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158) 스승과 제자 / 하승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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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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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158>
스승과 제자
하승창 / 한국문협 인니지부 회원
최근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미나리’의 ‘윤여정’씨가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한국 배우 최초의 연기상이라는 사실 때문에 국내 언론들로부터 큰 찬사를 받았지만 작품상이나 감독상 등 후보에 올랐던 나머지 다섯 개 부문들의 수상이 불발되면서 아쉬워하는 보도기사들도 많았다. 그 이유는 바로 작년 2020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무려 네 개의 ‘오스카’를 수상하며, 한국 영화계 뿐 아니라 아카데미 시상식의 새로운 역사를 쓴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남긴 황홀했던 기억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봉 감독이 감독상을 받은 후 남긴 감동적인 수상소감은 국내외 언론의 큰 화제가 되었다. “학창시절에 영화를 공부할 때 항상 가슴에 새겼던 말이 있었는데, 그것은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우리 위대한 ‘마틴 스콜세지’가 했던 말입니다.” 함께 감독상 후보에 오른 ‘마틴 스콜세지’에 대한 봉 감독의 경의를 담은 이 발언은 객석을 크나큰 감동으로 몰아넣었고, 관객들은 약속이나 한 듯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스콜세지’를 환호하며 열렬한 찬사를 보냈다.
길게 이어지는 기립박수, 그리고 그 가운데서 눈시울을 붉게 물들이며 함박웃음을 짓던 ‘거장(巨匠)’의 모습. 그 장면은 지금 다시 보아도 울컥하는 감동을 느낄 정도로 나에게 깊고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말은 대개 스승의 실력을 제자가 넘어서는 경우를 말한다. 가르침을 주는 입장에서 이만큼 보람된 일이 또 있을까. 뛰어난 제자는 스승을 돋보이게 하고 나아가 그 스승의 기량을 더욱 성장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좋은 스승이 좋은 제자를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훌륭한 제자가 훌륭한 스승을 만들기도 한다.
내가 사는 동네에는 학교가 하나 있다. 매일 아침 산책을 할 때, 주말에 아이들과 나들이를 할 때 나는 늘 그 학교 앞의 야외 농구코트를 지나친다. 지난해, 우기가 막 시작되려 하던 어느 날이었다. 작은 아이와 함께 농구코트를 가로질러 걸어가는데, 이 녀석이 어디에선가 바람 빠진 배구공을 하나 주워 오더니 골대를 향해 던져 올린다. 어림없이 빗나가고 마는 것이, 만 두 살 난 아이가 던진 공이 골대에 닿을 턱이 없다. 그런데 가망 없는 그 짓을 지치지도 않고 반복한다. 집에 있는 작은 장난감 농구골대가 너무 쉬웠던 탓일까, 높은 골대를 향해 공을 던지는 것이 재미있는 모양이다. 줍고 던지고, 줍고 또 던진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나는 문득 ‘비광’에 그려진 개구리를 떠올렸다.
화투의 12번 ‘비광’에 나오는 인물은 일본의 한 서예가가 모델이라고 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실력이 늘지 않아 괴로워하던 그는 자신의 재능 없음을 한탄하며 서예를 그만둘까 고민하던 참이었다. 비 내리는 어느 날, 이 서예가는 답답함을 달래고자 우산을 쓰고 산책을 나섰다가 냇가에서 개구리 한 마리를 보았다. 개구리는 비 때문에 불어난 급류에서 탈출하기 위해 필사의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버드나무 가지를 향해 뛰고 또 뛰었지만 번번이 떨어지던 그 개구리는, 끈질긴 시도 끝에 마침내 가지에 올라타 급류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이 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보던 서예가는 큰 깨달음을 얻어 부단한 노력 끝에 ‘서예의 신’으로 추앙받게 되었다고 하니, 마치 우리의 ‘한석봉’ 이야기와 비슷한 일화라 하겠다. 농구 골대를 향해 공을 던지고 줍기를 반복하는 작고 투실한 개구리를 보면서 나도 많은 생각을 했다. ‘과연 나는 이 녀석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아 왔던가?’ 아이가 공을 던질 때마다 잔잔한 뉘우침과 부끄러움이 찰싹찰싹 내 가슴을 때린다. ‘나는 이 녀석에게 삶을 대하는 자세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아이의 제자이자 스승이 된 나는 그 다음 날로 농구공을 하나 샀다.
녀석이 조금 더 크면 공 던지는 법을 직접 가르치기로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다. 남을 가르치고자 한다면 나부터 잘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나는 정녕 대학 신입생 시절 이후 한 번도 만져보지 않았던 농구공을 무려 20년 만에 다시 잡게 된 것이다. 매일 아침 한 시간씩 총 6주간 연습하는 것으로 계획을 세우고, 동기부여를 위해 그 과정을 촬영해서 ‘Before & After’ 영상을 만들기로 했다. 예상대로 첫날 스코어는 형편없었다. 자유투와 레이업을 합친 평균 성공률이 30%를 밑돌았고, 특히 왼손 레이업은 빵점이었다. 이후 나는 매일 슛을 연습하는 한편, 출퇴근길에는 짬짬이 유튜브를 보며 왕년의 ‘슛 도사 이충희’ 감독을 비롯한 여러 농구 인들의 강연을 들었다. 그 과정에서 내가 깨달은 것은 첫째, 슛은 팔로 쏘는 것이 아니라 무릎으로 쏘는 것이며 둘째, ‘왼손은 거들 뿐’ 이라는 말이 틀림없는 진실이라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투브에는 유익한 강연들이 정말 많다는 사실이었다. 어쨌거나 나는 통산 85%의 성공률을 기록하는 것으로 6주간의 도전을 마무리하였고, 그 과정을 고스란히 담은 영상은 나중에 아이가 더 크면 함께 보면서 슛을 가르쳐 볼 참이다. 타고난 재능의 소유자들은 별다른 노력 없이도 수월히 높은 경지에 도달할 테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기본 원리를 제대로 배우고 꾸준히 노력하면 평균 이상의 성과는 거둘 수 있는 것이 또한 세상 이치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스승의 날이 다가오니 스승이라는 존재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국어사전에 ‘선생’은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 ‘스승’은 자기를 가르쳐 인도하는 사람이라고 나온다. 요즘은 온라인에 접속만 하면 그 어떤 분야에 대한 것이든 관련 전문가들이 친절한 가르침을 제공하고, 시청자들은 무료로 자유롭게 원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 그 분야가 기술이건 예술이건, 과학이건 철학이건, 단지 전문 지식을 배우는 것 이상으로 삶에 대한 깊고 넓은 통찰을 얻을 수 있는 훌륭한 강연들이 많다는 점에서, 우리는 좋은 선생들과 스승들을 쉽게 만날 수 있는 시대의 축복을 누리고 있는 것 같다. 스승은 바로 우리 주위에도 있다.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라 하여, ‘세 사람이 모인 곳에는 반드시 내 스승 될 만한 이가 있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내가 주위 사람들의 장점을 배우고 이를 통해 단점을 고쳐나간다면 이들은 분명 나의 스승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그런 점에서 나에게도 좋은 스승들이 있다. 각자의 인생을 치열하게 살며, 간혹 내가 나태해질 때면 따끔한 조언을 아끼지 않는 이들이 주위에 있기에, 나는 오늘도 스스로를 독려하며 삶에 정진할 수 있다. 내 모든 스승들에게 다시금 감사를 느끼며, 이번 스승의 날에는 간만에 나의 작은 ‘개구리 스승’과 함께 농구 코트 나들이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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