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186)살라띠가 쿠쿠밥솥 소동 /이태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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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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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산책 186 >
살라띠가 쿠쿠밥솥 소동
이태복 / 시인 (한국문협 인니지부 회원)
우리가 살아가면서 문화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깨닫는 작은 사건 하나에서 문화의 담을 담쟁이처럼 넘어 현지 문화 속에 흡수되어 살고 있다. 두 해 전 업무상 중부자바 쁘르워다디 시골로 나흘간 일을 다녀왔던 때의 일이다.
인도네시아에서 25년을 살면서 나의 여행 광기는 자바 여러 곳을 여러 번 여행하게 했고 동띠모르를 비롯해 깔리만탄, 수마트라등 꽤 많은 곳을 다닌 것 같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집만 나서면 된장 끼 덜 빠진 한국인으로서 끼니가 걱정이었는데 이제는 인도네시아 음식을 아무거나 잘 먹는 자바토종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25년이란 세월을 인도네시아에 살다보니 내 몸이 길들여진 것은 물론 문화적인 생활습관과 입맛도 길들여지고 있는 것 같다. 가끔 고국에 가게 되면 사람들이 나에게서 인도네시아 냄새가 난다고 한다. 그중 가장 큰 영향은 음식으로 인해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신토불이란 말은 몸에 배인 음식관계를 말함일 것이다. 이제 나는 인도네시아의 식생활로 체질이 신토불이가 되었다. 그러나 나의 골수는 대한민국 사람이다. 내 조국, 내 강산 경북 예천의 시골에서 태어났고 고향의 물과 흙을 먹고 자랐으며 조상의 얼과 혼이 배달되어 길들여진 대한민국 토종이다. 한국토종이기에 주식으로는 밥을 먹어야 하고 된장을 먹고 고추장을 먹어야 몸뿐 아니라 영혼까지 개운해지는 기분이다. 내 조국은 나를 잉태했고 어머니 자궁 같은 내 조국 산천이 나를 키웠다. 강산이 젖줄이 되었던 것이다.
내가 아무리 인도네시아에 오래 살았다 해도 이들은 나를 한국 사람이라 부른다. 국적이란 태어난 곳이 국적이다. 태어난 곳의 물과 흙을 먹고 자랐기 때문이다. 강산을 인니어로 tanah air(땅+물)라 한다. 강산의 강을 sungai 라 하지 않고 air 라 하고 산을 gunung 이라하지 않고 tanah 라 표현한다. 인도네시아어에서 negeriku(내나라) bangsaku(내민족) 보다 더 앞에 tanahairku 를 쓰는데 이는 내 강산이라는 의미보다 내 조국의 의미다. 나를 있게 한 조국은 조상이라는 어원보다 물과 흙에 근원을 두고 있음이 아닐까.
여행을 다니며 나흘 동안 인도네시아 음식만 먹은 적이 있다. 인도네시아는 향신료의 천국이라 25년 인도네시아에서 이 향신료로 만들어진 음식으로 길들여진 내 몸은 간혹 한국에 들어가면 인도네시아 음식이 그리운 것은 내 체질이 길들여진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DNA는 대한민국 토종이다. 살라띠가로 돌아오자 본능적으로 준비하는 것이 속이 든든한 찰진 밥과 된장, 그리고 김치다. 돌아온 날 저녁은 피곤한 탓에 아얌 바까르(훈제닭)와 나시뿌띠(백밥) 그리고 삼발뜨라시(우리네 고추장)로 때우고 식욕보다 더 필요한 수면욕을 해결했다.
눈을 뜨자 동 트기 전인데도 밥과 된장이 생각나 밤에 불려 두었던 쌀을 쿠쿠 전기압력밥솥에 안치려니 이게 웬일인가. 밥솥은 몸통만 있고 아무리 찾아도 내부밥솥이 없다. 동이 트기를 기다렸다가 청소를 도와주는 주인집 할머니에게 물어도 모른단다. 우리 자바연구원은 늘 문이 개방되어 있다. 마음이 열려있어야 문화를 연구할 수 있다는 신념에 나의 연구원은 물론 나의 침실까지 문은 늘 열려있다. 문을 열어놓고 사는 이곳이지만 마음을 훔쳐가고 마음을 뺏어가는 감동들은 많아도 무엇 하나 잃어버린 것이 없다. 짐작되는 곳이 있어 연구원 건축공사 현장을 찾았다. 아니나 다를까. 쿠쿠밥솥을 현장 인부들이 커피 끓이고 라면을 끓이는 냄비로 사용하고 있었다. 가스레인지에 올려놓고 물을 끓여 플라스틱 손잡이가 녹아 흘려 내렸다.
오! 마이갓! 쿠쿠 전기압력 내장밥솥을 냄비 대용으로 사용하다니, 사건이 이렇게 되어도 아무도 심각성을 모르는 순수한 사람들이다. 이들에겐 3백만루피아짜리 압력밥솥을 그냥 5만루피아짜리 양은냄비 용도로 쓰다가 손잡이가 탄 것이다. 4년 전인가, 한인회에서 주최한 자카르타 한-인니 친선 걷기대회 공모 후기에 응모하여 상품으로 받은 가장 아끼는 압력밥솥이다.
당장에 양은냄비에 밥을 해야 할 형편인걸 아는 주인집 할머니가 당신이 사놓고 아까워 한 번도 쓰지 않은 일반 전기밥솥을 가져와서 아침밥을 잘 때웠다. 뒤늦게 연구원 공사 현장에서는 수군거림이 들렸다. 사태를 파악한 모양이다. 모두들 말이 없다. 원래 이들은 동료들끼리 고자질이 없다. 누가 가져갔고 누가 커피를 끓였으며 라면을 끓였는지 벌써 나는 다 알고 있었지만 함께 살아왔고 함께 살아 갈 이웃 형제들이 소중하다. 그리고 자바인들을 잘 이해하고 있기에 그냥 씨익! 웃어 주었다
처음 살라띠가에 정착할 때는 문화적인 차이로 수업료를 크게 지불했다. 나의 재산목록 1호인 이노바 차로 대인 대물 사고를 낸 처음 만난 운전기사가 5년 정도 감옥에 살 상황이 있었다. 그때는 그냥 ‘사람이 우선이다’ 는 신념으로 망설임 없이 차를 팔아 운전수를 구했다.
지금 생각해도 잘한 선택이었다. 무엇보다 그 선택이 지금 내 영혼을 살찌게 하고 그로 인한 자바인들과의 관계가 행복의 시작을 만들었다. 자바인들은 좋은 일을 놓고 서로 칭찬해 주며 스토리를 만들어가지만 실수 또한 아무 일 없는 듯 무심히 잘 넘어가는 아름다운 심성이 있다. 고의가 아닌 돈에 관련된 실수도 그렇게 나쁜 뜻이 아니면 아무리 큰 실수라도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어가는 게 여기 자바의 미풍양속이다. 나도 언젠가부터 이곳 자바문화의 담을 타고 현지인들이 실수를 하더라도 탓하지 않고 그냥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어가고 있다. 그렇게 자바문화와 음식 맛에 길들여지듯 나도 어느덧 서서히 자바인이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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