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195) 익숙한 사람이 없는 날 /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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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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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산책 195 >
익숙한 사람이 없는 날
지나/ 싱가폴 거주(한국문협 인니지부 명예회원)
어둠이 완전히 걷히기 전 싱가포르의 새벽,“나 오늘 못 갈 것 같아. 너무 피곤해서… 미안...”산이 없는 섬나라에서 언덕이라고 하기엔 높고 산이라고 하기엔 낮은 유일한 곳, ‘Bukit Timah Hill Quarry’앞에서 새벽요가를 함께하는 친구가 보내 온 문자였다. 몇 개의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친구는 새해가 코앞에 닥쳐서할 일이 너무 많아 바빠 죽겠어!”라며, 매일 피곤함을 호소했다. 그래도 용케 잘 버틴다 생각했는데 오늘은 도저히 안되겠다 싶었나 보다. “걱정 말고 어여 더 자.”라는 답장을 보내고나니 잠시 머뭇거려진다. 새벽요가라고 해봐야 단 둘뿐인 클래스라 한 사람 빠지면 나머지 한 사람만 남는다. 아침잠이 많아 망설이는 그녀를 설득해 새벽요가를 권한 사람은 나였으니 그녀에게 건강을 위한 시간을 선물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보니 나의 착각이었나보다. 혼자 남게 될 생각을 하니 온갖 구실들이 머릿속을 맴돈다.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 매일 새벽에 산에 가서 운동을 하세요. 부지런하신가 봐요?”라고 추켜세우지만 ‘천만의 말씀,나의 현실을 몰라서 하는 소리다. 나는 부지런하지도 강하지도 못해 항상 그룹을 짜거나 규칙성 있는 시간표를 만들어야 하는 사람이다. 의리와 약속은 절대의 가치라고 생각하니 시작된 모임이나 규칙을 깨는 일은 거의 없지만 내 시간을 대략 시간대별로 정하고 지구가 태양을 돌듯이 그대로 돌리며 산다. 참으로 단순하고 재미없는 패턴이지만 내게는 삶을 가장 간단하게 만드는 시스템이다. 친구는 나와 다른 성향이다. 계획을 세우고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도 나를 위해 “나 오늘 못 가.”라는 말은 최대한 금기어로 삼고 버텨주었는데 새벽요가에서 나의 게으름과 싸우는 친구라는 지지대가 오늘 무너졌다.
누구나 알 것이다. 팽팽하게 지탱하던 선이 무너지면 생겨나는 고민의 정체가 무엇인지 얼마나 질기게 머리 속을 맴도는지 말이다. ‘나도 조금 더 잘까? 하루 안 한다고 뭐 다를 게 있겠어? 푹 자는 것도 보약이지. 과한 운동은 독이야…’유혹의 속삭임은 끝없이 야릇하고 꽤 설득력이 있으며 집요하다. 고민하는 머리와 힘없는 양손이 억지로 잡아당기니 요가복 입는 동작이 느릿느릿 굼뜨다. 하지만, 다행히도 ‘만리타국에서 내가 아프면 첫 번째로 내가 고생이고 그 다음은 가족이 고생이다.’라는 기특한 생각이 망설임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내가 승리할 조짐이었다. 늘어진 기대수명에 아픈 몸을 끌고 살아서는 안된다는 책임감이 축 쳐진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늘 하던대로 이렇게 일어나면 그만인 것을…’ 순간순간 나는 참 나약하다.
매트를 들고 콘도 문을 나섰다. 키 큰 야자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인다. 아직 가로등이 꺼지지 않고 있다. 싱가포르에서 새벽 6시 즈음이면 어둠이 물러나는 시간과 아침이 들어오는 시간이 서서히 겹쳐지는 때다. 저 멀리 육교 아래서 친구를 만날 땐, 간간히 달려오는 자동차의 불빛들이 점점 가까워지는 묵직한 친구의 움직임을 비춰주고, 흔들리는 모습만으로도 ‘아! 저기 친구가 오고 있네~’하며 발걸음이 빨라졌다. 하지만, 오늘은 어둠 속을 바라볼 일도 반가움에 발걸음이 빨라 질 일도 없으니 내 시선은 그저 여기저기 가로등에 비춰지는 낯선 것들로 향한다. 재미없다.
