만함과 교만을 내 마음 안에 겹겹이 쌓은 것이다. 


과유불급이란 사자성어가 나를 두고 한 말이 아닌가! 몸이 좀 나아지자 나는 병원 복도를 운동 삼아 오가며 이런저런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래 지금부터는 인도네시아로 다시 돌아갈 때까지 공장에 전화하지 말자. 그리고 이번 일을 교훈 삼아 나의 삶의 전환점이라 믿고 그동안 손으로 붙잡고 어깨에 메고만 있으려 했던 어리석음을 더 늦기 전에 과감히 내려놓아야 한다는 확고한 다짐을 했다. 그렇다 욕망이란 정말 끝을 모른다. 그렇다고 내려놓음이 포기를 종용하는 것은 아니리라.


병원에서 치료받던 중 내게 깨달음을 준 짧은 비유적인 예화를 듣게 되었다. 산세가 험한 가파른 절벽을 지나던 스님에게 절벽 아래에서 사람 살려! 라는 절박한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려오는 절벽 밑을 내려다보니 어떤 사람이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지면서 다행히 나뭇가지에 걸려 대롱대롱 매달려 살려 달라고 발버둥을 치고 있었던 것이었다. 매달린 사람은 앞을 못 보는 장님으로 산 넘어 양식을 얻으러 가던 중 발을 헛디뎌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졌는데 다행히 이렇게, 나뭇가지에 매달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스님이 자세히 아래를 살펴보니 그 장님이 매달려 붙잡고 있는 나뭇가지는 땅바닥에서 위로 겨우 사람 키 하나 정도라 그냥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을 정도의 위치였다. 그래서 스님은 장님에게 외쳤다. 그냥 손을 놓아 버리시오. 그러면 더는 힘 안 들이고 편안해질 수 있소! 그러자, 절벽 아래 장님이 애처롭게 애원했다. 내가 지금 이 나뭇가지를 놓아 버리면 천길만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즉사할 거라며 애걸복걸했다. 그러나 스님은 살고 싶으면 당장 그 손을 놓으라 계속 소리쳤다. 


하지만 그 장님은 손에 힘이 다 빠질 때까지 붙잡고 있다가 나 죽는다! 라고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에 떨어졌지만 가볍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뒤 내용은 깨달음에 대한 언급이다. 나는 예화를 듣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 예화 속 장님이 바로 내가 아닌가!


2주가 넘는 병원 생활을 끝내고 며칠 후 몸도 많이 좋아져 오랜만에 기분 전환을 위해 아내와 서울 북촌 한옥마을에 갔다. 아직 눈이 듬성듬성 쌓여 있어 조심조심 둘러보다가 북촌의 기와지붕들이 내려다보이는 한옥 커피숍에서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참 오랜만에 단둘이 한국에서의 오붓한 시간이다. 아내가 병원에서 쪽잠을 자면서까지 밤낮으로 병간호를 해줘서 다행히 빨리 회복한 것이리라. 고맙고 또 미안도 하고 해서 커피를 마시다 난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뭐 사고 싶은 것 없어?” 

아내의 대답이 앞선다. 

“우리 낼 춘천에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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