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188) 친구에게 들려주는 나의 공간 이야기 / 이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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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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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188 >
친구에게 들려주는 나의 공간 이야기
이병규 / 한국문협 인니지부 회원
나에게 나의 공간이란 개념이 생긴 게 아마도 중학교쯤 이었던 것 같아. 온 나라가 88 서울올림픽으로 시끄러운 와중에 우리 가족은 시내의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되었지. 잘 알겠지만 그 시절은 모두가 그렇게 단칸방에서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생활하는 게 자연스러운 것이었지. 우리라고 뭐 다를 게 있었겠어? 부모님과 여동생까지 우리 넷은 단칸 월세 방에서 모든 것을 해결했었지. 그 어느 곳에도 나만의 공간은 없던 시절이었지.
그러다가, 가만 있자 그게 언제쯤이더라. 초등학교 졸업하는 즈음에 아버지가 아파트로 이사를 하자고 하셨어. 이제는 시멘트로 대충 바른 수돗가에서 수돗물로 샤워하거나 겨울 새벽에 일어나 동동거리며 연탄불을 가는 시절과 바이바이 하는 거지. 암튼 너무 너무 좋았었지. 그 중에 제일 좋았던 게 뭔지 알아? 내 방이란 게 생긴다는 거였지. 문을 열고 들어서면 한쪽으로 책상이 있고 그 아래 이불을 가지런히 개어 놓은 2평이나 되었나? 크기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아무튼 아파트로 이사를 하면서 처음으로 나에게 방이 하나 생겼고 그 방에서 나의 첫 사춘기 시절을 보냈었지.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난 그 방에서 공부하고 밥도 먹고 그렇게 세월이 흘러 간 거야.
대학교 들어갈 때쯤 운이 좋게도 우리 가족은 막 지은 30평대 큰 평수 아파트 분양을 받아서 그리로 이사를 했지. 내 방은 문간방이었는데 밖으로 난 창문 바로 아래는 공설운동장이 있고 그 뒤로 문화 회관, 또 그 너머에는 강줄기와 고수부지가 한 눈에 들어오는 전망이 아주 훌륭한 방이었어. 무엇보다 방 크기가 한 배 반은 큰 거 같았어.
그런데, 그 공간을 소유하는 것도 아주 잠시 뿐이었어. 대학 때문에 고향을 떠나면서 나는 새로운 공간에서 다시 시작을 해야 했지. 대학이 있는 곳은 그 당시로서도 그리 녹녹치 않은 생활비가 들었어. 일단 부모님과 나는 하숙집에서 시작하기로 했어. 시장 통 한 가운데 있었던 그 하숙집은 3층 주택 건물 벽돌로 올린 집이었는데 3층은 광주에서 올라와 자리를 잡은 하숙집 주인 내외가 쓰고 1층은 가게 그리고 2층은 하숙방이 복도를 사이에 두고 7개의 방과 한 개의 공동 화장실 겸 샤워실 을 갖춘 구조였어. 보통 방마다 2명씩 생활을 했는데 나는 경제학과를 다닌다는 대전 출신의 복학생 형이랑 같은 방을 쓰게 되었지. 내 공간은 다시 1평도 안 되는 크기로 줄었어. 참 좁았는데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어.
한 달에 25만원짜리 하숙방은 세끼 식사가 제공되고 정기적으로 빨래도 해주고 하숙집 사람들과 친해지니 그게 또 그렇게 재미가 있더라고. 그런데 나는 Privacy가 하나도 없는 그 생활에 염증이 생겨서 뭔가 변화를 주고 싶어 졌지. 맨날 다른 방 형들이나 친구들이 맥주와 오징어를 사 들고 내 방에 불쑥 불쑥 들이 닥치는 게 마냥 좋지만은 않았어. 그렇게 1년을 하숙집에서 나고 타지 생활이 익숙해지자 나는 하숙을 빼고 자취방으로 옮기게 되었어. 가격이 좀 저렴해 졌고, 공간은 좀 더 커졌지. 3평정도 크기로 다시 복귀하게 되었어.
