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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한국문단 특별기고 (170) 나의 든든하고 아름다운 녹색 배경 / 공광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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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6,693회 작성일 2021-08-06 11:25

본문

<수필산책 170 /한국문단 특별기고 >
 
나의 든든하고 아름다운 녹색 배경
 
공광규/시인
 
 
고향 솟골은 오래된 느티나무와 자귀나무꽃과 노을이 아름다워서 인생의 저녁도 아름다울 것 같은 마을이다. 솟골과 지초실을 경계하고 있는 구불구불했던 냇물은 폭이 작아서 이름이 없다가, 직선으로 경지정리를 하고 나서 흥산천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금강의 지류인 이 냇물은 내가 어렸을 때 뱀이 기어가듯 동네 앞 들판을 기어가고 있었다. 냇물에는 보가 하나 있었는데 구수보라고 불렀다. 구수는 소에게 먹이를 주는 구유의 충청도 사투리이다. 그러니 구유 모양의 보라는 말이다. 물을 가두어 논에 대느라 돌로 쌓아놓은 오래된 보였다. 구수보는 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물이 마른 기억이 없다. 나는 넓고 깊이가 완만한 구수보에서 어려서부터 동네 형이나 누나들에게 헤엄을 배웠다. 구수보 아래는 물이 떨어지면서 파놓은 깊고 검은 웅덩이가 있었고, 나이 먹은 형들이나 멱을 감을 수 있는 위험한 곳이었다.
 
냇가를 따라 여러 그루 미루나무들이 줄지어 있었다. 가장 키가 크고 오래된 미루나무는 구수보 옆에 서 있었다. 미루나무는 물가에서 쑥쑥 키가 잘 크기는 하나 재질이 너무 물러 재목으로 사용할 수 없는 나무다. 아버지는 미루나무처럼 성정이 물러터진 나를 항상 걱정하셨다.  악착같은 것이 없는 내가 커서 제 밥벌이나 할까싶어서였을 것이다. 미루나무는 그림붓이 거꾸로 서있는 모습이다. 계절에 따라 들판 풍경이 색깔을 바꾸니, 모두 미루나무가 색칠을 하는 것이다. 바람이 부는 날은 사생대회에 나온 학생들이 마감을 앞두고 더 열심히 붓질을 하는 모습이다. 어떻게 보면 구불구불한 논둑도 부드러운 산 능선도, 구름과 해와 밤하늘의 별도 이 미루나무 붓이 그리는 것 같았다.
 
 
 
시냇가 미루나무 여럿
들판 캔버스에 그림을 그립니다
바람 부는 날은 더 열심히 그려댑니다
곧은길만 가기 어려운 사람 발걸음을 생각해
논둑과 밭둑과 길은 휘어지게 그리고
높이 떴다 지는 둥근 해가 다치지 않게
산 능선을 곡선으로 그립니다
미루나무도 개구쟁이 아이를 키우는지
물감통을 들판에 확!
엎지를 때가 있습니다
미루나무도 집으로 돌아가는 저녁이 되면
붓을 빨러 냇물로 내려가다 뒹구는지
물감이 하늘에 튀거나 언덕에 흘려놓기도 합니다
미루나무의 실수는 천진해서
별이나 풀꽃이 됩니다
이런 미루나무도 심심한 날이 있어서
뭐라 뭐라 허공에 붓글씨를 쓰기도 하는데
나는 어려서 딱 한 번 읽은 적이 있습니다
“광규야, 가출하거라.”
         -- 졸시, 「미루나무 붓글씨」 전문
 
 
지금 고향 들판은 경지정리를 하면서 냇물을 일직선으로 만들고 논둑을 반듯하게 만들어 옛날 모습을 찾을 수 없다. 그늘이 진다며 키가 쉽게 크는 미루나무도 심지 않았다. 냇물과 논둑이 반듯해지고, 어지간한 도로는 시멘트로 포장되었다. 그래도 시골이 시의 제재로 들어올 때 떠오르는 것은 냇물과 논두렁이 직선으로 변하기 이전의 시골 풍경이다.
 
위 졸시를 보면 시골 들판을 가로지르는 냇물이 있고, 냇둑에 하늘을 향해 미루나무가 붓대가리처럼 서 있다. 미루나무는 겨울이면 갈필로 농사가 끝난 황량한 논을 그리고, 봄이면 연두색 물감으로 들판을 색칠하고, 여름이면 푸른색 물감으로 들판을 색칠하고, 가을이면 노랑물감으로 들판을 색칠한다. 하늘에 붓질을 하던 미루나무가 물감을 하늘에 뿌리면 그것이 별이 되고, 실수를 하여 물감 통을 언덕에 엎지르면 그것이 꽃이 되는 상상이다. 바람이 불 때는 붓대가리를 마구 휘두르며 붓글씨를 쓰는 상상이다. 그러나 빈 공중에 써대는 미루나무의 문장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미루나무를 오래 관찰하여 자기 것으로 만든 나였을 것이다.
 
미루나무의 유혹은 아니었지만, 나는 중학교 때 가출을 생각한 적이 있었다. 시험기간이라서 시험공부를 해야 하는데, 집에 가면 매일 농사일을 시키니 부아가 치밀었다. 나는 공부하러 가출하기로 작정하고 동네 사람들이 못 보게 집 뒤 언덕을 넘어 무작정 서울 쪽을 향해 걸어갔다. 뒤꼍 언덕을 넘어 친구 기호네 밭을 가로질러 한참을 가다가 치밀던 부아가 식어 되돌아 왔다. 가출을 해봤자 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보리를 베고 바심을 하던 때였다. 처음이자 마지막 가출시도였다. 졸시 「청양」에 나오듯, 내가 살았던 고향은 어깨선이 다정한 월산과 청태산과 구봉산이 어린 내 누이들처럼 밤마다 초롱초롱한 별을 덮고 자는 마을이다.
 
지금은 옛 모습이 사라지고 없지만, 내 마음속 들판 한 가운데 서서 열심히 들판에 붓질을 하는 미루나무가 있던 마을이다. 아무튼 기억 속의 미루나무는 시멘트로 이루어진 회색 신도시에 살고 있는 나의 든든하고 아름다운 녹색 배경이다.*
 
 
 
* 공광규 / 시인, 문학박사
1960년 서울 돈암동에서 태어나 충남 청양에서 성장했다.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단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문학박사)하고, 1986년 월간《동서문학》으로 등단했다. 윤동주상문학대상, 현대불교문학상, 신석정문학상, 녹색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대학일기』 『마른 잎 다시 살아나』 『지독한 불륜』 『소주병』 『말똥 한 덩이』 『담장을 허물다』 『파주에게』와 시선집 『얼굴반찬』, 인도네시아어 번역시집 『Pesan Sang Mentari 햇살의 말씀』이 있으며, 시 그림책 『흰 눈』 『청양장』 등 시 그림책과 논문 『신경림 시의 창작방법 연구』와 시창작론 『이야기가 있는 시 창작 수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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