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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136) 붕아 완 솔로 / 하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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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9,479회 작성일 2020-12-10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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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136>
 
붕아 완 솔로
 
하연수  / 수필가 (한국문협 인니지부 감사)
 
자카르타 공항 출발 이전부터 내 머리 속은 중요한 일본 출장인 도쿄의 거래처 회의보다 히노미사키 등대에 가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도쿄 거래처 미팅을 이틀 만에 끝내고 서둘러 일본 서부 이즈모 해안 바위절벽 위 히노미사키 등대로 갔다. 내가 여기까지 오는데 오랜 세월과 시간이 걸렸지만 나를 이곳까지 오게 만든 인도네시아 노래 하나와의 인연은 참 길고 끈질기다는 생각이 든다. 뼈 속에 새겨져 있는 인연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나를 동경주 봉길 바위 절벽, 인도네시아 솔로, 수라카르타, 그리고 이곳 일본 서해바다 시골구석까지 찾아오게 할 수 있었을까?  
 
알 수 없는 인연의 ‘붕아 완 솔로(Bengawan Solo)’ 라는 인도네시아 노래는  고등학교 음악 선생님으로부터 배울 때까지만 해도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던 노래는 아니었다. 이 노래가 인연이 되려고 그랬는지 몰라도 고향 다녀오다 갑자기 겨울 바다가 보고 싶어 차를 봉길리 이견대 정자로 향했다. 그때 이견대 정자 끝에서 한 소녀가 오카리나로 연주하는 ‘붕아완 솔로’ 노래를 듣게 되었다. 뭔가 묘한 기분이 들었는데 아마도 ‘붕아 완 솔로’ 와 인연의 서곡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날 소녀의 어머니 아야꼬 여사가 들려준 ‘붕아 완 솔로’ 이야기는 나를 인도네시아 중부 자와 수라카르타와 솔로로 찾아가게 만들었고, 일본 서부 시마네 현 이즈모시 히노미사키 등대까지 찾아오게 만들었다. 히노미사키 등대 안내를 맡아준 택시 기사는 히노미사키 등대가 동양에서 가장 높은 등대라고 자랑했고, 2차 대전 때 일본 서해를 지나다니는 적의 전함을 감시했던 등대로, 군신의 대우를 받을 정도로 유명하다고 했다.
 
등대가 바다 감시역할을 했다는 말을 한국 사람인 나로서는 별로 좋아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택시 기사는 신이 나서 설명을 했다. 하얗고 높은 등대 앞에 몇 명의 여자들이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아야꼬 여사의 할머니와 어머니도 저 등대에 남방전선으로 간 외할아버지의 무사귀국을 바라는 기도를 했던 곳이라니 왜 사람들이 이 등대에 예를 올리는지 이해가 될 듯했다. 택시 기사 말로는 여기에 온 관광객들은 대부분 저렇게 예를 올린다고 하며 자신도 짧은 예를 올렸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 절벽 위에는 일본 서해바다에 뜨는 적의 군함을 감시했다는 히노미사키 등대가 바다를 향해 눈을 부릅뜨고 서 있다. 일본 서해바다 건너 서쪽 끝에는 적이 침입하면 저절로 음악이 연주된다는 만파식적 피리 전설이 있는 이견대가 있다. 가까워 질 수도 멀어 질 수도 없는 두 나라의 긴 역사들이 마주하고 있는 곳이다.  오래 전 바다건너 우리의 동해 절벽 위 이견대에서 아야꼬 여사의 딸의 평화스러운 노래 ‘붕아 완 솔로’를 오카리나 연주로 들었고, 나는 지금  그 이견대 절벽바다 건너 편 이즈모 히노미사키 등대 앞에서 아야꼬 여사의 어머니가 연주했을 붕아 완 솔로의 흔적을 더듬고 있다. 높은 등대 앞 바위 절벽 여기저기에서 아버지를 그리던 소녀, 아야꼬 여사 어머니의 붕아 완 솔로 연주가 바다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듯하다.
 
아야꼬 여사 어머니를 등대주변에 두고 소나무 숲으로 가고는 했다는 아야꼬 여사의 외할머니의 흔적을 찾아  왼편 소나무 숲으로 갔다.  정말  아야꼬 여사의 외할머니가 안타까워하며 쓰다듬어 주었다던 상처투성이 소나무들이 아직도 이 숲 속에 있는지 빨리 확인해 보고 싶었다. 서늘한 기운이 낮게 깔려있는 숲속에 들어서자  비스듬히 밀리듯 서있는 소나무들은 하나같이 껍질이 가로 뼘 반 넓이에 세로 두 뼘 길이로 벗겨진 가슴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맨살에는  손가락 마디 간격으로 깊이 파여 있는 V자형 칼자국 상처들은 전범들이 일으킨 대동아 전쟁의 상처들이다. 아야꼬 여사의 외할아버지도 대동아 전쟁 때 남방 군으로 수라카르타  어느 산에서 전사했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했다. 아야꼬 여사의 외할머니가 눈물을 쏟으며 쓰다듬어 주었다던 이 상처들은 아야꼬 여사의 외할머니 가슴속 상처이기도 했으리라. 
 