그렇게 또 1년이 지났는데 다들 그렇듯 군대를 가게 되었지. 군대 가니 내 공간이 거의 1/10로 줄더라. 내무반 막사에서 내 공간은 모포 하나 겨우 놓일 만한 자리였고 까까머리 군인에게 그 이상의 공간은 주어지지 않았어. 2 년 반을 그렇게 좁은 공간에서 지냈고 전역하는 날 진짜 큰 방에서만 살 거라고 혼자 다짐하기도 했었지.
제대를 하고 이제는 사람답게 좀 살아보자 했지만 역시나 돈이 문제였어. 그래도 작은 방은 안된다 라는 확고한 철학으로 반 지하 자취방을 하나 얻게 되었어. 반 지하였지만 언덕 쪽으로 위치해서 엄마가 걱정하는 홍수 날일 없었고 크기도 5평 가까이 되는 큰 방이었어. 보증금 100에 월세 20만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해. 암튼 방은 컸어. 해가 중천에 뜨면 겨우 해가 들어올까 말까하고 언덕에 있긴 해도 긴 여름 장마 기간에는 밖으로 밤새 빗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그런 곳이었어. 홍수가 날까봐 조마조마 하기도 했었지. 엄마가 고향에서 음식 갖고 오셨다가 방이 이게 뭐냐고 하시고 반년을 못살고 새집으로 옮겼어. 그 때는 본격적으로 원룸이 유행이었고 나는 그제야 개별 화장실과 부엌이 달린 원룸으로 옮기게 되었어.
보증금 1000에 월세 25만원, 크기로 따지자면 10평은 된 듯. 이제는 부모님이 오셔도 재워드릴 공간도 생겼고 거의 완벽한 내 공간이란 게 생겼어. 좋았지. 그렇게 또 세월이 지나, 14평짜리 전세를 구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했어. 이번에는 거실도 딸린 방이 2개나 있는 나만의 공간이었지. 심지어 베란다도 있었어. 집주인이 전세금을 돌려주지 않고 먹튀만 안했어도 참 좋은 추억이 남았을 아파트 전세 집이었는데. 내 기억에는 그 집이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나만의 공간이었던 것 같아.
그 집을 구한지 얼마 되지 않아 난 결혼을 했고 내 공간은 다시 반 토막이 났거든. 은행 대출을 잔뜩 끼고 회사 근처에 21평짜리 아파트를 장만했는데 이제 진짜 내 이름으로 된 공간이 생긴 거야. 그런데 산술적으로 10평이 조금 넘는 게 내 공간이었어. 아이들이 생기니 더 줄더라. 도대체 몇 평이 내공간인건지. 회사 일로 해외생활을 하면서 이래저래 집을 몇 번 옮기고 40평이 넘는 공간이 내 것이 되었어. 번듯한 내 집이 생기고 우리 애들에게도 남부럽지 않은 공간도 생기게 되었지.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내 공간은 점점 줄어드네.
지금 여기 자카르타에서도 집이 작지 않은데 애들이 커가면서 내 공간은 더 줄어든 것 같아. 하루 종일 사무실에서 일하다가 집에 가면 아내는 거실 소파를 하나 다 차지하고 TV를 보고 있고 애들은 각 자 방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이 집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내 공간일까? 작은 내 침대 위에서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난 수 십 년 간 내가 얻은 공간은 이 작은 침대 하나 뿐인 것 같아. 사람은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단편에서 톨스토이가 그랬어.
니들 인간들이 아무리 욕심을 내봐야 그 끝에는 네 몸이 뉘일 3아르신(약2m) 정도의 땅만으로 족하다고. 아마 나에게도 그 정도의 공간이면 족하지 않을까? 친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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