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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202) 은밀한 거래 /강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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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5,015회 작성일 2022-03-18 10:35

본문

<수필산책 202 >
 
은밀한 거래
 
강인수 / 한국문협 인니지부 부회장
 
발을 헛디뎌 넘어 진 적이 있다. 무릎에 작은 생채기가 나고 피가 흘렀지만 이내 며칠 후 상처에 새살이 돋았다. 기쁨은 마음에 감동과 추억을 남기지만 슬픔은 상처를 남긴다. 그래서 언젠가는 꼭 글로 남기고 싶은 슬픔이 가슴과 머리에 저장 되어 있었는데 오늘처럼 별이 쏟아지는 날은 넓은 대야에 먹물을 살살 풀어 헤치듯 그 모든 기억들을 꺼내어 손장난 치고는 “하하” 하고 웃으며 수채 구멍으로 흘려버려야겠다.
 
가끔 초등학교 앞을 지나가면 어린 날 겪었던 별것도 아닌 그 슬픈 상처가 왜 이리 서럽게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지 오늘은 작정하고 마음 속 슬픈 실타래를 재미있게 풀어 헤쳐보고자 한다.
 
1학년 00반이었던 나는 기억도 나지 않는 반 이름을 애써 되 뇌여 보았다. 그러나 기억이 도저히 나질 않는다. 먼 유년의 기억 속 1학년 교실 담임 선생님은 최00 선생님. 단정한 파마머리에 붉은 색 블라우스를 입으셨고 꽤나 유쾌하게 수업을 진행했던 40대의 노련한 오케스트라 지휘자 같은 여선생님, 그녀가 우리 반 담임이 되던 첫날 첫 수업, 부모님들은 복도 밖에서 아이들이 공부를 잘 따라 갈까 어떨까 궁금해 하며 웅성거리며 수업을 참관했으리라.
 
 
키가 제일 작았던 나는 선생님 책상 바로 코앞에 앉아 초롱초롱한 눈과 얼굴에 긴장과 떨림으로 수업을 들었다. ”자 교과서를 펴세요!” 그 시절은 산수시간이었다. 사과 2개 그려놓고 2에 줄을 긋는 줄긋기 스타일의 수업이었는데 나의 귀가 잘못 된 것 인지 또는 긴장 한 것인지 선생님의 수업과 다른 행동을 했었나 보다. 교과서에 직접 자를 대고 줄을 긋고 있는데 어디선가 날카로운 막대기가 머리를 톡 하고 치는 느낌이 들었다. “누가 책에다 줄을 그으라고 했니? 노트에 그어야지!” 선생님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어린 1학년의 나에게 낯빛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무안함을 선사했고 아이들은 그런 나를 선생님과 한 몸으로 동조하는 듯 한 눈빛을 보내며 부끄러움에 목이 메도록 만들었다.
 
나는 속으로 외쳤다, “집에서도 안 맞은 머리를 때리다니! “라고 분해하며 적잖이 충격을 받은 모습으로 지우개를 일부러 또르르 바닥에 떨어뜨렸다. 지우개를 찾으러 책상 밑에 기어들어간 나는 그 수업이 끝나도록 바깥으로 나오지를 않았다. 교실 바닥에 눈물을 뚝뚝 흘리며 지우개 찾는 시늉을 하면서 숨죽여 눈물을 훔쳤다.
 
선생님은 아마도 그날의 어린 1학년 학생이 당한 창피함을 전혀 기억 하지 못했으리라. 그러나 40여 년이 흘러도 또렷이 기억에 남은 어린 학생에 대한 막대기 머리치기 사건은 아직도 기억에 선명히 남아서 그 시절 어린이에 대한 인격적 대우가 얼마나 빈약했는지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내가 선생님이었다면 책을 막대기로 가리키며 여기가 아니고 노트야. 라고 알려줬어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 그 사건 이후 나는 말문을 닫아버렸다. 학교에서는 나의 목소리를 들어 본 자가 없었으니 결국에는 “우리 반에 벙어리가 있어!”라는 웅성거림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나는 벼르고 벼르다 “나는 벙어리가 아니거든?”이라고 외쳤고 아이들은 눈을 번쩍이며 “와! 말한다. 벙어리가 말 한다!”라며 놀리기 시작했다.
 
이 모든 수모의 발단이 담임 선생님이라고 생각하니 분하고 억울해서 학교 가는 길은 소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마음 인양 발걸음이 무겁고 애처로웠다. 엄마는 혀끝을 차시며 “쟤가 왜 저렇게 숫기가 없나!”라고 아빠에게 걱정스러운 말을 건넨 걸로 기억한다. 무거운 가방을 어깨에 메고 학교를 가서 앉아 있는 시간은 정말 괴롭고 힘들었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 하필 수업 시간에 소변이 너무 마려웠다. 화장실을 빨리 가고 싶다고 손을 들어야 하는데 선생님께 말을 건네기는 죽기보다 싫어서 꾹 참고 수업종이 울릴 때까지 다리를 꼬고 배를 움켜잡고 가까스로 버텨냈다. 화장실로 향하던 나는 재래식 화장실 앞에서 그만 바지를 내려 보지도 못하고 옷에 실수를 해 버렸다. 그 이후 기억은 또 끊겨서 어떻게 집에 왔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만 옷이 꽝꽝 얼어 살갗을 파고드는 한기를 참고 대문을 연 기억과 엄마 손에 등짝을 맞은 기억이 선명하다.
 
속상해 하는 엄마와 봄 소풍이 다가올 무렵,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눈 것 같다. 그간의 있었던 덜 떨어진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던 나를 이해 한 건지 그 시절 선생님의 행동이 부모님들 머리에는 어떻게 받아들여지게 됐는지 알 수는 없으나 어린 내 마음에 중대한 사건이 일어 난 것은 며칠 후 봄 소풍 사건이 한 몫을 했다.
 
소풍날 김밥을 싸시던 엄마는 옆에 흰 봉투 하나를 챙기셨다. 소풍 길을 따라 나서신 엄마는 슬쩍 선생님과 나무 뒤에 가시더니 돈 봉투를 드리는 거국적 사건을 저지르셨다. 나는 저렇게 해도 되는 걸까, 의문을 품었지만 다음날부터 달라진 인간적인 대우와 대접에 발걸음을 물러서고 싶을 정도로 부담스러웠다.
 
세월이 흘러 나는 물었다. “엄마! 그 때 최 선생님 얼마 드렸어?” 1979년의 일이다.” 3만원!” 3만원은 큰 돈이다. 1979년의 3만원은 한 어린아이의 마음에 더 큰 상처를 남긴 대가 성 뇌물이었다.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그날 그때 내가 맨 앞에 앉지 않았더라면, 머리 막대기 사건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고 즐겁게 학교생활을 했더라면, 엄마와 선생님의 은밀한 거래는 없었을까?
 
어른이 되고 나니 세상에는 은밀한 거래라는 것이 암암리에 있다는 것과 그런 일들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도 분명히 알았다. 그 앎은 씁쓸한 현실이다. 이 모든 기억과 상처는 마치 식도를 다쳐 밥알을 제대로 못 넘기는 환자의 울먹임이고 슬픔이다. 어른들이 자신도 모르게 실수 하는 것들로 인해 아이도 슬퍼 할 줄 아는 작은 어른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다.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이렇게 선명하게 남은 기억은 누구나 한번쯤 겪었을 작은 상처이기에 같이 공감 해보고자 글로나마 유년 시절의 서운했던 마음을 풀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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