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200) 뜨거운 눈물로 만난 애국의 눈빛 /서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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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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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산책 200 >
뜨거운 눈물로 만난 애국의 눈빛
서미숙 / 수필가, 시인 (한국문협 인니지부회장)
3.1절을 맞아 티비에서 나오는 기념식을 보고 있자니 문득 특별히 잊히지 않는 여행지가 떠오른다. 바로 중국 상해에 위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다. 2019년 문학단체 회원들과 방문했던 나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흘렀던 그곳, 우리의 아픈 역사를 알기 위하여 꼭 찾아봐야 하는 곳이다. 상해 시 마당로에 위치한 신천지 거리의 작은 골목에 자리 잡고 있는 임시정부 청사는 중국에 남아있는 가장 대표적인 청사이면서 중요한 역사성을 간직한 곳이다.
낡아 보이는 빨간 벽돌의 3층 건물로 1926년부터 7년간 우리나라 임시정부가 머물면서 사용했던 회의실과 책상, 침실, 부엌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었다. 생각보다 초라하고 협소했다.
우리 일행이 방문한 시각이 어스름한 해질녘이라 그런지 마치 빈민가처럼 보이는 좁은 골목에는 생선 굽는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이곳에 오기 전, 관광한 초고층 빌딩에 휘황찬란한 불빛의 네온사인이 밝혀져 있는 상해 중심지와는 완전 딴판이었다. 이 골목은 아직도 옛 모습을 엿볼 수 있을 만큼 지금으로부터 90여 년 전 조국을 잃은 우리정부가 중국 땅을 떠돌며 얼마나 초라하고 서러운 생활을 했는지 고스란히 느껴지는 풍경이었다.
나는 임시정부의 자료실에 전시되어 있는 윤봉길 의사의 사진을 보게 되었다. 나도 모르게 석고처럼 몸이 굳어버렸다. 태극기 앞에서 폭탄장치를 한 물통과 도시락을 양손에 들고 김구 선생에게 애국선서를 하는 사진 속 윤봉길 의사의 강렬한 눈빛 때문이었다. 지금의 내 아들 나이와도 비슷한 준수한 청년이 일생일대의 거사(巨事)를 앞두고 얼마나 떨렸으며 얼마나 큰 고뇌와 번민에 시달렸을까. 사진 속에서 만난 윤봉길 의사의 결연한 눈빛이 나를 그 자리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마음이 무겁고 아파서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마치 나를 응시하는 듯, 아득하면서도 날카로운 시선이 불현듯 알 수 없는 아픔과 연민을 몰고 왔다. 함께 간 문인들이 나를 찾느라 법석을 떠는 것도 모르고 나는 한동안 그렇게 윤봉길 의사의 눈빛과 마주했다.
다음 행선지로 옮기면서도 윤봉길 의사의 그 강렬한 눈빛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 앞을 지나는 수많은 방문객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눈빛, 그것이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무엇일까? 뭐였을까? 그것은 필경 조국, 조국이라는 뜨겁고도 안타까운 두 글자 아니었을까. 바로 독립된 조국, 그리고 그 속에서 누릴 수 있는 진정한 자유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아마도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 간절한 마음이 눈빛으로 말해주고 있었던 것이리라.
현재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풍요를 위해서 그 시대 누군가의 아픈 희생과 헌신이 있었다고 생각하니 뜨거운 눈물이 목젖을 적신다. 단지 그 정신을 잊지 않고 가슴에 새기는 일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애국심이라니 순간,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미국의 유명한 시인인 ‘에즈라파운드’는 1941년, 이탈리아 방송에서 뭇솔리니의 파시즘을 옹호하고 자신의 조국인 미국을 비난하여 결국 반역죄로 체포되었다. 재판결과 정신이상자라는 판결을 받고 정신병원에서 12년간 연금되어 치료한 후 석방되었다. 그 후로 그는 이탈리아로 망명했다. ‘에즈라파운드’가 85세가 되었을 때 미국정부는 그를 용서하고 고국으로 돌아와도 좋다는 허락을 하였다. 귀국 후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모교인 해밀턴 대학에서 연설을 했는데 딱 한마디 말만 했다.
“여러분, 나는 드디어 조국인 미국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망명의 땅인 이탈리아에서 보냈던 긴 세월 동안 얼마나 절실하게 조국을 그리워하고 갈망했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한마디였다. 어떤 설명이나 수식어도 그에게는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인에게 있어 조국은 세계이고 우주이고 인생 자체였을 것이다. 나중에 그의 회고록에는 한 순간의 실수로 조국에 대한 소중함을 깨닫지 못했던 지난날을 반성하며 조국을 향한 참회의 글로 가득하였다고 한다. 조국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해외에서 오랫동안 삶을 이루고 있는 내 자신을 돌아본다. 조그마한 일에도 습관처럼 내나라 를 먼저 생각했다고 자부하지 않았던가. 단지 생각뿐이었다. 나라를 잃었던 시대에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무엇을 위해 그토록 목숨을 걸고 싸웠는가를 비로소 아프게 깨닫는다.
청년 윤봉길의사가 목숨을 바쳐 사랑했던 조국을 위하여 나는 무엇을 했으며 무엇을 실천하면서 살아왔던가. 말로만 애국을 이야기하고 조국이란 그냥 역사교과서에 등장하는 단순한 명사로서 여겨왔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저 나의 수필에 등장하는 그리움의 대상으로 사용되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애국이라는 말, 조국이라는 말이 갖는 깊고 뜨거운 의미를 구체적으로 느껴본 일이 없었음을 고백한다.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에서 뜻하지 않게 마주한 윤봉길의사의 강렬한 눈빛은 오랫동안 조국에 대한 의미와 간절함을 깨닫게 했다. 지금까지 무의식적으로 막연한 사랑이었던 내가 태어난 땅, 나의 조국이 내 생명의 뿌리였다. 내 삶의 근본이고 정체성이며 앞으로도 영원토록 나의 후손에게 물려주고 뻗어나갈 생명의 줄기라는 것을 간절하게 절감한다.
현재 우크라이나에서는 러시아의 침공으로 조국을 지키려는 젊은이들이 속속 귀국해서 자원입대를 하고 있다는 뉴스를 접한다. 그들에게도 조국은 곧 자신의 삶이자 뿌리이기 때문이리라. 100 여 년 전, 오직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자신의 안위는 돌보지도 않고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목숨도 마다하지 않았던 우리 선열들의 온기가 어려 있는 곳, 상해임시정부 유적지를 방문하는 많은 사람들이 짧은 시간이라도 조국에 대한 뜨겁고 간절한 의미를 가슴에 담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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