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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167) 털에 대한 단상 / 이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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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1,130회 작성일 2021-07-16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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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167>
털에 대한 단상
 
이병규 / 한국문협 인니지부 회원


어릴 적부터 난 몸에 참 털이 많았다. 아버지도 많으셨고 삼촌도 많으셨고 할아버지도 많으셨다. 심지어 고모들도 많았다고 한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이미 코밑에 거뭇거뭇 콧수염이 보이기 시작하던 것이 졸업 할 땐 봐주기 힘들 정도로 까맣게 자랐고 중학교 올라가면서부터는 아예 아버지와 함께 면도를 할 정도였다. 그나마 매일 면도라도 할 수 있는 콧수염은 양반이었다.
 
다리털이 무럭무럭 자라나면서 체육 시간이 되면 체육복 갈아입는 시간은 항상 내 울창한 다리 수풀이 친구들 사이에 화재였고, 고등학교를 들어가니 하다하다 가슴에서도 털이 자라기 시작했다. 가끔 면도기로 밀어 보기도 했으나 매일 밀기도 힘들고 자랄 때 그 짧은 털에 찔리면 그 고통도 굉장했다. 겨드랑이와 가슴 털이 나면서 수영복을 입거나 여름이라도 헐렁한 속옷 차림으로 지내던 인생도 끝이 났다. 속상한 마음에 아버지한테 고민을 털어놓으면 아버지도 같은 고충을 겪었다며 아버지는 늘 미안하다고 하셨다.
 
외모에 한참 신경 쓰일 나이에 털들로 인해 나의 사춘기는 힘들게 지나갔고, 어느 순간인가 옷이란 가림 막 없이 외출하는 상황은 최대한 피하는 삶으로 바뀌었다. 매일 아침 면도는 피할 수 없는 일상이 되었고, 가끔 가던 목욕탕은 욕실로 대체 되었다. 오랜 기간 공생의 결과, 나는 나의 털들을 나의 일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적당히 가꾸면서 공존하는 법을 터득해 살아가고 있다. 도대체 남의 몸에서 주인 허락도 없이 거주하면서 너희들은 염치도 없이 그렇게 열심히 자라는 거니? 겨드랑이에 복실 복실, 가슴에 북실북실, 다리에 수북수북!

그래 많이 봐줘서 눈썹은 먼지나 티끌들로부터 눈을 보호한다고 필요하다고 치자, 콧구멍 속의 털들은 폐로 들어가는 공기를 걸러주는 필터 역할을 한다고 하니 너도 필요하겠구나! 그런데 너희들 말이다 겨드랑이와 다리, 팔이며 몸에 나 있는 너희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열심히 자라고 있는 것인지 참 뻔뻔도 하다.
 
 
사전적 의미로 털은 “피부 아래 모근이라는 조직에서 실처럼 자라나는 형태의 물질”로, 주요 성분은 단백질이라고 한다. 그런데 인류가 진화하고 기술이 발전하면서 점차 털은 인간의 역변(逆變)을 대표하는 신체의 일부분이 되었다. 털이 많다는 것은 인간보다는 짐승에 가까움을 의미하고 그것은 곧 진화의 지연이나 진화의 반대편을 의미하였다. 어린 시절 털이 많은 사람들은 원시인이니 유인원이니 하며 놀림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나 여자 아이들의 경우는 그 상황이 치명적이었다.
 
그런데, 이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털은 땀 같은 이물질이 신체의 취약한 부분으로 흘러가는 것을 막아주고, 완충 효과와 보온 효과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더불어 인간의 번식에 있어서 상대를 구분하고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기 위한 고유의 냄새를 만들기 위해 땀샘이 밀집해 있는 체취가 많이 있는 부위를 중심으로 털이 자라고 그 냄새를 잘 붙잡아 두는 역할을 했다고도 한다. 그래서 털이 많은 곳은 냄새도 많은 것 같다.

최근 뉴스들을 보면 젊은 사람들 사이에 이 털들을 제거하는 미용 작업이 유행하고 있단다. 처음에는 젊은 여성들이 수영복을 입고 맵시를 뽐내기 위해 유행하던 브라질리언 왁싱으로 시작해서 최근에는 남자들에게도 각광 받는 유행이 되었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왁싱하는 인구가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각종 SNS에서는 왁싱이라는 작업에 대한 여러 가지 방법들이 소개되기도 한다. 이렇게 털들은 점점 인간과 담을 쌓고 이별 중인 것 같아 왠지 털 쟁이 로서의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다소 과다한 털을 보유한 사람으로 가끔 이런 상상을 해본다. 인류가 만약 옷이라는 것이 발명되지 않아 털과 함께 살아야 하는 운명이었다면, 털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고 털이 어쩌면 중요한 미의 기준이 되었을 것이다. 왁싱 샵이라는 끔찍한 것은 존재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고, 거리마다 길게 늘어뜨린 겨드랑이 털과 다리털을 다듬고 윤기를 강화해준다는 미용실이 넘쳐 날 것이고, 온갖 매체나 상업적인 광고, 그리고 학계에서는 털이 더 잘 자라게 하기 위한 연구가 진행되고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공공연히 이 털과 관련된 스토리의 콘텐츠가 흘러 넘쳤을 것이다. 그런 시절에 태어났으면 나도 한 역할 했을 텐데 참 많이도 아쉽다.

그래 뭐, 코에 까맣게 수염이 좀 자라면 어떻고, 손가락 위에 털들이 가끔 날 간지럽히면 어떠랴, 겨드랑이 털이 까칠해도 샤워 매일 하면 되고 다리털은 물리적으로 딱히 날 괴롭히지 않으니 적당히 우리 사이좋게 지내자. 물론 알아서 조용히 사라져 주면 너무 고맙겠지만, 오글오글 붙어 있다고 뭐라고 하지 않을 테니 앞으로도 잘 지내보자 나의 털들아!
하지만 말이야, 다른 건 몰라도 제발 내 머리털들아 그대들은 나를 좀 버리지 말아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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