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달콤한 수술 (Operasi Manis) / 전현진 > 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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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140) 달콤한 수술 (Operasi Manis) / 전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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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6,586회 작성일 2021-01-08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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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산책 >
 
달콤한 수술 (Operasi Manis)
 
전현진 / 제4회 적도문학상 최우수상 수상자 (한국문협 인니지부 회원)
 
오늘은 수술 날이다. 나는 옷을 갈아입는다. 들어서기도 전에 기다리는 이들을 만난다. 가볍게 눈빛 인사를 한다. 들어가서 거품을 내어 손을 꼼꼼하게 씻는다. 준비된 삐사우를 들고 정중앙을 짚는다. 상태를 보니 최적의 컨디션이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짐작은 했지만, 예상보다 더 좋다. 나는 슬쩍 한 귀퉁이를 맛본다. 달다! 역시 여름엔 수박이다. 조심하는데도 꼭 수박 물이 튀어서 옷 색상은 빨강이 좋다. 주방에 들어서는데 가족들이 기대에 찬 눈빛을 보내고 있다. 손을 깨끗하게 씻고 과도를 딱 대니 꽃 같은 속이 아자작하고 갈라진다. 오오! 살 때도 맛있을 것 같더라니, 역시나 잘 골랐다.
 
여름이 좋은 건 수박 때문이다. 겨울에 먹는 수박보다 백배는 맛있다. 수박은 단연 여름이니까. 우리 가족은 내내 여름에 살고 있다. 수박 마니아 아홉 살에게 여름 나라는 마냥 좋은 곳이다. 언제든 수박을 먹을 수 있으니까. 이 얼마나 간단하고 명료한지! 이리 재고 저리 재는 어른에겐 없는 명쾌함이 좋다. 그래서 들기에도 버거운 커다란 수박을 먹기 좋게 잘라 나누는 순간은 신나고 즐거운 시간이 된다. 어른들은 알면서도 모른다. 욕심으로 부풀리고, 작은 것은 보지 않는다. 성에 찰 만큼이 아니면 무시하고 지나쳐버린다. 시간 내어 들여다보고 기뻐하지 않는다. 사방에 좋아할 것 천지인데 어른의 눈엔 들어오지 않는다. 선을 그어두고 절레절레한다. 나도 수박을 좋아한다. 물놀이도 좋아하고, 다채로운 색의 꽃도 좋아한다. 뜨거운 태양 아래 앉아 있는 것도 좋아한다. 다만, 까맣게 그을리는 게 싫어서 피할 뿐이다. 그런데 그을리는 게 어때서?
 
처음에는 그늘진 곳이든 아니든, 길바닥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신기했다. 철퍼덕 앉아 있는 사람들이 이상했다. 가만히 앉아 있는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했다. 일이 없어 그럴까, 힘들어서 쉬어가는 걸까 했다. 하릴없이 무력해 보였다. 그러다 문득 부러워졌다. 바닥은 앉을 만했고, 곁엔 친구나 동료, 이웃이 있었으며, 머리 위엔 처마나 초록 잎사귀들이 그늘을 드리워줬다. 잎이 넓고 무성한 나무도 뙤약볕 아래에서 뿌리를 땅속으로 쭉 뻗고 앉아 쉬고 있지 않은가. 어쭙잖게 안달이 난 것은 나 혼자였다. 에어컨이 나오는 카페에 앉아 있는 게 아니라고 말이다. 외출해서 갑자기 비를 만날 때가 있다. 차에서 내려 건물에 들어가야 하는 몇 걸음이 당황스러울 때 누군가가 우산을 들고 온다. 종잡을 수 없는 변덕쟁이 비구름에 젖을 뻔한 신출내기는 그저 감동한다. 우산 씌워주는 이의 호의가 대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서 말이다. 그러나 이런들 어떠며 저런들 어떠리. 만수산 드렁 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대가가 있든 없든, 이들만의 문화 덕분에 비를 피했고, 초록으로 물든 내 마음은 이미 말랑말랑해져서 고마움만 남는다.
 
 
사람 사는 곳이 다 똑같다지만, 또 저마다 다른 게 사람 사는 곳 아니겠는가. 내가 안 그랬다고, 그의 행동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가 보다 하기로 했더니 관심이 가고 궁금해졌다. 신호 대기 중일 때 차창을 닦아주는 이, 교차로에서 반대편 차량을 막아주고 길을 터주는 이, 주차 자리를 봐주고 안내해주는 이, 근무시간이 한참 남았는데 할 일이 없으니 미리 퇴근하겠다는 이, 돈을 빌려주지 않는다고 다른 보스를 찾겠다는 이, 다양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하나하나 따지고 손익계산을 하면 너무 힘들 것 같다.
 
그저 삐걱거리는 부분을 고친다고 생각하니 별일 아니었다. 습관, 관습, 선입견 등 고쳐야 할 부분을 가볍게 수술하는 것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결과가 이만하면 수술비가 아깝지 않다. 수십 년 살아온 곳에서 몸으로 익혔던 것들을 잠시 내려두고, 새로운 곳에서 약간의 셈을 치르고 알아가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그 셈이 돈이든, 시간이든, 마음이든 말이다.
 
 
해가 서성이는 집 앞에 나가 계단 가에 앉았다. 신발도 슬쩍 벗었다. 발을 쭉 뻗으니 작은 공간이 내 방이 되었다. 보는 이 하나 없건만 쑥스러웠다. 앉아서 보니 색다른 풍경이었다. 저기에도 나무가 있었구나. 바닥 타일이 이런 모양이었네. 뭘 해야 하는데 딱히 할 것이 없어 괜스레 눈만 바빠졌다. 엉덩이는 앉았는데 발은 어쩔 줄 몰라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안녕?’ 어색함을 제치고 바람이 다가와 인사했다.
‘나 무엇을 해야 하지?’ 내가 물었다. 바람이 대답했다. ‘아무것도.’
 
우리는 그저 함께 앉아 있었다. 태양도 내려와 옆에 앉았다. 눈은 제자리를 찾았고, 발은 얌전해졌다. 분주함은 눈치껏 조용해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셈은 얼마를 치러야 하는 걸까? 이번에는 시간으로 치르기로 했다. 셈을 두둑이 치렀을 때쯤, 찾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 엄마! 수박 주세요!” “그래, 들어갈게!”
 
내가 일어나자 뜨거운 햇살도 툭툭 털고 일어나 집에 갈 채비를 했다. 우리는 흔하디흔한 여름 수박으로 퐁당 들어간다. 내일 또 햇살은 무럭무럭 수박을 키울 것이고, 나는 달콤한 수술을 할 것이다. 인도네시아에서의 우리 삶은 그렇게 하루하루 달콤해질 것이다.
 
“Mulai Operasi Manis!” (달콤한 수술을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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