숲 속은 오늘따라 이상하리만큼어둡다.바깥세상보다 한 두 시간 늦게 움직이는 정글은 바로 앞을 분간할 수가 없다. 새벽안개섞인 어둠 속을 헤치며 더 검게 뭉쳐있는 주변을 경계한다. 후드득~ 소리가 나면 화들짝 놀라기도 하고 머리 위에서 툭~ 하고 무언가 떨어질까 온 신경이 곤두선다. 얼핏 느껴지는 거미줄의 끝자락이 어깨 근처를 스친다. 신선한 공기를 음미할 여유도 없이 발걸음이 급해진다. 다른 쪽 길과 만나는 곳까지 도달하면 신 새벽 ‘Tai-Chi’를 하는 사람들이 보일 것이다. 그 곳 까지만 가면 된다. 멧돼지를 만날까 두려워 숨이 턱에 찰 만큼 속도를 내며 한참을 걸어가니 희뿌연 빛이 비추는 가장자리에 사람들의 형체가 보였다. 안심이다. 요가도 하기 전에 힘이 다 빠져버렸다.
‘하나, 둘, 셋…’숨을 고르며 생각한다. 그 동안 전혀 어둠을 못 느끼고 걷던 숲길, 온 몸의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되는 경험 한 번 없이 온전히 서로에게 기대고 걷던 시간들,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함께 걷다보면 어느새 닿아있던 정상, 익숙하면 존재의 무게를 잊는다더니 동트기 전 산을 오르던 짧은 시간 속에도 누군가 곁에 있었다는 사실이 내게 얼마나 위안이었는지 오늘에서야 알았다. 둘이 함께 라서 걱정도 두려움도 없이 걸어갔던 길이었다. 어쩌면 그 순간이 진정한 ‘힐링타임’ 이었을지도 모르는데 자각하지 못했던 거다. 항상 한 박자가 늦다 나는…늘 챙겨주는 엄마의 밥상, 가끔 안부전하는 동생의 문자, 남편의 익숙한 말들, 딸과 만들었던 일상, 그리고 주기적으로 만나는 친구와 지인들의 대화… 이렇게 익숙한 행복의 요소들을 지금 이 순간 오롯이 감사하지 못하고 흘려버릴까 두렵다.
요가가 시작되었다. 늘 하던 동작인데 내 몸은 천근만근이다. 주변의 원숭이들이 빤히 내 동작을 내려다보고 있다. 친구와 함께 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두려움이 일어난다. 근육을 비틀다 보면 저만치 언뜻언뜻 스치던 같은 동작을 하고 있는 누군가가 없기 때문이다. 내 눈이 그쪽을 본다고 의식한 적은 한 번도 없는데 내 마음이 늘 있던 자리의 사람을 무의식적으로 찾고 있다. ‘혼자일 때도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라는 어느 소설가의 말이 딱 맞는 것 같다. 우리는 언제나 누군가의 기억과 추억으로 지금의 시간을 짓고, 또 다른 누군가와 나중의 시간을 뜸들이는 것이다. 이 모든 알아차림도 친구의 부재가 내게 주는 선물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고마운 마음이 온몸에 감돈다.
번잡한 생각으로 요가시간이 다 지나갔다. 이제 하산이다. 이미 파랗게 펼쳐진 하늘 아래, 맑은 얼굴로 운동하러 올라오는 사람들을 본다. 드리워진 숲의 그림자가 이 시간의 그들에게는 그늘이다. 혼자인 사람도 지금은 두려움을 모른다. 태양이 비추는 시간이니까. 2시간 전, 같은 코스에 드리워진 숲의 어둠이 혼자인 내게는 두려움의 근원이었다. ‘우리 인생의여정에는 어둡고 깜깜한 순간들이 얼마나 더 많을 것인가. 다른 사람들에겐 위로가 되는 그 시간에혼자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우리모두 밝음 속에서는 알 수 없는 익숙한 사람들의 소중함을 그들의 부재에 느끼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다. 혹여 회복할 수 없는 부재라면 너무 아픈 일이 될 테니까.
내일 아침 육교아래 친구의 모습이 보이면 재빨리 내려가 힘껏 안아주어야겠다. “뭐야? 무슨 일 있어? 주책인데!”하고 그녀가 황당해한다해도 어쩔 수 없다. 내가 받은 선물에 대한 보답이니까. 빨리 보자 친구야! 굿나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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