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 내가 사랑한 법정스님의 사유와 문장 / 공광규 > 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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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196) 내가 사랑한 법정스님의 사유와 문장 / 공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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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2,781회 작성일 2022-02-04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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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196>기획 특집-한국문단 초대수필
 
내가 사랑한 법정스님의 사유와 문장
 
공광규 / 시인
 
책으로 만난 내 시의 스승이 정지용 시인이라면, 책으로 만난 산문의 스승은 법정 스님이다. 스님을 책으로 처음 만난 것은 고등학교 시절 범우사 문고판 『무소유』에서였다. 김형석, 안병욱의 수필과 함께 칼 힐티의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나 루이제 린저의 『왜 사느냐고 묻거든』, 헤세의 『인생론』 등이 독서 목록에 들어오던 때였다.
 
처음에는 법정 스님의 문장이 나의 현실 삶과는 동떨어지고 무관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제철공장에서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인생이 이게 전부가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 때 법정의 글이 나에게로 왔다. 당시에 나는 안정된 직장이기는 했으나 이렇게 수십 년 기계수리공 일이나 하다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방황하였다. 그런 어느 날 혼자 청송 주왕산 대전사에 갔다. 말수가 없고 내성적 성격이어서 절 마당에서 머뭇거리다가 잠자리를 얻지 못하고, 주변 여인숙에서 하루를 머물면서 여행의 심사를 시로 적어서 시골의 여동생들에게 보냈다.
 
 
며칠 후 비가 오는 날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예고도 없이 멀리 충청도에서 경상도 하숙집으로 들이닥쳤다. 성질이 호랑이처럼 무서웠던 아버지는 그날만은 눈물을 글썽이는 듯 손을 잡고는 “괜찮냐?”고 하셨다.
 
나는 영문을 몰랐지만, 바닷가에 모시고 나가 밥을 먹는 중에 아버지는 내가 여동생들에게 보냈던 엽서를 내놓았다. 내가 중이 되려고 마음먹은 줄 알고 하숙집으로 부리나케 찾아왔다는 거였다. 벚나무 열매인 버찌로 쓴 글이었으니, 내용도 그렇지만 버찌즙이 어떻게 보면 피가 바랜 것과 비슷하여 부모님이 놀랐던 것이다. 정말 외아들이 무슨 인생의 대단한 결단과 작심을 한 듯 적잖이 놀랐을 것이다.
 
돌아보면 우스운 사건이지만, 그 사건의 배후에는 나를 방황케 하는 법정 스님의 수필집 『무소유』가 있었다. 이 책의 앞부분 「너무 일찍 나왔군」이라는 곳에는 내 부모님의 과거를 가늠케 하는 뚝섬 이야기도 나온다. 스님이 이 글을 발표한 1969년에도 뚝섬은 서울시 성동구이지만 나룻배를 타고 건너야 되는 곳이고, 전기도 전화도 수도시설도 없는 곳이다. 부모님은 고향인 청양에서 결혼을 한 직후 서울로 올라와 삼선교 건너 동대문운동장이 보이는 돈암동 판자촌에서 나를 낳았다고 한다. 그 뒤에 뚝섬으로 가서 새끼공장을 했다는 것이다. 거기서 사업이 안 되자 정리하고 홍성에 있는 큰할아버지 집으로 내려가 농사를 도와주며 있었는데, 어머니는 돈을 받으러 나를 업고 서울을 오르락내리락 하였다고 한다.
 
서울이라지만 전기도 전화도 수도시설도 없는 곳에서 살았을 부모님. 그리고 이십대 중반의 어머니가 어린 나를 업고 사람과 분뇨를 같이 실었다는 나룻배를 탔을 생각을 하면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미안한 마음이 아득해진다. 아무튼 나는 뒤늦게 다시 한 번 스님의 「설해목」을 읽어가다가 비슷한 사유를 만나 놀라고 말았다. 이 부분이다.
 
“겨울철이면 나무들이 많이 꺾이고 만다. 모진 비바람에도 끄떡 않던 아름드리나무들이 꿋꿋하게 고집스럽기만 하던 그 소나무들이 눈이 내려 덮이면 꺾이게 된다. 가지 끝에 사뿐사뿐 내려쌓이는 그 하얀 눈에 꺾이고 마는 것이다. (… 중략 …) 정정한 나무들이 부드러운 것에 넘어지는 그 의미 때문일까.”
 
내 시 「폭설 아침」과 우연히 겹치는 사유 때문이다. 이건 숫제 표절에 가깝다. 시 전문을 소개하면 이렇다.
 
부드러운 눈이
꼿꼿한 대나무를 모두 휘어놓았습니다
 
소나무 가지를 찢어놓고
강철 차량을 무덤으로 만들었습니다
 
크고 작은 지붕들을
폭 덮어 평등하게 만들었습니다
 
개 한 마리 함부로 짖지 않고
쥐 한 마리 돌아다니지 않습니다
 
따악!
앞산에서 설해목 부러지는 소리 한 번
 
고요가 모두를 이긴
폭설 아침입니다
 
― 졸작, 「폭설 아침」 전문
 
스님의 산문과 내 시의 발상이 얼마나 유사한가. 오래전 스님의 글을 읽고 받아들였던 것이 마음 속 어디쯤에 자리 잡고 있다가 튀어나왔으리라. 이렇게 법정 스님의 수필은 내 젊은 날 방황의 배경이 되었고 사유방식에 영향을 끼쳤다. 등단을 하고 한참 지나 법정 스님의 수필에 애정을 갖고 계승하려고 노력한 몇 가지가 있다. 문학교실에서 만난 사람들 가운데 수필을 공부하는 방법을 물어오면 집에 있는 법정 스님의 수필을 가져다주며 꼭 필사를 하면서 문장공부를 하라고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스님이 돌아가시면서 책을 출판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말을 듣고 책장을 뒤져보니 다른 사람에게서 선물로 받은 『아름다운 마무리』 한 권뿐이었다. 내가 글을 쓸 때 자주 열어보는 책 가운데 하나는 1963년에 나온 『우리말 팔만대장경』이다. 당시에 젊었을 법정 스님이 해인사 한직으로 있으면서 청담 스님, 성철 스님과 함께 편찬위원으로 참여했던 책이다. 헌책방에서 구한 이 책은 색인이 잘 되어있어 불교지식이 약한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이렇게 나는 법정 스님의 문장을 십대 후반에 책으로 만나 스승으로 삼았다. 내가 사랑한 스님의 사유와 문장은 지금도 내 문학의 그림자로 따라다니고 있다.
 
 
 
*공광규 / 시인
1986년 월간 ‘동서문학’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 ‘담장을 허물다’ ‘서사시 금강산’ ‘서사시 동해’ 등과 산문집 ‘맑은 슬픔’. 윤동주상, 신석정문학상, 녹색문학상 등 수상. 중학국어에 시 ‘별국’ ‘얼굴 반찬’과 산문 ‘맑은 슬픔’이 실려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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