 
전쟁이 끝난 다음 해에 참전 동료 친구가 아야꼬 여사의 할아버지 유품이라며 먼지와 빨간 소독약 흔적이 여기 저기 묻어있는 악보 한 장과 대나무 피리 하나를 전해 주고 갔다고 했다. 그 너덜너덜한 악보는 외할아버지가 수라카르타에서 누군가로부터 받은 것이며, 악보 아래 손으로 흘려 쓴 거상(Gesang)이라는 글은 작곡가의 이름이고 수라카르타 사람이라고 가르쳐 주었다고 했다. 전사자 유품을 전달하러 왔던 동료의 말로는 아야꼬 여사의 외할아버지는 전쟁 공포가 밀려오면 자신이 관리하는 의무실로 가서 스스로 모르핀 주사를 맞거나, 피리를 불어 전쟁의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다고 한다. 전쟁 중 갑자기 사라졌는데 전쟁이 두려워 산속으로 숨어 버렸을 수도 있다고 했다. 어쨌든 이 행방불명이 전사로 기록되었다고 한다.
 
아야꼬 여사의 외할아버지 유품인 ‘붕아 완 솔로’ 악보와 피리가 전달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평화의 노래인 ‘붕아 완 솔로’가 전쟁을 일으킨 나라 일본 땅에서 들불처럼 퍼지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이 노래에 가장 열광했던 사람들은 주로 대동아전쟁에서 돌아온 참전군인들 이라고 했고,  아마도 전쟁 중에도 가슴 속에 품고 있던 평화에 대한 갈망의 표출이라는 사람들도 있다고 했다. 아야꼬 여사의 외할머니는 혹시 이 노래를 방송을 통해 퍼뜨리는 사람 중에 남편이 있을 수도 있다는 작은 희망을 가지고 이리저리 수소문 하고 찾아다녔다. 이런 노력에도 남편을 찾지 못한 아야꼬 여사 외할머니는 가끔 딸인  아야꼬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즈모 히노미사키 등대절벽 소나무 숲으로 갔다고 했다. 소나무 숲 밖에서 기다려야 했던 아야꼬 여사의 어머니는 외할머니가 소나무 숲에서 나올 때까지 절벽 위에서 ‘붕아 완 솔로’ 피리를 불며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날 늦겨울의 이견대에서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소녀가 조용히 서서 고구마같이 생긴 오카리나를 연주하고 있었고, 그 옆에는 어머니로 보이는 여인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아야꼬 여사와 딸이었는데 노을이 붉은 절벽 위에 서 있는 모녀의 모습이 환상적 실루엣으로 허공에 새겨지고 있었다. 여름도 아닌 늦겨울에 나 말고도 이 바다를 찾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놀랍기도 했지만, 절벽 위 이견대 앞에서 ‘붕아 완 솔로’ 연주를 듣는다는 것은 정말 신기할 따름이다.
 
 
잠시 후 이견대 정지로 돌아오던 모녀도 나를 보고 무척 놀라는 눈치였고 아야꼬 여사의 남편이 올 때까지 많은 이야기들을 했다. 남편이 한국인이라는 아야고 여사는 내가 인도네시아에서 온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놀랐고, 그때까지 내가 가보지 못했던 솔로에 대한 것까지 많은 질문을 했다. 그날 아야꼬 여사와 만남이 ‘붕아 완 솔로’에 대한 내 관심의 불씨가 되었다.    
 
소나무 숲 앞에서 고개를 들어 가까이 살펴보면 눈을 부릅뜨고 바다를 감시하는 히노미사키 등대가 있고, 아야꼬 어머니의 ‘붕아 완 솔로’ 피리 연주가 있었다. 멀리 바라보니 적이 쳐들어오면 저절로 소리를 낸다는 피리 만파식적 전설의 이견대가  있고, 아야꼬 여사의 딸의 오카리나 연주 ‘붕아 완 솔로’가 있었다. 그 ‘붕아 완 솔로’ 노래와의 인연은 동경주 이견대에서, 중부자바 솔로, 수라카르타, 그리고 히노미사키 등대가 있는 절벽까지 나를 오게 했다. 이제 끈질기고 길었던 ‘붕아 완 솔로’ 인연을 히노미사키 앞 바다로 내려 보내려 한다. ‘붕아 완 솔로’ 노래와의 인연은 내 가슴을 떠나 해면의 파도 층을 지나고 분노와 평온의 층을 차례로 지나 고요한 심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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